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본 것처럼 탁순국이 신라로부터 공격을 받아 타격을 입고 탁기탄국이 신라에 병합되자, 가야연맹내의 남부 제국은 그것을 저지하지 못하고 방조한 고령의 대가야를 불신하게 되어, 자구책으로 자체내의 단결을 도모하게 되었다. 이는 그 지역 중에서 가장 강성했던 함안의 안라국이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한 움직임은 진주·사천·고성·함안·산청·하동 등의 가야 서남부지역의 고분출토 유물에서 엿보이는 문화적 공통성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그 단결을 주도한 안라는 우선 새로 높은 건물[高堂]을 지어서 새로운 정치적 합의체의 맹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백제·신라·왜 등의 사신을 초빙하여 몇 달 동안이나 지속되는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729)≪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23년 3월. 이 안라회의의 명분은 탁기탄을 멸망시킨 신라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해 그를 다시 회복하려는 것이었으나, 그 실질적인 목적은 국제회의 개최를 통해 가야 남부 제국내에서 안라의 맹주로서의 위치를 고착시키고 이를 대외적으로 과시하려는데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가야 남부 제국 중에서 안라의 뜻에 동조하는 소국들로부터 대표자들이 먼저 와서 안라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러한 회의가 개최되자 전통적으로 가야 남부지역을 통해 교역하던 왜의 한 세력으로부터 한 사신이 왔으며, 그가 近江毛野臣이라고 인식되는 자였다. 그들은 親安羅的인 성향을 띠고 있었으며, 그들의 대외적인 후원을 백제와 신라에게 과시하려던 안라측의 요청에 의하여 상당한 수행병력도 거느리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는 당시에 신라와는 교빙관계에 있었으나, 가야지역의 대표세력인 대가야와는 대왜 무역경쟁 이후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탁기탄국을 함락시키고 가야 제국이 분열을 일으키는 상태를 중시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聖王은 佐平級의 고위관직자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안라 등의 가야 남부 제국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방안을 모색하였다.
한편 신라는 탁기탄의 병합이 그의 자발적인 내응에 의한 편입이었다는 정당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아직까지는 친신라적인 성향을 포기하지 않은 대가야를 그대로 가야지역의 대표자로 공식 인정해 둘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는 이 안라회의 자체에 대하여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으므로 의례적으로 奈麻級의 외교사절을 파견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회의를 자기의 영향력 확대의 기회로 삼으려던 백제의 의도는 안라의 자주적인 태도에 의하여 무산되었고, 오히려 안라의 친왜정책에 대해 깊은 소외감과 우려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예전에 대가야와의 투쟁에 의해 획득해낸 대왜교역상의 주도권을 안라에 의해 다시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백제는 안라의 자주적이고 친왜적인 성향을 주목하다가 결국은 비상수단을 써서 군사력으로 이를 저지하려 한 듯하다. 당시 백제의 행동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일본서기≫繼體紀 25년 12월조의 細注에 인용된≪백제본기≫소재의 기사가 있다.
太歲 辛亥 3월 군대가 나아가 安羅에 이르러 乞乇城을 영위하였다. 이 달에 高麗가 그 王 安을 시해하였다. 또 듣건대 일본천황과 태자·皇子가 모두 훙거하였다고 한다.
윗 글에서≪백제본기≫의 紀年에 의한 신해년은 531년에 해당하는데, 이 해는≪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安藏王 崩年과도 일치하므로, 그 편년은 계체기의 일반 연대와는 달리 그대로 따라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본천황과 태자·황자가 모두 죽었다는 것이 반드시 大和國에서의 사건인지 아니면 북구주 등 다른 지역에서의 사건인지는 확정지을 수 없으나 어쨌든 왜지내에서 어떤 중대한 변고가 있었음은 틀림없다.
이러한 사료고증을 전제로 하면서 위의 기사를 해석해 보건대, 백제는 531년 당시에 고구려가 내부 정변을 겪고 있는 와중이므로 북방의 변경을 침공할 우려가 없고 왜지에서도 어떤 중대 변고가 일어나 외부에의 개입을 못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다음에 안라로 침공해 들어가서 걸탁성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백제는 남방 경영을 거의 마무리지어 전남 섬진강 하구까지 직접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그 곳에서부터 강을 건너 하동으로 상륙하여 진주 남강의 남안을 거쳐 함안까지 진공해 들어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여기서 걸탁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안라 즉 함안의 인근에 있는 성임은 틀림없겠다.
이러한 백제의 치밀한 공격을 받게 되자, 毛野臣 등의 倭使 일행은 이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쫓겨나고 말았고, 안라 및 그 서남부의 가야 소국들은 백제의 정치적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다만 백제의 영향력이라는 것은 신라와 같은 군현 편제에 의한 직접적 통제가 아니라, 在地의 지배체제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 내부에 백제의 군사적 거점을 일부 확보해 놓는 과도적·간접적 통제방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안라 以西의 가야 서남부 지역은 백제의 일정한 영향력을 받게 되어, 그 소국들이 멸망한 것은 아니더라도 그 주권의 일부는 백제에 의하여 소멸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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