•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Ⅵ. 가야의 성립
  • 4. 가야연맹의 형성
  • 3)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3) 전기 가야연맹의 해체

 전기 가야연맹의 발전 원동력은 낙랑군을 통한 원거리 교역과 그를 통한 선진물자 취득 및 대왜 교역에 있었는데, 313년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고구려에게 멸망되자 그 기본 구도는 일단 흔들리게 되었다고 보인다.

 ≪삼국사기≫奈解尼師今紀와 勿稽子傳 및≪三國遺事≫勿稽子條에 나타나는 이른바「浦上八國의 亂」이 그것이다. 즉 신라 나해왕 14년(209)에 保羅國·古自國·史勿國 등의 포상 8국이 가야를 침략하려고 하자 가야 왕자가 와서 구원을 청하였고, 이에 신라군이 구원하러 가서 8국 장군을 죽이고 6천 명을 잡아 돌아왔으며, 그 3년 후에도 또 한 차례의 침공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포상 8국이 연합하여 가야국을 공격하였다는 것은 단순한 교역상의 경쟁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화적인 단절관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무언가 예전과는 다른 급격한 변동 속에서 전쟁은 나타나는 것이고, 그러한 상태를 야기할 만한 사건은 4세기 초 낙랑군·대방군의 소멸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진문물 보급의 핵이 사라졌다는 것은 정치 사회적으로도 영향을 미쳐서 진변한 소국을 비롯한 지역세력들은 그 때까지의 문화 축적을 토대로 하여 각지에서 자기 지역 기반을 기초로 한 통합 운동을 일으키게 되고, 그런 과정 속에서 경상도지역이 새로운 분열·통합을 경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포상 8국의 난은 4세기대의 그러한 혼란상을 배경으로 나타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사건의 결과 가야국이 왕자를 신라에 인질로 보냈다고 되어 있으나 이러한 상태가 오래도록 지속된 것 같지는 않다.

 낙랑군의 멸망으로 인하여 한반도 남부에 위와 같은 변화가 초래되고 있을 무렵 낙랑·대방군을 소멸시킨 당사자인 고구려는 옛 대방지역을 사이에 두고 백제와 대립하게 되었다. 한반도 북부의 이 대립상황은 그대로 한반도 남단까지 영향을 미쳐서 신라와 가야의 문화는 각기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분기되어 나간다. 즉 경주세력은 진한의 맹주라는 역할을 계속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고구려의 부용이 되어 그 제도 및 문물을 수입하여 주변의 다른 소국들에게 분배함으로써 자기 지역에 대한 통솔을 더욱 공고히 해나갔고, 김해세력은 곧 혼란을 수습하고 낙랑·대방을 대신한 백제와 교역을 계속해 나갔다.

 이리하여 신라는 3세기 단계의 진·변한문화 공통기반을 토대로 한 위에 고구려 계통의 색채를 가미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니, 4세기 중엽 이후의 적석목곽분·관모·신라토기 등에서 보이는 강건한 분위기는 그러한 요소를 반영하는 것이다. 경주 月城路 고분에서 출토한 북방계 短甲이나 고구려계 綠釉土器는 신라와 고구려 사이의 직접 통교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가야지역은 3세기 단계의 진·변한문화 공통기반을 큰 수정없이 거의 그대로 계승하면서 발전하였다. 이는 당시 백제의 영향력의 성격이 낙랑-가야-왜로 연결되던 고대 상업적 교역관계를 유지시키는 데 그쳤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백제는 4세기 후반에 들어 중국 南朝 東晋과의 교역에서 얻은 선진물자를 가지고 한반도 서남해안-일본열도를 연결하는 교역로를 장악하여 신라를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야는 그 중개역을 맡으면서 자기 지역에 대한 패권을 더욱 강화하고 왜와의 교역을 더욱 강화해 나갔다. 김해 大成洞 고분군에서 보이는 유적 규모의 증대 및 왜 계통 유물의 증가는 이를 반영하는 듯하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의 대립에 따른 신라·가야의 분화 발전은 오래가지 못하고 4세기 말 5세기 초에 걸쳐 한번 더 큰 변혁을 거치게 된다. 이는 고구려·백제 사이의 패권 다툼에서 백제가 대패하고 광개토왕의 고구려군 步騎 5만이 신라를 도와 낙동강 하류지역까지 쳐내려와 가야를 토벌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결과 가야지역은 타격을 입고 약화되며 중심지역이었던 경남 해안지방의 잔여세력 중 일부는 전 단계의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던 다른 지역으로 흩어지거나 또는 일단 연맹의 핵을 잃고 쇠잔하여진 듯하다. 즉 김해·창원지역에는 초기 유적이 풍부하여 그것이 무난하게 성장하면 경주와 같은 상당한 전제권력을 이룰 가능성이 많았으리라고 예측되는데, 5세기 이후 그것이 정상적인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음은 그러한 한 차례의 파산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김해 등 중심세력은 현저히 퇴락하고, 동래·성주 등의 일부 세력은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이며 세력을 키워나가던 경주 중심의 신라지역으로 이탈하여 들어갔다고 보이므로 이와 함께 전기 가야연맹은 해체된 것이라고 하겠다.

<金泰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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