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2. 대백제관계의 심화와 부용외교
  • 3) 백제군의 주둔

3) 백제군의 주둔

 언제부터인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일본서기≫應神紀 25년(474)조에는 가야가 백제의 영향하에 들어가 있었음을 보여 주는 기사가 보인다. 그 중요한 내용은 목라근자가 신라를 쳤을 때 신라의 부인을 취해서 얻은 木滿致가 부 목라근자의 공로를 배경으로 가야의 국정을 마음대로 했다는 것이다.791)이 기사에 대한 분석은 金鉉球,≪任那日本府硏究≫(一潮閣, 1993), 55∼61쪽 참조. 결국 이 기사는 목라근자가 369년 가야 7국 평정, 그리고 382년의 가야 구원을 바탕으로 그 후에도 계속 가야지역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결과 아들인 목만치도 부 목라근자의 세력을 바탕으로 가야의 국정을 마음대로 전단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382년의 가야 구원 후에도 목라근자와 그 아들 목만치가 가야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백제가 그들의 행위를 뒷받침할 수 있는 힘을 가야지역에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382년 가야 구원 후의 어느 시기부터인가 백제세력이 직접적으로 가야지역에 작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야의 요청으로 백제군이 가야에 들어와서 상주하게 되었다는 기록이≪新撰姓氏錄≫吉田連조에 있다. 그 내용은 가야가 三己汶을 놓고 신라와 분쟁이 끊이지 않기 때문에 삼기문을 야마토왜에게 바치므로 吉大尙의 8대조인 塩乘津이 야마토 조정의 명을 받아 삼기문에 진주하여 그 곳을 진수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의 요청으로 삼기문에 들어가서 군을 상주시킨 것은 야마토왜가 아니고 백제이며, 그 주체가 백제에서 야마토왜로 바뀐 것은 삼기문에 진주한 염승진의 8대손인 길대상이 백제가 멸망한 뒤(663) 일본에 망명하여 왜인을 칭함으로써 그 조상도 백제인에서 야마토왜인으로 되어버린 결과인 것이다.792)金鉉球, 위의 책, 118∼120쪽 참조. 다시 말하면≪신찬성씨록≫의 기사는 가야가 신라와의 분쟁지역에 야마토왜의 세력을 끌어들인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백제군을 끌어들인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에 백제군이 가야의 요청으로 삼기문에 들어가 상주하기 시작한 시기가 문제인데 그 시기는 목라근자가 369년 가야 7국을 평정하고 382년에는 가야를 구원했으며, 그 결과 5세기에 들어가서는 그 아들인 목만치가 가야의 국정을 마음대로 전단한 것으로 보아서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가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일본서기≫顯宗紀 3년(487) 是歲조에는 백제군이 가야에 상주 정착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기사가 보인다. 그 중요한 내용은 가야에 주둔하고 있던 야마토왜의 紀生磐宿禰(기노오히하노스쿠네)가 고구려와 교통하면서 삼한의 왕이 되기 위해서 가야에 있던 백제의 適莫爾解를 죽이고 백제에 대항하므로 백제가 古爾解 등을 보내어 그를 격파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야마토정권의 기생반숙례가 가야를 근거로 현지에서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일본서기≫흠명기 5년(544) 2월조에도 뒷받침되는 내용이 보여793)李鎔賢,<6世紀 前半頃 伽耶의 滅亡過程>(高麗大 碩士學位論文, 1988). 그 사실성이 입증되고 있는데 기생반숙례가 반란에 즈음해서 먼저 백제와 가야 사이에 대산성을 쌓아 백제의 동도를 차단하여 임나 주둔 백제군을 기근에 빠뜨린 것으로 보아 백제군이 대산성 동쪽의 가야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 난을 진압한 것이 백제이고, 역사적으로 당시 가야에 군을 주둔시킬 수 있는 관계에 있는 나라는 백제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 난은 야마토왜의 가야 주둔군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백제의 가야 주둔군이 일으킨 반란이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면 이 난을 일으킨 기생반숙례는 백제의 가야 주둔군 장군이 야마토왜의 장군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백제군이 가야에 주둔하고 있었고 그 주둔 책임자가 현지에서 왕이 되기 위해서 반란을 시도했다는 것은 적어도 487년 단계에서는 이미 백제군이 가야에 장기적으로 상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경우에 백제군이 가야에 들어와서 주둔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가야의 요청으로 백제군이 삼기문에 들어가서 상주하기 시작하는 4세기 말 내지는 5세기 초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백제군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4세기 후반에서 5세기에 걸친 군사적 협력794)382년 백제의 가야구원과<광개토왕릉비>에 보이는 5세기 백제의 대고구려전에 대한 가야의 협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과 목만치의 가야국정에 대한 전단이 가능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편 형식적이라고는 하지만 369년 백제와 상하관계까지 맺은 만큼, 내외의 압력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가야 제국의 백제에 대한 의존은 심화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382년 신라의 침입을 받은 고령가야가 백제에 구원을 요청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와의 대립이 본격화됨에 따라서 마침내 군의 상주까지도 요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세기에 들어가면서 백제군이 상주하기 시작함에 따라서 369년 이래의 형식적인 상하관계는 실질적인 상하관계로 전환되고 목만치의 국정참여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479년에는 가야가 중국에 조공하여 輔國將軍本國王이라는 작위를 받아 대내외적으로 그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795)≪南齊書≫권 58, 列傳 39, 東南夷 加羅國條에는 479년에 加羅王 荷知가 南齊에 사자를 보내어 輔國將軍本國王에 배수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481년에는 백제와 함께 신라의 구원요청에 응하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국력과 자주성을 짐작할 수 있다.796)≪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소지왕 3년 3월조에는 가야와 백제가 고구려의 신라침입을 구원하는 기사가 보인다. 이와 같은 사실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고구려에 의한 475년 한성의 함락과 임나경영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목씨의 중심 인물인 목만치가 한성의 함락에 즈음해서 야마토왜에 구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그대로 정착함에797)임나경영에 관여하던 목만치가 군원을 요청하러 갔다가 그대로 일본에 정착하는 과정은 金鉉球, 앞의 책, 54∼61쪽 참조. 따라서 생긴 힘의 공백이 하나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487년의 가야주둔 백제군이 본국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가야에 대한 백제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479년의 중국조공은 백제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가야의 사신이 중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길을 택하던 백제의 영토나 해안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798)당시 대가야 사신의 入中루트는 李文基,<大伽耶의 대외관계>(≪伽耶史硏究≫, 慶尙北道, 1995)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487년의 가야주둔 백제군의 반란사건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에도 가야에 백제군이 상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5세기 후반 가야가 취한 일련의 조처도 백제의 의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가야가 취한 중국에 대한 조공이나 신라지원은 고구려와의 힘겨운 싸움으로 배후의 가야뿐만 아니라 신라나 중국과도 관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에 놓여 있던 백제의 정책에 잘 합치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가야의 자주적인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움직임도 독자적이라기 보다는 백제가 북방문제에서 파생된 남방의 힘의 공백을 가야와의 강화로 메우려 한 배려였다고 생각된다.799)이런 점에서 497년 남제에 대한 조공이나 481년의 가라구원군 파견을 대가야의 독자적인 대외관계(李文基, 위의 글)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金鉉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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