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1. 가야연맹의 발전
  • 1) 후기 가야연맹의 형성

1) 후기 가야연맹의 형성

 전기 가야연맹의 소멸과 함께 일시적으로 약화되었던 가야지역이 5세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 국제 환경에는 또다른 변화가 일고 있었다. 우선 신라는 5세기 전반부터 중엽에 걸쳐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고대국가의 기반을 닦아가면서 백제와 화친을 맺었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의 장수왕은 평양 천도를 단행한 이후 남하정책을 추구하더니 결국 재위 63년(475)에 백제를 쳐서 수도 慰禮城(서울)을 함락시켰다. 그리하여 백제는 부득이 熊津(공주)으로 남천하고, 신라는 그 기회를 틈타 추풍령을 넘어 三年山城(보은)까지 진출하는 등 국제관계가 크게 동요하게 되었다.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주변 정세가 이처럼 급변하자, 이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낀 옛 가야지역의 소국들 사이에 재결속의 기운이 일게 되었을 것이다.≪삼국사기≫등의 문헌사료에 한동안 보이지 않던「가야」의 이름이 이 무렵부터 다시 나타나는 점, 그리고 이 지역 고분군의 규모나 유물의 양이 이 무렵부터 크게 증대되는 점 등은 가야지역의 재통합 움직임과 직결된 결과였다고 보인다. 그 재통합을 새로이 주도하던 세력은 고령 지산리 고분군을 축조하던 집단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전기 가야연맹 시기에는 김해의 가락국이 大駕洛 즉 大加耶였는데, 당시의 고령세력의 국명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대가야로 국명을 바꾼 것일까.

 우선≪日本書紀≫繼體紀에 보면 加羅 즉 대가야를「伴跛」로 지칭한 사례가 몇 번 나오며,≪梁職貢圖≫百濟國使傳에도 주변 소국의 하나로서 대가야 대신「叛波」가 나오고 있다. 그러므로 叛波 또는 伴跛가 5세기 후반 이후로「대가야」을 표방한 고령지방의 前主體勢力의 하나였다고 추측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또≪三國志≫魏書 韓傳의「弁辰半路國」의 존재가 주목되는데, 여기서「半路」의「路」字가「跛」의 오기였다면, 이것도 같은 곳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고령은 원래 伴跛(半跛·叛波)國을 칭하면서 변한연맹 또는 전기 가야연맹의 한 후진세력으로 남아있었으며,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치는 변란기에는 김해·함안과는 달리 심한 타격을 입지 않은 채로 자기 세력을 유지시키면서 실력을 축적해 나가다가, 5세기 후반에 들어 대가야라는 이름으로 예전의 김해 중심 가야연맹의 판도를 복구하고자 하였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고령지방에 전하고 있는 대가야 시조신화도 5세기 후반의 그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다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즉 이는 고령세력이 수로왕과의 시조대부터의 형제관계를 표방함으로써 전기 가야연맹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인식 아래 가야지역을 재통합하려고 한 것이다. 고령세력이 옛 이름인「가야」를 따서「대가야」라는 국호를 사용한 이유는 낙동강 서안의 소국들이 당시 크게 성장한 신라에게 쉽사리 포섭될 가능성을 우려하여 옛 가야연맹으로서의 동질감을 고취시키자는 배려를 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제 5세기 후반에 들어 활발한 활동을 함으로써 여러 계통의 문헌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하며 국제관계의 한 변수로 작용하게 되는 고령 지산리세력 즉 대가야의 움직임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 첫번째로서≪南齊書≫의 기록이 눈에 띄는데, 즉 479년에 加羅王 荷知가 사신을 보내 조공하므로 輔國將軍本國王을 제수하였다는 것이다.715)≪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傳 加羅國.

 이 기사에서 가라왕 하지는 고령 대가야왕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온당하다.「하지」는 加耶琴을 만들었다는 가야국 嘉悉王과 이름이 유사하여 동일인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가야금 및 가실왕 관계 전설이 고령지역에 전하고 있으므로 하지가 고령 대가야의 왕이라는 추정을 더욱 뒷받침할 수 있다.

 당시의 대가야는 일단 육로로 河東지역으로 나와 해로로 중국에까지 교통하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 교통로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가야지역 내부의 통솔관계를 분명히 하고 해로에 대해 백제·고구려가 가하는 제약을 극복해야만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내적·외적 제약을 극복하고, 가라왕 하지가 對中交易을 독자적으로 성공시켜 남제로부터 제3품에 해당하는 벼슬을 받았다는 점은 가야지역에 신라나 백제에 의존치 않는 독립적인 지배권력의 성장이 있었다는 증거로서 제시될 수 있다.

 그 후 가야는 481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 狐鳴城 등 7성을 빼앗고 다시 彌秩夫(흥해)로 진군하는 것을 백제와 함께 원병을 보내 신라군을 도와 막았다고 하였다.716)≪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3년 3월. 즉 가야는 이제 삼국관계에서도 하나의 세력변수로 등장하여, 고구려가 동해안로를 따라 신라까지 깊숙이 공략하려는 것을 신라·백제와 함께 공동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또한 490년대에 들어 신라는 백제 동성왕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백제와 공동 대처하면서 한편으로는 그 허약함을 틈타 추풍령의 안팎지역에 축성하며 팽창하고 있었다. 496년에 가야는 신라에게 白雉를 보내717)≪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마립간 18년 2월. 호의를 표시하였다. 가야가 신라에게 호의를 표한 것이 백제와의 분쟁 때문이었는지의 여부는 사료의 결핍으로 알 수 없으나, 여하튼 연맹 결성 이후로 대가야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이 국제관계에서「가야국」의 이름 아래 지속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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