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2. 가야연맹의 약화
  • 1) 탁기탄국의 신라 투항

1) 탁기탄국의 신라 투항

 520년대의 가야 주변 국제정세는 심상치 않아서 백제는 무령왕 후반기에 들어 변경의 소규모 전투에서나마 고구려를 연속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할 정도였고, 신라는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체제 정비면에서 가야연맹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다. 특히 백제는 한편으로는 왜와의 교역을 트고, 한편으로는 중국 남조 梁과의 교역을 재개하면서 신라를 이에 동행시키는 등 국제교역의 중심으로 대두되었다.

 그런데 대가야는 연맹 결성 이후 영역을 팽창하는 중에 백제와 대립되어, 백제는 가야를 사이에 두지 않고 직접 왜와 교역하기를 모색하였으므로 가야연맹은 백제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국제질서에서 소외되었다. 백제가 가야지역내에서 마음대로 왜와 교역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가야연맹은 깨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대가야는 이를 군사력으로 저지할 수밖에 없었으나 국제교역상의 고립이란 심각한 문제였다. 백제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한 대가야는 고립을 탈피하기 위하여 신라와 우의를 다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가야는 신라와의 결혼동맹을 추구하여 522년에 고령 대가야의 異腦王이 신라에 청혼하자 법흥왕이 伊湌 比助夫의 누이동생을 보내 주어 결혼이 성립되었다.725)≪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9년.
≪新增東國輿地勝覽≫권 29, 高靈縣 建置沿革 所引 釋順應傳.
비조부가 신라왕실에서 어떤 계보에 속하는 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골 이상만이 가질 수 있는 벼슬인 이찬의 관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왕족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당시의 신라는 미숙하나마 고대국가 체제를 완비하여 정복전쟁 및 영토확장의 잠재력을 갖춘 상태였으나, 조금 앞서 있다고는 해도 가야연맹을 일시에 함락시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비하여 백제와 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쉽사리 가야지역에 대한 정복에 나설 수는 없었다. 그런 상태에서 가야에서 청혼이 들어오자 이를 통합의 좋은 계기로 보고 수락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성립된 가야·신라 사이의 동맹관계는 얼마동안 우호적으로 지속된 듯하다. 그리하여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대가야에 시집온 신라왕녀는 아들 月光太子를 낳았으며, 결혼 2년 후인 524년에는 신라국왕이 남쪽 경계를 돌아보며 땅을 개척하는데 가야국왕이 와서 만나기도 하였다.72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1년 9월. 이는 당시 가야연맹의 대표세력인 고령 대가야의 왕이 신라 법흥왕과 마차해(삼량진)·추봉(밀양) 방면에서 만나서 영토의 경계를 상호 확인하기 위해 회담을 가졌던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회담의 결과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합의가 되었는지 그 직후 별다른 분쟁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얼마 후 가야·신라 사이에는 결혼동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신라가 처음 왕녀를 보낼 때 100명의 종자를 함께 딸려 보냈는데, 대가야왕은 가야연맹의 맹주로서 신라왕실과 결혼관계를 맺은 것을 널리 과시하기 위해 그녀의 종자들을 각 지방에 흩어 두었다. 그러나 몇 년 후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신라측에서는 비밀리에 그녀의 종자들에게 신라의 의관을 입도록 하여 오히려 신라의 정치적 위엄을 과시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가야연맹 소속의 국가들은 대가야왕이 신라측에 굴종적인 밀약을 맺지 않았는가 의심을 품고, 그 중 하나인 탁순국(창원)의 阿利斯等이 대가야왕의 허락없이 자신의 고유직권으로 자기 지역내에 있던 종자들을 신라로 쫓아버리고 말았다.727)≪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23년 3월. 卓淳國의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金泰植,
<6세기 전반 加耶南部諸國의 소멸과정 고찰>(≪韓國古代史硏究≫1, 1988), 192∼205쪽 참조.

 그러자 신라측에서는 이를 트집잡아 대가야에게 결혼동맹 자체의 폐기를 요구하였으며, 이에 대가야왕 己富利知伽는 아이까지 낳았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여 동맹 자체를 폐기할 뜻은 없음을 밝혔다. 결국 대가야는 이 분쟁을 떠맡아 해결하지 않고 그 책임을 연맹 소속국인 탁순국에게 전가시킨 셈이 되었으며, 이는 신라가 탁순을 문책해도 문제삼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신라는 탁순을 문책하러 가는 길에 刀伽·古跛·布那牟羅(모두 지명 미상)의 세 성과 탁순 북쪽 변경의 다섯 성을 함락시켰는데, 이는 곧 창원 북쪽지역과 낙동강 건너편의 영산 또는 밀양지방의 몇몇 성을 가리키는 듯하다. 그 결과 가야 소국의 하나로서 유일하게 낙동강 동안에 있으면서 신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던 㖨己呑國(영산·밀양)은 신라의 공격 및 위압에 눌려 멸망하였다.

 탁기탄의 멸망 원인에 대하여 훗날 백제 성왕은 두 차례에 걸쳐 언급하였다. 첫번째로는 탁기탄은 위치가 대가야와 신라의 접경에 있어서 늘 공격을 당하는데 임나 즉 가야연맹이 구원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원인이었다고 하였다. 두번째로는 㖨國의 函跛旱岐가 대가야에 두 마음을 품어서 신라에 내응한 것이 원인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728)≪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2년 4월 및 5년 3월. 즉 탁기탄은 분쟁의 마지막 단계에 신라의 힘에 눌리고 또 대가야를 믿을 수 없게 되어 신라에 내응하여 쉽사리 멸망한 것을 짐작케 하며, 이는 앞에 서술한 상황에 비추어 그대로 인정되는 바이다. 그리하여 탁기탄국은 후기 가야연맹내에서 신라에게 가장 먼저 멸망당한 나라가 되었는데, 그 멸망 연대는 대략 529년을 전후한 2, 3년간의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이로써 신라의 법흥왕은 애초의 결혼동맹 당시부터의 가야지역 병합 목표를 1단계 성공시킨 셈이 되었고, 대가야는 결혼동맹으로 인한 신라의 술책에 빠져 탁기탄국을 상실하였다. 가야연맹은 그 동남부지역 국가들의 멸망 또는 이탈로 와해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지역이 신라에 내응하여 쉽사리 병합되었다는 것은 고고학적으로 이 지역이 5세기 이후로 상당 기간에 걸쳐서 신라문화권에 복합되어 있었다가 5세기 후반 이후에 대가야 계통의 문물이 복합되어 나타났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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