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1. 백제·야마토왜의 접근과 중개외교
  • 2) 대백제관계의 시작

2) 대백제관계의 시작

 잔존하는 문헌 사료상 4세기 가야가 최초로 관계를 맺은 나라는 백제로 되어 있다. 그런데 가야가 364년에 백제와 최초로 관계를 맺기 전까지 백제는 주로 신라를 대상으로 전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753)≪三國史記≫에 의하면 167년부터 283년까지 116년간 양국 사이에는 16차례나 전쟁이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에 반해서 백제와 다른 나라들과의 전쟁기사는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있다. 그러나 4세기 중반 고구려가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던 낙랑(313)과 대방(314)을 멸망시킨 뒤 백제를 직접 공격하기 시작하자75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24년·26년·30년조에는 고구려의 침략기사가 보인다. 백제도 그 공격의 방향을 신라로부터 고구려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755)≪三國史記≫에는 이 때부터 신라와의 전쟁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371년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사건을 계기로 양국간에는 4세기 내내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756)≪三國史記≫에 의하면 371년부터 400년까지 29년동안 양국간에는 전후 14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대외관계에서 백제의 지배층을 규제하고 있던 최대의 과제는 고구려와의 전쟁문제였다고 생각된다.

 백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직접 배후를 이루고 있던 가야나 신라, 그리고 바다 건너의 왜나 중국과의 관계까지도 확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경우 백제가 최우선적으로 타개해야 할 과제는 가야와의 관계였다고 생각된다. 가야는 직접 배후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나 야마토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신라나 야마토왜와 관계를 갖기 위해서도 불가결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가야는 여러 소국가들로 분립되어 있었다. 따라서 백제는 먼저 가야 제국 중에서도 수도 한성에서 통하기 쉽고 신라나 야마토왜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와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그런데≪일본서기≫757)본고에서 사용하는≪日本書紀≫는 1967년판 岩波書店本(日本古典文學大系)이다. 神功紀 46년(366)조에 의하면 그 해에 卓淳을 방문한 야마토왜의 斯摩宿禰(시마스쿠네)에게 卓淳王 末錦旱岐가 갑자년(364)에 백제의 久氐·彌州流·莫古 등 3인이 일본으로 가는 길을 찾아서 왔기에 바다를 건너야만 일본에 갈 수 있다고 했더니 그들은 야마토왜의 사자가 오면 알려달라는 부탁을 하고 돌아갔다고 말해 준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야마토왜의 사마숙례가 종자 爾波移(니하야)와 탁순인 過古 두 사람을 백제에 보냈더니 백제의 近肖古王이 심히 기뻐하면서 오색채견 각 한 필, 뿔화살·철정 40개 등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는 신공 46년에 야마토왜의 사인 사마숙례가 탁순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758)三品彰英,≪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東京;吉川弘文館, 1982), 96쪽에 의해서 신공기의 한국관계 기사는≪日本書紀≫연대보다 120년을 더해야 실제 연대와 일치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신공 46년은≪日本書紀≫의 연대로는 246년이지만 실제 연대로는 366년이 된다. 그런데 이 때 내방한 사마숙례에게 탁순왕 말금한기가 말한 바에 의하면 갑자년 즉 364년 7월에 백제의 사인 구저·미주류·막고 등 3인이 탁순에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지금의 대구에 자리잡고 있어서 백제의 수도 한성에서 가깝고 신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낙동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어서, 낙동강을 이용해서 야마토왜와도 쉽게 통할 수 있는 탁순759)鮎貝房之進,<日本書紀朝鮮地名攷>(≪雜攷≫7 上, 143∼151쪽·7 下, 72∼102쪽)는 음의 유사성을 들어 탁순을「達句火」(대구)로 비정한 데 대해서 김태식, 앞의 책, 188∼198쪽은 고고학적 유물의 분포와≪日本書紀≫에 보이는 卓淳 중심의 세력관계를 근거로 탁순을「昌原」에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일본서기≫에 보이는 지명의 고증은 먼저≪일본서기≫에 보이는 중요기사에 대한 사료비판이 이루어진 뒤에 그를 근거로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생각되는데, 탁순 중심의 세력관계 고찰은 그 이용 사료에 문제점이 있고(金鉉球,<‘任那日本府’ 연구의 현황과 문제점>,≪韓國史 市民講座≫11, 一潮閣, 1992), 그 세력관계에도 어긋나는 면이 있으므로(白承玉,<4∼6세기 比斯伐加耶의 性格과 그 推移>, 釜山大 碩士學位論文, 1991, 35∼36쪽), 여기서는 아직 음의 유사성을 근거로 한 대구설을 대체할 설이 없다는 생각에서 대구설을 취하기로 한다.에 백제가 최초로 사자를 파견한 것은 364년이 되는 셈이다.

 그런데≪일본서기≫신공기 49년(369)조760)神功紀 49년조에 대한 자세한 분석은 金鉉球,≪任那日本府硏究≫(一潮閣, 1993), 30∼42쪽 참조.에 의하면 그 해 백제장군 木羅斤資가 탁순을 근거로 해서 比自㶱·南加羅·喙國·安羅·多羅·卓淳·加羅 등 소위 加羅 7국을 평정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369년 백제는 가야 7국 평정에 즈음하여 탁순으로부터 그 전진기지를 제공받은 셈이 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백제가 탁순으로부터 가야 7국 평정기지를 제공받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탁순으로부터 허락을 얻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백제가 가야 7국 평정 전에 탁순과 접촉하였음을 보여 주는 유일한 기록이 갑자년(364)에 백제의 사자인 구저 등이 내방했다는 탁순왕 말금한기의 말이다. 따라서 갑자년에 백제의 사인 구저 등이 탁순에 왔었다는 탁순왕 말금한기의 말은 사실로서 인정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단≪일본서기≫신공기 46년조에는 백제사 구저 등의 갑자년 탁순 내방의 목적이 탁순 방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가는 길을 찾기 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왜와 중국과는 그 때까지 이미 400년 이상 교통이 있었는데761)≪後漢書≫권 85, 列傳 75, 東夷 倭 및≪三國志≫권 30, 魏書 30, 倭傳 등에 의하면 이미 기원전부터 倭가 중국과 교통하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중간에 위치하고 있던 백제가 일본에 가는데 배를 이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백제사 구저 등의 탁순 내방 목적이 일본에 가는 길을 찾기 위한 데 있다는 내용은≪일본서기≫ 편자의 작문으로 진짜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고 생각된다.

 갑자년 구저 등의 탁순 내방이 369년 탁순을 근거지로 한 가야 7국 평정 이전의 백제와 탁순과의 유일한 접촉이었던 것으로 보아 갑자년 구저 등의 내방이 가야 7국 평정시 백제가 탁순을 그 기지로 사용하게 된 바탕이 되었음은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의 내방은 탁순이 가야 7국 평정기지를 제공하게 되는 369년보다 5년이나 앞선 것으로 보아 그 직접적인 목적이 369년의 가야 7국 평정기지를 제공받는 데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갑자년 백제사 구저 등의 탁순 내방 2년 후에 해당되는 近肖古王 21년(366)에 백제가 탁순을 매개로 해서 야마토왜와 첫 교섭을 갖게 되는 것이다.762)金鉉球, 앞의 글, 124쪽 참조. 그리고 야마토왜와 통교한 같은 해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서 신라와도 교빙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763)≪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21년. 이 때에도 지리적 관계로 보아 백제사의 신라 방문은 탁순을 경유하는 통로가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결국 갑자년 백제사 구저 등의 탁순 내방 2년 후에 백제는 탁순을 경유해서 신라·야마토왜와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따라서 갑자년 백제사 구저 등의 탁순 내방은 탁순으로부터 가야 7국 평정기지를 제공받는 등의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지만 신라나 야마토왜와의 통로를 확보하는 데도 그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백제가 갑자년에 탁순과 관계를 맺고 그 탁순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근초고왕 21년에는 야마토왜·신라와도 관계를 맺은 것은 근초고왕 24년 과 26년의 대고구려전을 앞두고 후방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그것은 백제가 근초고왕 27년에는 중국에도 눈을 돌려 동진에까지 사신을 파견함으로써764)≪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 27년. 고구려와의 전쟁을 전후해서 당시 고구려를 제외한 모든 주변국가들과 관계를 맺은 사실로도 입증된다.

 한편 갑자년(364) 백제사 구저 등의 내방을 탁순이 적극적으로 수용하고765)탁순이 구저 등의 내방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음은 그 뒤 백제가 탁순을 매개로 신라·야마토왜와 관계를 맺고 가야지역에 진출하는데 탁순이 적극 협력한 사실로도 추측된다. 그 2년 뒤에는 백제가 탁순을 경유해서 신라·야마토왜와의 교류까지도 허용한 것은 백제의 목적이 탁순의 국제적 이해관계에 배치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탁순으로서는 남쪽과 동쪽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금관가야와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백제와 관계를 맺는 것은 이전부터 노리던 바였다. 탁순으로서는 백제가 탁순을 경우해서 신라와 교빙하는 것이 동쪽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신라를 견제하는 데 있어서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고 생각되며 백제가 탁순을 매개로 야마토왜와 관계를 갖게 하는 것도 남쪽의 금관가야를 견제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탁순으로서는 갑자년 백제의 접근과 탁순을 통한 2년 후의 신라·야마토왜와의 교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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