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3. 가야의 멸망
  • 2) 가야연맹의 자구노력과 백제 부용화

2) 가야연맹의 자구노력과 백제 부용화

 540년대 당시의 신라는 진흥왕이 즉위하여 제도 정비와 함께 팽창을 도모하고 있었고, 백제도 성왕이 사비 천도 이후 중흥을 모색하고 있었다. 신라와 백제는 아직 중앙집권적인 대응태세를 채 갖추지 못한 가야지역을 선점함으로써 상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은 북방의 강국인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함께 대항하여야 하였기 때문에 가야지역에 대한 패권을 둘러싸고 즉각적인 무력 충돌을 벌일 수는 없었다.

 반면에 가야연맹은 내부적으로는 10개 정도의 소국들이 대가야 및 안라를 중심한 남북의 이원체제로 갈라져 있었으나 대외적인 면에서는 동일한 보조를 취하였다. 그리하여 가야연맹은 신라와 백제가 서로 경쟁하는 사이에서 보다 유리한 조건을 차지하기 위해 공동의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가야연맹은 우선 두세 차례나 신라에게 회의를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백제에게 요청했는데, 가야의 회의 요청이 백제의 이해관계와도 합치하는 바가 있어서 둘 사이에 외교 교섭이 이루어졌다.

 541년 4월에 안라·가라·졸마·산반해·다라·사이기·자타 등 가야지역 7개 소국의 한기들과 안라왜신관 관리, 즉 가야연맹을 대표하는 사신단이 백제에 모였다.737)≪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2년 4월. 여기서 회의장소인「백제」는 곧 천도 직후의 새로운 수도인 泗沘의 王庭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므로 일단 이 회의를 제1차 사비회의라고 지칭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가야연맹의 사신단은 자신들의 독립보장 및 백제와 화친하게 될 때 예상되는 신라의 공격에 대한 방비책을 함께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제는 자신들이 왜로부터 임나 건립을 위임받았음을 주장하고, 만일 신라가 쳐들어오면 자신이 가서 구해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물건들을 줄 뿐이었다. 백제는 안이한 자세로 신라보다 먼저 가야연맹 제국을 부용으로 삼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가야연맹 제국은 백제로부터 군령·성주 축출건에 대한 언급이 없고 가야의 독립 보장도 불철저한 백제와의 제1차 교섭 결과에 불만을 품고 곧바로 신라와 재접촉을 시도하였다. 신라와의 교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제1차 사비회의는 상호간의 이해관계 조정에 실패한 것이다. 가야·백제 사이의 제1차 교섭은 상호간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이 쟁점화되지 못하고 잠복해 있는 상태에서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끝났다.

 그 후 안라와 백제는 외교를 자기측에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각기 제3자인 왜국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한 듯하다. 이에 대해 왜의 사신이 543년 11월에 한반도에 와서 안라왜신관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왜국은 임나의 하한에 들어와 있는 백제 군령·성주를 왜신관 즉 안라에 귀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왜측이 안라 및 가야연맹 전체에 유리한 국서를 백제에게 전달한 것은 왜신관을 지휘하는 안라의 외교활동이 성공한 결과였다고 보인다.

 이에 대하여 백제는 이 사태의 주모자가 안라에 있는 왜신관 관리들 중 하내직·이나사·마도 등임을 알고, 그들을 외교적 압력으로 쫓아내려고 하였다. 즉 가야연맹 제국 및 왜와의 대외적 협조관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왜를 이용한 독자노선 추진집단을 몰아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백제가 가야연맹과의 제2차 사비회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가야연맹은 시간을 끄는 방식으로 이에 응하지 않았으며, 백제의 독촉이 급해지자 倭臣館卿 또는 왜왕의 동의가 없었다는 핑계를 대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백제는 이제 임나건립을 위하여 실지로 왜를 끌어들여 자신의 우방으로 만들고 이를 가야측에 입증하여야만 하였다. 이에 백제는 왜에 사신을 보내 대임나정책 실패의 모든 원인인 왜신관의 인원들 중 일부의 축출을 요구하였다. 왜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무응답이란 보류 또는 무관함의 표시이다. 왜는 안라를 통하여 신라 및 백제 어느 쪽과 교역하는 것이 유리한지 섣불리 판단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것은 실상 중개역인 안라의 의사에 달린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백제는 왜에 갔던 사신이 돌아온 것을 빙자하여 즉시 가야연맹과의 제2차 사비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번에는 가야연맹 집사들이 별다른 구실을 찾지 못한 채 그에 응함으로써 회의가 성립되어, 544년 11월에 안라·가라·졸마·사이기·산반해·다라·자타·구차 등 8국의 대표들과 왜신관 관리가 백제에 갔다.738)≪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5년 11월. 제2차 사비회의에 임하는 가야연맹 집사들의 태도는 적극적이지 않고 형식적이었는데, 이는 백제의 가야 부용화 방안을 대체로 짐작하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백제 성왕은 이 회의에서 세 가지 계책을 제시하였다. 이는 ① 임나 보호를 위하여 왜군사를 요청하는 문제, ② 군령·성주를 내보낼 수 없다는 변명, ③ 길비신·하내직·이나사·마도 등을 本處로 송환하는 문제 등 지금까지 백제가 제시하였던 것들과 같은 취지의 것이지만 기존의 주장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것이었다. 우선 첫번째 계책에서 백제는 임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함안 안라국 동북방의 낙동강변에 6성을 쌓고, 그 곳에 왜의 3,000 병사와 백제군을 함께 주둔케 하되 그 비용은 백제가 부담한다고 하였다. 즉 백제는 그 6성을 왜 및 가야연맹의 협조 아래 경영하고, 그 대외적 명분을 바탕으로 신라군을 공략하여 530년대 후반에 빼앗긴 칠원의 구례산 5성을 회복하며 아울러 탁순로를 다시 장악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백제의 첫번째 계책에 대해서 가야연맹 제국도 그 정도면 타협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의 그 계획에 의하면 신라의 공세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을 것이고, 백제의 가야에 대한 독점적인 성격도 상당히 희석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백제의 두번째 및 세번째 계책에 있었다. 가야인의 눈으로 볼 때 가야지역 일부에 대한 백제의 군령·성주 설치는 강권에 의한 영토 침탈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으며, 이는 앞으로의 장기적인 백제의 침탈방향을 예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길비신 등의 本邑 송환 요구는 안라 중심의 독자세력 추진집단인 안라왜신관을 무력화시킴으로써 가야지역내에 친백제세력을 부식시키는 데 대한 장애요인을 제거하려는 것이었다.

 성왕의 3책 제안에 대하여 가야연맹 집사들은 최종 답변을「일본대신」및 안라왕·가라왕의 3인에게 미루었다. 여기서 가야연맹내에서 최고 의사결정권자로서 안라왕·가라왕의 존재가 확인된다. 다만 여기서「일본대신」은 임나에 있는 왜신관의 대신 즉 的臣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그는 가야지역내에서 안라왕의 권력 및 대표성을 보완해 주는 간판에 지나지 않는다. 가야연맹 집사들이 최종 답변을 그들 3인에게 미룬 것은 백제의 세 가지 계책 제안을 완곡하게 거절한 것이었다. 결국 이로써 가야연맹과 백제 사이의 제2차 사비회의는 결렬되었다. 가야·백제·왜 사이의 논의가 몇 년에 걸쳐 계속되는 중에 각국 사이의 이해관계는 분명히 드러났으며, 그 결과 그들이 합치할 수 없음은 이제 확인된 것이다.

 가야·백제 사이의 제2차 사비회의 결렬 이후 국제정세는 큰 변화가 없어서, 고구려에 대항하여 신라·백제간의 우호가 유지되는 상태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백제는 왜 및 가야에 대한 지속적인 문물 공급 및 인원 파견을 함으로써, 그 댓가로 가야지역에 대한 기존의 세 가지 계책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였던 듯하다. 즉 백제는 聖王 23년(545)부터 25년까지의 사이에 가야연맹 제국의 세력가들에게 선진문물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왜에 방물을 주거나 기술자 또는 학자 등을 연이어 파견하기도 하였다.739)≪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6년 5월·9월, 7년 6월, 8년 4월. 그에 대한 화답으로 왜는 말 70필과 배 10척을 보내 백제와의 교역 선호 의사를 표명하였고, 결국은 성왕 26년 정월에 왜 병사를 보내 줄 것을 약속하였다. 백제의 세 가지 계책 중 하나가 왜와의 동조 아래 이루어지려는 순간이었다.

 이에 대하여 안라국은 불안을 느꼈을 것으로 보인다. 백제장군이 지휘하는 백제·왜연합군이 안라 부근의 6성에 주둔하게 되면, 안라의 자주적 태세의 안정판 역할을 하는 안라왜신관의 인원 구성에 대하여 백제의 압력이 강화되고, 이는 곧 안라국이 백제 부용화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야지역 일부 세력들은 백제의 거듭되는 선진문물 증여에 의하여 차츰 경계심이 이완되다가 결국 친백제적인 태도로 돌아서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안라는 대항체제를 다시 정비할 여유를 얻기 위하여 고구려에게 백제 정벌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 548년 정월에 고구려가 濊兵 6천을 보내 백제의 獨山城 즉 馬津城(예산군 예산읍)을 공격해 왔으며, 백제는 신라에게 구원군을 청할 정도로 어려운 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신라가 백제의 요청을 받아들여 신속하게 장군 朱珍과 군사 3천을 보내 독산성 아래에서 고구려군을 대적하였다.740)≪三國史記≫권 26, 百濟本紀 4, 성왕 26년 정월. 그런데 이 사태는 예상치 못한 방면으로 번져 고구려가 쉽사리 패배하고, 전투에서 잡힌 고구려측 포로가 ‘이 전쟁의 발단이 안라국 및 왜신관이 백제의 처벌을 요청하였기 때문’이라고 증언함으로써 고구려와 안라 사이의 밀통이 발각되었다. 그러한 증거를 잡은 백제가 안라 및 왜신관의 소환을 요청하였지만 그들은 번번이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백제는 가야 외곽지역에 왜군 및 백제군을 배치하는 데 필요한 왜 및 가야연맹의 협조를 확신할 수가 없어서 왜에 병사 파견 중지요청을 내렸다.

 한편 백제가 안라뿐만 아니라「왜신관」의 잘못을 지적하였으므로 왜는 백제의 의심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왜는 자신은 이 사태에 연루되지 않았으므로 의심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그에 대한 무혐의 증명을 위한 형식으로 약간의 사람을 보내 안라가 도망한 空地를 채우겠다고 자청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난 후에는 한술 더 떠서 왜는 이나사·마도가 몰래 고구려에 사신 보낸 것을 따지겠다고 하면서 백제편을 들었다.741)≪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9년 4월.

 백제에 대하여 더 이상 대항할 논리도 계책도 사라진 상태에서 안라의 상층부는 무력화되었다. 이제 성왕이 전에 주장하였던 세 가지 계책은 실행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이후로는 가야연맹의 어느 일국이나 왜가 백제의 의사에 반하여 행동하는 기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즉 백제 성왕은 549년 및 550년 초에 걸쳐서 가야연맹에 대한 부용화를 끝마쳤으며, 왜에 대해서도 선진문물을 매개로 하여 영향력을 미치는 大盟主의 위치에 섰다.

 541년부터 550년까지의 약 10년간에 걸쳐 가야연맹은 안으로는 대가야와 안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패권을 하나로 모으려는 내부 경쟁을 계속해왔으며, 밖으로는 백제·신라·왜·고구려 등의 사이에서 상호간의 경쟁관계를 이용하여 독립세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외교적으로 모색해 왔다. 그러나 백제 성왕이 신라와 외면적인 화친을 유지하면서 선진문물을 이용하여 가야연맹제국 및 왜를 포섭하는 외교전략을 펴나감에 따라 결국 그에 휘말려 가야연맹은 독자적 세력을 수립키 위한 자기 구제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 채 백제의 부용으로 전락하였다. 백제의 부단한 노력으로 백제와 왜의 교역관계가 정상화되자 실질에 기반을 두지 않는 안라의 왜신관은 구실로서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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