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3. 백제·신라의 각축과 분열외교
  • 1) 신라의 진출

1) 신라의 진출

 한국측 자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라의 가야진출은 일찍부터 시도되었다. 4세기 말에는 신라가 고령가야에 진출하려다가 백제의 저지로 실패한 사실이 있고, 5세기 초에 가야가 백제군의 진주를 요청한 것도 신라의 압력을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5세기 후반에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백제의 가야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됨에 따라서 6세기 초에 伴跛 등이 세력확대를 시도하자 위기의식을 느낀 백제가 도리어 가야지역에 대한 직접지배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제의 반파 등에 대한 직접지배의 시도는 당연히 그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던 신라를 자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당시 백제의 가야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약화된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6세기에 들어서면서 신라의 가야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의 법흥왕이 재위 9년(522)에는 가야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고 11년에는 남경에 출진하여 가야왕과 회합을 갖는다. 그리고 법흥왕 19년에는 드디어 남부가야의 대표적인 존재였던 금관가야를 통합하였다.800)≪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9년·11년·19년. 그런데≪일본서기≫흠명기 2년(541) 4월조 등에는 탁순이나 탁기탄 등의 멸망 사실이 언제나 금관가야의 멸망과 함께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도 금관가야가 신라에 통합된 532년을 전후한 시기에 신라에 통합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신라의 탁순·탁기탄·금관가야 등에 대한 통합은 평화적인 방법에 의존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흠명기 2년 4월조에 보이는 백제 성왕의 이야기에 의하면 탁기탄은 신라와의 국경선에 있었기 때문에 해마다 침공을 받아서, 남가야는 땅이 협소하여 졸지에 방비할 수 없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그리고 탁순은 상하가 분열되어 있고 군주가 신라에 내응해서 멸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흠명기 5년 3월조에는 성왕의 말로써 탁기탄도 그 한기가 가야국에 다른 마음이 있어서 신라에 내응하여 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삼국사기≫에 의하면 남가야도 신라와의 합의에 의해서 통합된 것으로 되어 있다.801)≪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법흥왕 19년. 결국 신라의 탁순·탁기탄·금관가야 등에 대한 통합은 전부 평화적인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신라는 가야지역에 대해서는 백제와 각축을 벌이고 있었지만 북방에서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해서 백제와의 공수동맹으로 대항하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지역에서 백제와 직접 충돌을 일으키는 것은 북방의 대고구려전에 파탄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므로 신라로서는 백제와의 충돌을 피하면서 가야지역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평화적인 방법을 취할 수밖에는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신라가 금관가야 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가야의 지배층이 신라에 내응하거나 신라와의 통합에 적극 응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백제의 가야지역에 대한 군의 상주나 직접지배의 시도는 이미 백제의 세력하에 있던 지역은 별개로 치더라도 여타지역으로서는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탁순과 탁기탄의 지배층이 지금까지의 백제 영향력에서 벗어나 친백제파와 친신라파로 분열되고 남가야가 신라에 접근한 데는 여기에 그 이유가 있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그러나 비교적 백제의 영향이 덜 미치고 신라가 통합한 금관가야 등과 이웃하고 있던 안라가야 등은 금관가야 등의 대신라 접근과 그들에 대한 신라의 통합에 대해서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 경우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백제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로서는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세력강화나 531년 안라가야에 대한 군의 진주까지도 용인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남서부의 안라가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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