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3. 가야의 멸망
  • 1) 대가야·안라 이원체제로의 분열

1) 대가야·안라 이원체제로의 분열

 가야 남부 諸國이 소멸과정을 밟는 530년대에 고령의 대가야국을 비롯한 가야 북부 제국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가 전혀 없어서 알기 어렵다. 다만≪일본서기≫흠명기의 여러 가지 기록에 다시「가라」등의 이름이 열거되는 것으로 보아, 이 당시의 가야 북부 제국은 자기 기반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백제·신라로부터의 개입을 막아낼 수는 있었으나, 그 남부 제국이 신라·백제라는 외세에 의하여 소멸되는 것을 막아줄 만한 여력 또는 통합력을 아직 가지지 못한 듯하다. 그리고 백제·신라의 일차적 침공방향이 일단 해운기지를 확보하려는 것이어서 가야 북부 제국은 그 적극적인 대상이 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한편 탁순국은 가야 남부지역의 유일한 독립지대였지만 그 북부의 구례산성을 점령하고 있었던 백제로부터 지속적인 압박을 받고 있었고, 결과적으로 일부 백제에 부응하는 귀족세력도 생겨난 듯하다. 그러던 중 백제가 내부적인 요인으로 대외적인 관심이 흐트러져 있을 때 창원의 탁순국은 신라에 투항하였다. 탁순국의 멸망 원인에 대하여 훗날 백제 성왕이 언급하기를, 탁순은 상하가 서로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결국 탁순국주가 스스로 종속되기를 원해서 신라에 내응하여 신라도적을 불러들인 것이 주 요인이었다고 하였다.734)≪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2년 4월 및 5년 3월. 그러므로 탁순국왕은 신라측으로부터 정치적 제의를 받고「도적」즉 신라군을 불러들여 附百濟輩를 소탕함으로써 스스로 신라에 편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탁순국이 신라에게 멸망된 시기는 백제가 구례모라에 축성한 534년 이후부터 성왕의 탁순국 멸망에 대한 언급이 있었던 541년 이전까지의 사이에 해당하되, 백제가 사비 천도 등으로 인하여 대외적인 문제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운 538년 직후의 어느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신라는 탁순국 병합 이후 한걸음 더 나아가 구례산성에 주둔해 있던 백제군사를 물리쳐 쫓아냈다.735)≪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5년 3월의 聖王 회고담. 이로써 신라는 탁순국의 영유를 확고히 할 수 있었지만, 반면에 백제는 가야 병합을 위한 전진기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함안의 안라국에 설치하였던 倭臣館도 그 무력적 배경을 잃어버려 혼돈에 빠졌을 것이다. 이에 안라는 백제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왜신관의 인원을 친안라 왜인관료들로 재편성함으로써 그 기구를 장악하였다. 다만 이 당시에 안라가 왜국과 어느 정도의 연관을 맺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결과 540년대의「在安羅諸倭臣」즉 안라왜신관의 관료는 안라가 왜와의 연관 아래 또는 독자적으로 임명한 왜인인 的臣(卿)·吉備臣(執事)·河內直과 백제가 임의로 파견한 왜신인 印支彌·許勢臣, 안라측의 입장을 대변하는 가야계 왜인인 移那斯·麻都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이후 안라왕은 실제적으로 이나사·마도 등을 통하여 안라왜신관을 지휘 운영하여, 눈앞의 구례산성에 주둔하고 있는 신라와 교통케 함으로써 안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즉 안라왕은 이를 가야연맹 제국이 신라와 백제로부터의 외부 압력을 막아내는 방패막이로 활용하였고, 그런 과정 중에 가야연맹내에서 안라의 지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후의 안라왜신관은 대외적으로는 성립 당시와 같이 왜국사절 주재관이라는 명분을 유지하되, 실제적으로는 안라왕의 지휘를 받아 안라를 비롯한 가야연맹 제국의 독립 보장을 위하여 활동하는 외교지원기관 즉「안라의 특수외무관서」로 변질되었다고 하겠다. 그러한 성격의 기구를「임나일본부」라고 부르는 것은 적합치 않으며, 안라에 위치하고 안라가 운영하는 왜인관료 주재관이라는 뜻에서「안라왜신관」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안라는 그 후 세력을 주변의 가야 남부지역으로 확대함으로써 북부의 대가야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중심세력으로 대두할 수 있었다.

 가야 남부지역에 안라국이 주도하는 자주적 성격의 연맹 주체가 형성되자, 백제는 가야지역의 최대세력인 대가야와 그에 동조하는 가야 북부지역에 대해서는 이전의 적대관계에서 벗어나서 적극적으로 포섭코자 일단의 문물공세를 편 듯하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야 북부의 대가야측 소국들은 신라의 배반과 남부지역 안라측 소국의 독립적 태도에 대응하기 위하여 쉽사리 친백제적인 성향으로 기울어졌으며, 고령·거창·합천 등 대가야문화권 일부에서 나타나는 백제문물의 요소는 그의 반영이라 하겠다.

 이제 안라는 왜국과의 친분을 내세움으로써 백제에 대하여 좀더 독자적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되었고, 대외적으로 대가야에 못지 않는 가야연맹 중심세력의 하나로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안라의 대두로 말미암아 이제 가야연맹은 남북으로 분열되어 명실상부하게 대가야·안라 이원체제 시대로 돌입한 것이다.736)金泰植,<6세기 중엽 加耶의 멸망에 대한 연구>(≪韓國古代史論叢≫4, 1992).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