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1. 백제·야마토왜의 접근과 중개외교
  • 3) 대야마토왜관계의 시작

3) 대야마토왜관계의 시작

 가야지역 특히 금관가야의 전신인 狗那韓國은 이미 기원전부터 왜의 대중국교섭의 중간 기착지로서 역할을 한 것이≪三國志≫위서 왜인전 등에 의해서 확인되는데, 이는 가야가 일찍부터 왜와 활발한 관계를 가져왔음을 시사한다. 북구주의 죠몽(繩文) 전기의 櫛木文土器, 죠몽 중기 후반의 稻作文化, 야요이(彌生)시대의 도작인의 이주, 청동기·철기 등의 전파가 한반도, 특히 가야지역의 영향하에 이루어진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766)大塚初重,<考古學から見た伽耶と倭>(≪伽倻와 東아시아≫, 주 1) 참조. 이와 같은 사실은≪삼국지≫한조의 “나라에 철이 나서 韓·濊·倭가 모두 이를 얻어간다”는 내용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리고 김해 池內洞 옹관묘에 부장된 袋狀口緣土器, 김해 부원동 패총에서 나온 二段口緣形土器,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簡形銅器·巴形銅器·長方鐘車形石製器 등도 김해지역과 왜와의 교류를 잘 보여 주고 있다.767)金泰植, 앞의 책, 36쪽 참조.

 그런데 양 지역에 소국가가 분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이와 같은 교류는 4세기에 들어서면서 중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일본열도에서는 아직 지방세력이 잔존하기는 하지만 야마토왜가 우위를 확립한 후 서일본까지도 그 세력하에 편입시킴으로써 일본열도내에 있어서 가야의 주 교섭대상으로서 등장하기 시작한다.768)申敬澈,<最近 加耶地域의 考古學的 成果>(≪ 加耶史硏究의 成果와 展望≫,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국제학술회의, 1992)에서 4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야의 주 대상이 북구주에서 야마토 및 畿內로 전환하였다는 견해는 이런 사실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가야지역에서도 구나한국이 금관가야로, 다시 말하면 삼한 소국단계에서 가야로 전환되는데 이 과정에서 김해지역을 중심으로 국가간의 통합이 가속화되고 금관가야가 그 중심적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가야지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위에 전대부터 왜의 대중국교섭의 중간 기착지로서의 역활을 해왔던 구나한국을 계승한 만큼 금관가야가 야마토왜의 한반도에 있어서의 주 교섭대상으로 등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769)申敬澈은 위의 글에서 김해 대성동고분 발굴 유물중 倭와 관련된 것으로서 簡形銅器·巴形銅器·碧玉製紡錘車形石製品 등을 제시하여 4세기의 김해지역과 왜와의 교류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4세기에 들어서면서 양 지역에서 통합이 가속되어감에 따라 필연적으로 지금까지의 산발적인 교류는 점차 정치적인 관계로 전환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금관가야를 위시한 가야 제국이 언제부터 야마토왜와 정치적인 목적의 교섭을 갖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시사적인 내용이<광개토왕릉비>에 보인다. 이 비문에 의하면 400년과 404년에 왜가 한반도에 침입하여 고구려와 싸운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지리적으로 보아 야마토왜가 고구려와 싸우기 위해서는 가야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400년 싸움에서 고구려군이 야마토왜를 추격하여 고령의 임나가야에770)<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임나가야가 고령가야인 것은, 당시 백제가 가야지역을 그 세력하에 두고 있으면서 왜를 동원한 것으로 생각되므로, 왜가 고구려와 싸우기 위해서 이용한 기지인 임나가야는 백제가 제공한 것으로 생각되고, 이 임나가야는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로서 당연히 가야의 북반부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데서 추측한 것이다. 또 당시 백제가 고령가야에 상비군을 두고 있었고, 백제가 왜를 대고구려전에 끌어들여 그 기지를 제공할 만큼 고구려와 가까운 지역으로서 왜와 백제군의 합동작전이 가능했던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고령가야라는 사실에서도 임나가야는 고령가야라고 생각된다(金鉉球, 앞의 책, 101쪽). 서보경,<「任那」의 지명비정에 대한 一考察>(高麗大 敎育大學院 碩士學位論文, 1993년)에도<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임나가야가 고령가야임이 잘 증명되어 있다. 이른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야마토왜가 대고구려전에서 고령가야를 그 전진기지로 이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고령가야가 야마토왜에게 400년과 404년에 대고구려전의 전진기지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령가야가 400년과 404년 싸움에서 야마토왜에게 전진기지를 제공하였다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야마토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고령가야의 남쪽에 있던 금관가야는 고령가야보다도 이전에 이미 야마토왜와 공식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던 셈이 된다. 따라서 가야가 야마토왜와 관계를 맺은 상한선이 언제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앞에서 제시한 신공기 46년조에 의하면 야마토왜의 사자가 탁순을 매개로 해서 366년에 백제를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다.771)金鉉球, 앞의 책, 24쪽 참조. 그런데 366년에 야마토왜의 사자가 백제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보아 탁순을 거쳐야 하는만큼 당시 야마토왜의 사자가 백제에 간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그가 백제에 가기 전에 탁순에 들렀다는 내용도 사실이라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탁순과 야마토왜와의 첫 접촉은 366년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신공기 46년조에는 야마토왜의 사자인 사마숙례가 366년 왜 탁순에 왔는지 그 이유가 전혀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탁순에 온 야마토왜의 사자가 결과적으로 탁순의 중개로 백제에 갔다. 이것은 야마토왜의 사자가 탁순에 온 목적 중의 하나가 탁순을 경유해서 백제로 가는 데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야마토왜의 사자가 백제에 간 목적은 백제의 근초고왕이 재위 21년(366) 백제를 방문한 사마숙례의 종자인 이파이에게 준 품목 중에 철정 40개가 들어 있던 것으로 보아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수요가 증대하고 있던 철 등의 선진문물을 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772)철정은 당시 고대국가로 성장하고 있던 야마토왜가 정복전쟁의 수행을 위해서 가장 필요로 했던 선진문물이었다(森浩一,<古墳鐵鋌について>,≪古代學硏究≫, 1960). 그런데 백제에서 당시에 양질의 철이 생산되고 있었음은 신공기 52년조의 “신의 나라 서쪽에 강이 있습니다. 水原은 谷那의 鐵山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 이 산의 철을 취해서 길이 성조에 바치겠습니다”라고 백제가 七支刀를 일본에 보내면서 한 말로도 알 수 있다. 따라서 5세기 단계까지도 스스로 철을 생산할 수 없었는 데도 불구하고(大塚初重, 앞의 글) 4세기에서 5세기에 걸친 일본의 應神陵部塚アリ古墳, 奈良縣 高塚古墳 등에 부장되어 있는 대량의 鐵鋌(大塚初重, 위의 글 및 三品彰英, 위의 책, 103쪽)은 한반도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야마토왜의 사자인 사마숙례가 탁순에 온 목적이 백제에 가기 위한 통로의 확보에만 있었다면 백제와는 보다 편리한 해상통로가 있었던 만큼 해상통로를 이용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야마토왜의 사자 사마숙례의 탁순 내방은 백제에 가기 위한 통로의 확보뿐만 아니라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야마토왜의 사자 사마숙례의 탁순 내방의 다른 목적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당시 야마토왜의 동아시아 속에서의 위치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가야성립 이전부터 왜가 중국과 한반도 남부에서 선진문물을 구해 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삼국지≫위서 왜전 이래의 기록들이나 일본에서 ‘景初 3년(239)’의 연호 등이 새겨져 있는 三角緣神獸鏡이 300개 이상 출토된 사실로서773)近藤喬一,<三角緣神獸鏡の硏究史>(≪三角緣神獸鏡≫, 東京大出版會, 1988). 왜가 일찍부터 중국으로부터 선진문물을 구입해 갔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그리고 북구주에 야요이 시대의 벼농사, 청동기와 철기 등의 존재는 야마토왜가 한반도 남부에서도 선진문물을 구해 갔음을 잘 보여 준다.774)大塚初重, 앞의 글.

 그런데 야마토왜가 본격적으로 고대국가로 발전하던 시기에는 중요한 선진문물 도입처의 하나였던 중국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것이다. 야마토왜는 265년의 견사를 끝으로 413년에 국교를 재개할 때까지 150여 년간 중국과의 국교가 중단되어 있었다.775)栗原朋信,<上代の對外關係>(≪對外關係史≫, 東京;山川出版社, 1978). 이는 야마또왜와 중국과의 관계를 중개하고 있었던 낙랑·대방군의 몰락과 그들을 멸망시킨 고구려의 방해가 주원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776)≪宋書≫권 97, 列傳 57, 倭國전에는 야마토왜가 중국에 통하는데 고구려의 방해를 받고 있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야마토왜는 고대국가로 발전되어 감에 따라서 선진문물에 대한 수요는 증대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야마또왜는 구나한국이나 그 후신인 금관가야에서만의 도입으로는 증대되는 선진문물에 대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야마토왜로서는 선진문물의 수입처를 금관가야 이외의 한반도 내륙지역으로 확대해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야마토왜가 4세기 이후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선진문물의 수입처를 한반도 내륙지역으로 확대하였다는 사실은 大阪府 陶邑의 TK3號窯 등의 초기 須惠器의 조형이 합천·고령의 도질토기이고,777)大塚初重, 앞의 글. 북구주의 朝倉窯址 土器의 원류지가 백제와 가까운 가야지역이며,778)崔柄鉉,<考古學的으로 본 加羅와 日本과의 관계>(≪韓國史 市民講座≫11, 1992). 백제지역에서 직접 또는 백제에서 가야지역을 거쳐서 들어간 마구가 일본열도에 등장하는 마구의 원류가 되었던 사실779)崔秉鉉, 위의 글. 등에 의해서도 잘 입증된다. 그리고 4∼5세기 고분의 부장품에 갑자기 철정 및 철기류가 급증하는 현상도780)大塚初重, 앞의 글.
三品彰英, 앞의 책, 103쪽.
금관가야에서만의 도입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

 야마토왜에서는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오면 탁순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백제가 근초고왕 21년(366) 신라 및 야마토왜와 관계를 맺을 때 탁순을 경유한 점이나 같은 왕 24년 가야 7국 등 한반도 남부지역을 정벌할 때도 탁순을 그 집결지로 이용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탁순은 한반도 남부 제지역에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야마토왜로서는 당시 선진문물을 도입해야 할 백제를 비롯한 한반도 내륙의 제지역과 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탁순과 관계를 가져야만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366년 야마토왜의 사자 사마숙례가 탁순을 방문한 것은 중국으로 가는 통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급증하는 선진문물을 구하기 위한 내륙통로의 확보에 그 중요한 목적의 하나가 있었음에 틀림없다.781)田中俊明,≪大加羅聯盟の興亡と任那≫(東京 ; 吉川弘文館, 1992), 219쪽의 ‘일본에 있는 가야계 문물의 압도적 양에 비해서 가야에는 이것밖에는 없는가 하고 생각될 정도로 아주 미미한 정도밖에는 일본계 유물이 없다’는 지적도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한편 야마토왜의 사자가 366년에 탁순에 왔다는 것은 야마토왜가 탁순의 남쪽에 자리잡고 있던 금관가야와는 그 이전에 이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야마토왜의 금관가야 접근이 선진문물의 수용에 있었음은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에 의해서도 충분히 입증된다. 이에 반해서 금관가야가 366년 야마토왜의 사자 사마숙례의 탁순방문에 협력한 의도는 분명치 않다.

 그런데 한일의 어떠한 사료에도 당시 신라와 야마토왜는 일관되게 적대관계로 서술되어 있다.782)≪三國史記≫나≪日本書紀≫등 고대한일의 양국 사서에 신라와 왜와의 관계가 대부분 적대관계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금관가야에게 최대의 위협적인 존재는 신라였을 것이다. 따라서 금관가야가 366년 야마토왜의 사인 사마숙례의 탁순방문에 협력한 것은 야마토왜가 백제와 관계를 갖는 것이 신라를 견제하는 데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것은 야마토왜의 신라공격이 신라의 세력확대에 위기감을 느낀 금관가야의 요청일 가능성이 크다는 연구결과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783)田中俊明, 앞의 책, 215쪽.

 한편 남쪽으로부터 금관가야의 압력에 직면해 있던 탁순으로서는 야마토왜에게 선진문물을 얻기 위한 내륙통로를 제공하는 것이 야마토왜에 대한 영향력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으로 금관가야를 견제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당시 탁순으로서는 금관가야 못지 않게 위협적인 존재가 그 동쪽에 있던 신라였는데, 야마토왜는 언제나 신라와는 적대관계였으므로 야마토왜를 백제와 연결시켜 주는 것이 신라를 견제하는 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을 것이다.784)田中俊明(위의 책, 215쪽)은 야마토왜가 신라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것은 선진문물을 도입하던 금관가야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여기에 탁순이 야마토왜에게 내륙통로를 제공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366년 탁순이 야마토왜와 백제와의 관계에서 중개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백제와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야마토왜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탁순이 금관가야를 대신해서 가야제국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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