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1. 백제·야마토왜의 접근과 중개외교
  • 4) 대백제관계의 진전

4) 대백제관계의 진전

 탁순이 야마토왜의 사자를 백제에 안내한 것은 백제의 요구를 적극 수용한 셈이다. 그런데 백제가 탁순이나 야마토왜와의 관계를 추구한 의도는 대고구려전에 있어서의 배후세력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364년에 맺은 탁순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신라·야마토왜와도 관계를 맺음으로써 일단 배후를 안정시켰다고는 하지만 고구려와의 대결이 눈앞에 다가올수록 백제는 배후의 안정을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경우에는 직접 배후를 이루고 있는 가야 제국과의 관계가 그 핵심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탁순 이외의 가야 제국과의 관계는 이미 관계가 성립된 탁순이 그 발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백제가 탁순을 발판으로 가야 제국과의 관계를 확대해 나가는 내용이≪일본서기≫신공기 49년(369)조에 보인다. 그 중요한 내용은 369년에 백제가 한반도 남쪽의 옛 마한 지역의 정벌에 나서서 목라근자가 이끄는 일군은 탁순에 집결한 다음에 비자벌·남가야·탁국·안라·다라·탁순·가라 등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 서남쪽의 古奚津(현 강진)으로 향하고, 근초고왕 부자는 한성에서 막바로 고해진으로 직행하여 합류했더니 그 사이에 있던 옛 마한 세력이 투항해 왔다는 것이다.785)이 기사에 대한 분석은 金鉉球, 앞의 책, 30∼42쪽 참조.

 신공기 49년조의 백제가 근초고왕 때에 가야 7국과 상하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은 欽明紀 2년(541) 4월조 등에서 찾아지는 근초고왕 때에 백제가 가야 제국과「부자관계」를 맺었다는 내용과도 일치한다.786)≪日本書紀≫권 19, 欽明紀 2년 4월·2년 7월·5년 11월조 등에는 백제와 가야제국이 근초고왕 때에 부자관계를 맺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것은 역사적 사실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백제가 가야 7국을 평정했다는 369년부터 13년 후에 해당되는 신공 62년에 이번에는 신라의 침입을 받은 고령가야의 구원요청에 응해서 백제가 군을 파견하여 가야를 구원해 주는 사건이 발생한다.787)金鉉球, 앞의 책, 50∼54쪽.

 이 때 가야 구원군이 백제에서부터 출병하였다는 것으로 보아서 382년 단계에서는 아직 백제군이 가야에 상주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백제가 가야 7국을 평정하였다는 369년 단계에서는 백제가 한반도 남부의 정토과정에서 가야 제국과「부자관계」라는 형식적인 상하관계를 맺기는 하였지만, 이 관계는 상호선린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정도가 아니었는가 생각된다.788)비사벌가야만의 예이기는 하지만, 비사벌가야가 4세기 중엽 이후 백제에 부용적 입장이면서도 자체 발전을 하고 있었음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정밀한 연구로서 백승옥, 앞의 글이 주목된다. 백제와 가야 제국과의 관계가 형식적인 상하관계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은 백제의 가야 7국 평정작전의 최종목표가 가야 7국 평정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한반도 서남부의 옛 마한 세력의 정토에 있었던 점으로도 뒷받침된다.

 한편 탁순은 왜 백제에게 가야 7국 평정기지를 제공하고 백제와 상하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형식적인 상하관계라고는 하지만 탁순이 백제군으로 하여금 그 영토를 통과하게 하고 또 백제와 상하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남과 동으로부터 금관가야와 신라의 압력을 동시에 받고 있었던 탁순으로서는 금관가야나 신라를 직접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보호자를 얻은 셈이 된다. 그리고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가야 제국을 대표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탁순이 백제에게 가야 7국 평정기지를 제공하고 상하관계를 맺은 것은 그 때까지 백제와의 단순관계를 바탕으로 한 금관가야나 신라에 대한 간접견제 대신에 직접견제를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가야 제국내에서의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366년이래 금관가야를 대신해서 야마토왜와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 왔던 탁순이 백제와의 관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함으로써 가야 제국의 대외관계에서 중심적 역할을 하기 시작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백제나 야마토왜와의 관계에 있어서 탁순의 주도적인 역할이라고 하는 것은 탁순의 주체적인 역량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당시의 국제정세에 따른 것으로 결국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서는 바뀔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 탁순이 중심이 된 4세기 후반 가야의 대외관계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金鉉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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