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2. 가야연맹의 약화
  • 3) 남가라국(금관국)의 신라 투항

3) 남가라국(금관국)의 신라 투항

 탁기탄이 신라에 병합되고 안라에 백제군이 진주해 들어와서 이제 가야 남부지역에서 독립세력은 낙동강 하구 부근의 남가라와 탁순만 남게 되었다. 이들은 이후 자체내의 결집을 통하여 힘으로 자기를 보존하기는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 지역이 대왜교역상의 요충지라는 점을 빌미로 하여 자기 지배체제를 보존시키려고 하였던 듯하다.

 그리하여 탁순국왕 아리사등 즉 己能末多干岐는 백제·신라 양쪽으로부터의 침공상황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다가 자기 지역에 가까이 와 있던 모야신을 중재인 자격으로 두고, 신라·백제왕에게 탁순·남가라지역을 일종의 비무장지대로 인정시키기 위한 평화회담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양국에서 모두 상위 관직자를 보내지 않는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이미 백제는 안라로부터 그 서쪽에 대한 견제력을 지니고 있었고 신라는 백제의 그러한 움직임을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양국 모두 이 지역에 대한 평화협정 정도로는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곧이어 신라는 중요한 해운기지인 김해지역까지 백제나 왜의 영향에 휩쓸릴 것을 경계하여 서둘러 上臣 伊叱夫禮智干岐 즉 異斯夫를 파견하였으며, 그는 3천 병사를 이끌고 多多羅原(다대포)에 주둔하면서 군사적 시위를 하였다. 신라가 거기서 석달 동안이나 기다렸다는 것은 그의 남가라 침공에 대한 가야·백제·왜 등의 태도를 살피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 동안 백제나 가야나 왜로부터 이의제기나 적극적인 간섭이 들어오지 않았다.

 이에 신라는 낙동강을 건너 서서히 공략을 전개하여 고립무원의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 4村을 함락시켰고, 그 와중에 신라에 투항한 사람들을 비롯한 수많은 인원을 신라영토내로 옮겨 놓았다.730)≪日本書紀≫권 17, 繼體天皇 23년 4월. 이 때 함락된 4촌 가운데 다다라(安多)는 다대포, 수나라(金官)는 김해, 비지(背伐)는 웅천 부근에 해당하므로, 이로 인하여 南加羅國 즉 金官國은 멸망한 것이라고 하겠다. 남가라국의 멸망 연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삼국사기≫신라본기 법흥왕 19년의 紀年을 따라 532년으로 보는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남가라국 즉 금관국의 멸망 원인에 대하여 사료별로 차이가 있어서 약간의 의문점이 남으므로 이를 고찰해 보자. 우선≪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金官國主 金仇亥는 보물을 가지고 그 가족들과 함께 항복하였으므로 신라가 이를 예우하여 上等의 位 즉 眞骨로 삼았으며 본국으로 食邑을 삼게하였다고 되어 있다. 둘째로≪삼국유사≫소재≪가락국기≫에 의하면, 신라 眞興王이 군대를 일으켜 다가와서 쳤는데 仇衡王은 인원부족으로 대적할 수가 없어서 王子·上孫과 함께 항복하여 신라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셋째로≪일본서기≫계체기에서는 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신라 上臣 이사부가 남가라 4촌을 정벌하고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본국으로 돌아갔다고 하였으며, 흠명기에 나오는 성왕의 언급에 의하면 남가라는 작고 협소하여 갑자기 준비하지 못하고 의탁할 곳을 몰랐기 때문에 망했다고 하였다.731)≪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2년 4월.

 이를 종합해 볼 때 신라가 군대로 금관국 즉 남가라국을 정벌한 것이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틀림없으며, 남가라는 어느 정도 대항하다가 항복한 것이다. 다만 여기서 신라가 작고 협소한 나라일 뿐인 남가라국 왕손에게 진골의 신분을 사여한 것은 그들을 신라왕족과 대등한 수준의 가야연맹 맹주국의 왕족으로 간주한 것을 의미한다. 이는 곧 신라가 훗날 가야전역을 병합하기 위한 명분 축적이라 하겠으며, 대가야의 맹주권을 부인한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삼국사기≫地理志 金官小京條에 의하면 신라는 금관국을 금관군으로 편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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