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3. 백제·신라의 각축과 분열외교
  • 3) 가야의 멸망

3) 가야의 멸망

 ≪일본서기≫의 관계 기사에 의하면 흠명 2년(541)경부터 안라가야 등이 백제에 대하여 군령·성주 등 백제가 가야지역에 배치한 지방장관과 일계 백제관료들의 철수를 요구하기 시작하여 백제와 가야 제국간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있다. 그런데 안라가야 등이 백제가 가야지역에 배치한 일계 백제관료나 군령·성주 등의 본국송환을 주장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백제가 배치한 일계 백제관료나 군령·성주 등 지방장관들이 남가야 등의 부흥에는 힘쓰지 않고 오히려 신라와의 친선만을 추구한다는 것이다.808)≪日本書紀≫권 19, 欽明紀 5년 3월.

 그런데 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고구려가 평양으로 서울을 옮기고 본격적으로 남하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백제와 신라는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서 나제동맹을 맺게 된다.809)盧重國,<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 변화에 대한 一考察>(≪東方學志≫28, 1981). 이런 때에 신라가 가야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고 백제도 가야지역에 대한 직접지배를 시도함으로써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주된 공격의 대상은 신라보다는 백제였으므로 백제로서는 가능한 한 대고구려관계에서 협력관계에 있던 신라와 가야지역에서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있었다.

 따라서 백제가 가야지역에 파견한 일계 백제관료나 지방장관들도 신라가 통합한 남부가야 등을 적극적으로 회복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이상 신라의 세력이 확대되지 못하도록 가야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면서 신라와의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 있었다. 백제가 지방장관을 배치하여 가야에 대한 직접지배를 시도하는 한편 가야와 신라 사이에 백제군이 아니고 제3국의 군대인 일본으로부터의 용병을 배치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가 금관가야 등의 회복보다는 신라와의 현상유지에만 힘을 쓰는 것은 가야 제국의 입장에서는 가야지역에 대한 백제의 세력확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좌시할 수 없는 일이다.

 541년경부터 가야가 일계 백제관료와 백제가 배치한 지방장관의 철수를 요구한 데 대해서 백제측이 대안으로서 소위 3책이라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810)≪日本書紀≫권 19, 欽明紀 5년 11월. 그 내용은 고구려와 신라의 가야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 군령·성주 등의 지방장관은 그대로 두고, 吉備臣(기비노오미)·河內直(카와치노아타히) 등 일계 백제관료는 본국으로 송환시키며, 탁순 등의 부흥을 위해서 안라가야와 신라의 사이에 6성을 쌓은 다음 야마토왜에서 빌린 군대와 백제군을 배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삼국사기≫에 의하면 554년의 관산성전투에서 가야가 백제와 함께 신라와 싸운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541년경부터 가야지역에 대한 직접지배의 시도 문제를 둘러싸고 가야 제국과 백제 사이에 알력이 있기는 했지만 소위 3책을 바탕으로 타협이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위협하에 놓인 가야 제국으로서는 백제에 대한 의존을 심화시킬 수밖에는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종국적으로 가야 제국은 백제와 그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54년 관산성전투에서 가야와 백제의 연합군이 신라에게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562년 대가야의 멸망에 즈음해서 백제가 가야지역에 출병한 것으로 되어 있다.811)≪日本書紀≫권 19, 欽明紀 23년(562)조에 의하면 가야의 멸망에 즈음해서 야마토왜가 출병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출병한 것은 야마토왜가 아니고 백제였다(金鉉球, 앞의 책, 144∼146쪽). 그리고 당시 고령의 대가야 멸망은 대가야가 신라에 반하였으므로 신라에게 토벌당한 결과인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562년 고령가야의 멸망기사는 544년 관산성 싸움 후에 실질적으로 신라의 세력하에 들어간 대가야가 562년 백제와 더불어 가야의 부흥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실을 보여 주는 내용이라 여겨진다.

 결국 가야 제국은 554년 관산성전투의 패배로 실질적으로는 신라의 세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백제와 가야 제국과의 369년 이래의 관계도 554년의 단계에서 거의 끝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金鉉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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