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3. 가야의 멸망
  • 3) 가야연맹의 신라 복속

3) 가야연맹의 신라 복속

 늦어도 550년 초까지 가야연맹 제국은 백제에게 半종속상태로 있었다. 또한 같은 시기인 550년 3월에 백제가 빼앗은 고구려의 道薩城(괴산군 도안면)과 고구려가 함락시킨 백제의 金峴城(진천군 진천읍)을 신라가 다시 빼앗아 가졌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신라와 백제간의 갈등 요인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에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내분상황을 포착하고, 공동으로 북진하여 한강유역을 탈취하려고 모색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551년에 백제와 신라는 한강유역 탈환에 나서, 백제는 하류지역을 공략하고 신라는 상류지역을 공략하였다. 이 때 가야는 백제군을 따라 전쟁에 동원되었다. 이 당시 신라 진흥왕은 娘城(청주)에까지 순수해 갔는데, 가야에서 투항한 우륵과 그 제자 尼文을 불러 그 음악을 들었다고 하였다.742)≪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2년 3월.

 우륵은 省熱縣 즉 斯二岐國 출신의 사람으로 대가야의 궁정악사였다. 그러한 인물이 대가야가 멸망하기도 전인 551년 3월에 이미 신라에 투항해 있었다는 것은 대가야의 몰락을 예견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야연맹의 백제 부용화가 확정되자, 그는 자신의 12곡의 존재 의미를 상실하고 신라로 망명한 것이라고 하겠다. 우륵이 지었다는 12곡은 寶伎·師子伎 등을 제외하고는 지명으로 보이는데, 이는 가야연맹에 소속된 여러 소국들에 전하는 특징적인 음악들과 몇 가지의 伎樂이 합쳐진 것으로서 우륵은 이를 琴曲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진흥왕은 이를 신라인에게 전수시켰는데, 이는 가야지역 병합에 대한 그의 관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한강유역 탈환전이 성공한 후 552년의 시기에 가야연맹은 그 패권이 대가야국과 안라국의 둘로 나뉘어 있는 채로 백제에게 종속적으로 연합되어 대외관계면에서 백제와 보조를 같이하고 있었다. 또한 백제는 왜에 불상·경론 등의 문물 전수를 하면서 군병을 요청하였고, 왜는 선진문물이 궁하여 백제의 요청을 승낙할 수밖에 없었다.743)≪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3년 5월·10월, 14년 정월·6월. 백제는 가야연맹의 군대와 아울러 왜의 군대도 계속적으로 동원하는 체제를 모색 중이었다고 보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신라에 대한 공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백제의 遠謀가 실효를 거두기도 전에 신라는 553년 7월에 백제의 한강 하류지역 땅을 기습적으로 빼앗고 新州까지 설치하였다. 이에 대하여 백제는 왜로부터 1천 명의 군병을 받고, 그 직후인 554년 7월에 적어도 3만 명 이상의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조직하여 신라의 管山城 공격에 착수하였다. 이 전쟁의 장소는 관산성 즉 충북 沃川지방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한강 하류유역과 가야지역에 대한 패권을 다투는 일대결전이었다.

 가야연맹 제국은 백제에 의하여 동원되어 이 전쟁에 임하고 있었으나 이들은 자신의 명운을 걸고 싸우기보다는 전황의 대세를 점치는 방관자적인 군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하여 전쟁 초기의 상황은 공격을 개시한 백제측이 유리하여 관산성을 불질러 함락시키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나, 신라의 전선을 깨뜨리고 깊숙이 쳐들어간 왕자 餘昌을 위문하려고 백제 성왕이 찾아가다가 복병에게 시해되자 백제·가야연합군은 단번에 무너져서 크게 패배하였다.744)≪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15년 7월.
≪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15년 12월.

 그런데 백제가 이러한 큰 패배를 당하는 틈을 타서 북방 고구려가 백제 熊川城(공주?)을 침범해 왔으나, 백제는 고구려로부터의 공격을 쉽사리 방어해 냈다. 이로 보아 전쟁의 결과는 백제에게도 타격을 주었으나 그 직접적인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으며, 그에 상응하여 가야측의 피해가 훨씬 컸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므로 관산성을 둘러싼 이 전쟁의 결과 가야연맹은 큰 피해를 입은채 멸망 직전까지 몰리게 된 것이라고 보인다.

 그 후 555년부터 558년에 걸친 일련의 한강유역 경영을 대략 마치고 나서 신라는 가야연맹에 대한 병합에 착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560년경에 안라국이 먼저 신라에 병합된 듯하다. 왜냐하면 안라를 대표로 하는 가야 남부지역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대왜교역의 중심지였는데, 신라가 이 때부터 왜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고, 한편으로「阿羅 波斯山」에 성을 쌓아 왜에 대비하기도 하였으며, 기록에 따라서는 임나가 560년에 멸망하였다는 이설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745)≪日本書紀≫권 19, 欽明天皇 21년 9월 및 22년·23년 정월 細注. 다만 안라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멸망하였는가를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신라의 강압과 회유에 안라가 저항없이 이에 응함으로써 병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상 안라는 기존에 이나사·마도 등에 의한 친신라적 교류도 상당히 있었으므로, 백제로부터 직접적 연관이 모두 끊긴 상태에서는 쉽사리 신라에게 투항할 가능성이 있으리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북부지역은 조금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대가야는 왜나 백제와의 교역보다는 자체의 제철능력이나 안정적인 재지농경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말기에는 백제측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자발적으로 친백제적인 성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신라에 대하여 좀더 독자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듯하다. 대가야가 허물어지지 않는 한 그 주변의 가야연맹 제국도 쉽사리 신라에게 투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로서도 고구려나 백제측의 동정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전쟁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았던 듯하다. 그리하여 신라 진흥왕은 재위 22년(561) 즉 辛巳年 2월 초하루에 상당수의 중앙관료들과 比子伐·漢城·碑利城·甘文의 四方軍主들을 대동하고 창녕지역까지 巡守해 와서 軍勢 시위를 하고 일련의 사면조치도 취하였는데, 이는 가야연맹 제국에 대하여 위협과 유화의 시위를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신라측의 이러한 위협에 대하여 대가야가 어떠한 조치를 취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 즉시로 전쟁을 일으켰다거나 투항하였다는 흔적도 없다. 그러므로 아마도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측의 동향 등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한편으로는 신라측의 압박을 받아 스스로의 투항을 위한 조건을 타진하는 등 여러 가지 눈치를 보는 중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런데 대가야가 어떠한 선제 군사행위를 취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사다함의 5천 기병이 대가야 국도까지 먼저 쳐들어갔다. 신라측 기록에 의하면, 진흥왕이 이사부에게 가라국을「습격」케 하였으며, 가라 사람들은 ‘뜻밖에 신라 군대가 갑자기 쳐들어오므로 너무 놀라서 막을 수가 없었다’고 하였다.746)≪三國史記≫권 44, 列傳 4, 斯多含. 그러므로 대가야는 신라 대군의 기습 공격에 의해 멸망하였던 것이다.

 이를 마지막으로 하여 나머지 대부분의 가야연맹 제국은 대세에 눌려서 거의 일시에 신라에게 항복하고 말았다고 추측된다. 흠명기 23년(562) 춘정월조의 이른바 임나 10국 멸망기사는 멸망 시점이 정확히 표기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이러한 최종 투항사태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562년 9월 가라국 즉 대가야의 멸망을 전후하여 안라국·사이기국·다라국·졸마국·고차국·자타국·산반하국·걸손국·임례국 등의 가야10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전통적으로 왜와의 교역에 전념하지 않는 신라가 관산성전투 이후 백제측의 동향마저 무시하고 무력 병합에 나서자 가야연맹 제국은 자체 저항 외에 다른 수단이 없었으나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金泰植>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