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Ⅸ. 가야인의 생활
  • 1. 산업의 발달
  • 1) 전기 가야의 산업

1) 전기 가야의 산업

 전기 가야시대 산업으로는 稻作을 중심으로 한 농업과 남해안 일대의 풍요한 해산물을 바탕으로 한 어업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풍부한 철을 바탕으로 한 철기생산 및 토기·길쌈812)≪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 弁辰傳에 의하면 “蠶桑을 익히 알고 縑布를 짤 줄 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등의 수공업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古代米 출토 유적의 일반적인 특징은 대부분이 동일 유구나 유적 넓게는 동일지역에서 다른 밭작물과 동반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점은 쌀만 검출된 扶餘 松菊里,813)國立中央博物館,≪松菊里 Ⅰ≫(국립박물관 고적조사보고 11, 1981). 慶州 각지의 고분, 金海 會峴里, 三千浦 勒島 유적 등도 인접지역에서 밭작물이 경작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한다. 즉 부여송국리 유적의 경우 출토된 碾石의 존재로 보아 조[粟] 등의 밭작물이, 김해 회현리 유적의 경우는 인접한 府院洞 유적814)東亞大博物館,≪金海府院洞遺蹟≫(고적조사보고 5, 1981)에서 쌀과 보리[大小麥], 콩과 팥[大小豆], 조·밀 등이 함께 출토된 사실로 확인할 수 있다.815)郭鍾喆,<한국과 일본의 고대 농업기술>(≪韓國古代史論叢≫4, 韓國古代社會硏究所, 1992), 65쪽. 이와 같은 현상은 한반도의 선사·고대농업이 밭농사가 우세하였거나 밭농사와 논농사가 혼합된 형태로 경작816)이 점은≪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 弁辰傳의 “土地가 肥美하여 五穀과 稻를 심기에 좋다”라는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한반도의 도작농업817)한반도의 도작농업에 대해서는 沈奉謹,<韓國 先史時代 稻作農耕>(≪韓國考古學報≫27, 1991), 5∼61쪽 참조.이 靑銅器시대에 이미 청동기·石器·土器·墓制 등의 복합문화체로서 남부지방에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과 이 시기 김해지역에서의 철기문화 발달을 염두에 둔다면 상당히 발전된 단계에 도달해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육지에서 떨어진 늑도와 같은 섬은 논농사가 부적합한 곳이기 때문에 출토된 쌀은 교역 대상품으로 반입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818)이 경우 陸稻의 재배도 배제할 수 없으나 지형조건을 고려해 볼 때 반입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쌀이 섬 주민의 식량으로서의 역할보다 상품 내지 전략물자로서의 상업적 의미를 가진 교역대상물이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819)이와 같이 해상무역을 하는 상인이나 해양 어민들에 의해서 경영되고 있는 상업적이며 비정착적인 형태의 도작을 ‘Gambler의 稻作’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高谷好一≪コメをどう捉えるか≫, 東京;日本放送出版協會, 1990, 106∼157쪽). 이것은 해당 출토 유적이 해안평야의 砂原이나 離島·海岸 砂州 등에 입지한다는 점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점은 김해를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의 해안부 도작 유적의 입지조건과 유사한 부분이 적지 않기 때문에 검토할 필요성이 있는 가설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당시의 도작 유적을 경영한 집단의 산업활동은 농업과 어업이 혼합된 경제구조로서 양자의 생산력이 중복되거나 어업에 보다 많이 치중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데, 이 점은 해안지역을 무대로 한 당시의 생산·교역체계를 염두에 둔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전기가야의 어업에 대하여 살펴보면 어업활동에는 어로·양식·수산제조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으나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어패류를 포획하는 것이 주된 활동이었을 것이다.820)그렇다고 하여 당시의 어로기술이 미숙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도의 포획기술을 요하는 捕鯨業이 이미 선사시대에 행하여졌다는 사실은 蔚州 盤龜臺의 巖刻畵가 이를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문헌에서 전기 가야시대 타지역에서 보이는 어업활동에 관한 내용을 참고로 살펴보면, 어로(①) 외에 해조류의 채취(②), 해서동물의 포획(③), 건어물·소금 생산활동(④·⑤) 등이 있었다고 보아진다.

① 마침 浦邊에 한 노파가 있어 이름을 阿珍義先이라 하니 赫居王의 고기잡이 할미였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第4 脫解).

② 하루는 延烏가 바다에 가서 海藻를 따고 있는 중 홀연히 한 바위가 있어 싣고 日本에 가버렸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延烏郞 細烏女).

③ 그 바다에서는 班魚皮가 생산되었다(≪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 濊).

④ 또 (魏의 顯祖가) 詔書로 말하기를 “…바친 바의 錦布海物은 비록 다 이르진 않았으나 卿의 至心이 명백하므로 지금 雜物을 별도로 주는 것이다” 하다(≪三國史記≫권 25, 百濟本紀 3, 蓋鹵王 18년).

⑤ (高句麗에) 貊布와 魚鹽·海中植物을 千里나 짊어지고 갔다(≪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 東沃沮).

 이러한 사실로 보아 가야사회도 이와 동등한 어업활동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해산물이 자급자족의 경제에서 벗어나 대외교역물로서 상품화되었다는 점(④·⑤)이다. 아울러 이는 해산물을 가공하여 보존하는 기술이 발달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고고학적인 자료를 통해 볼 때 당시 김해 중심의 해안을 생활 근거지로 한 경제활동에 대한 그 일면의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패총이다. 김해를 중심으로 한 패총의 입지와 조개류[貝類] 조성을 비교해 보면, 전기 가야시대 이전의 유적들은 김해지역에 해수가 침입한 이후에 해수면의 변동으로 인하여 外海와 內灣에 분포하여 그 위치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전기 가야시기가 되면 패총의 위치는 대체로 그 구별이 없어진다. 이 점은 당시 이 지역의 어업활동이 세분화됨에 따라 생산 담당계층이 분리·분화되어 단순한 어로활동에서 보다 높은 수준의 경제구조로 바뀌어 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전기 가야시대보다 앞선 시기에는 패총에 묻혀진 패류의 종류가 패총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에 따라서 결정되는데, 이는 패류를 포획하는 집단의 활동이 패총을 형성한 지역을 중심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전기 가야시대에 이르면 이러한 양상은 약간의 변화를 보이게 된다. 즉 새로이 灣의 안쪽에 형성된 회현리·부원동 패총의 경우, 그 위치가 만의 안쪽인데도 불구하고 출토된 패류의 종류에는 외해에서 서식하고 있던 패류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821)양 패총은 그 입지 때문에 內灣의 굴류·백합·바지락 등의 潮間帶群集이 주종을 형성하지만 패류 가운데에는 外海에서 灣口部 사이에 서식하는 패류가 적지 않게 검출되고 있다. 예를 들자면 참전복·시볼트전복 등의 전복류와 긴뿔고둥·눈알고둥·명주고둥·테두리고둥·보말고둥 등의 고둥류 및 홍합·대복·조선백합·국자가리비 등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 패총을 형성한 집단이 어업활동의 내용에 따라 외해계와 내만계로 분리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사실 외해계 어업은 잠수어법822)이러한 잠수어업에 대해서는 “또 한 바다를 건너 千餘里를 가면 末盧國에 이른다. …고기와 전복잡기를 즐겨 물이 깊고 얕음이 없이 모두 물밑에 가라앉아 이를 취한다”(≪三國志≫권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30, 倭)라는 기록이 참고된다.에 의한 패류·해조 등의 포획이나 해서동물의 포획과 같은 독특한 기술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만계의 어로활동과 구분된다.823)郭鍾喆,<洛東江 河口 金海地域의 環境과 漁撈文化>(≪伽倻文化硏究≫2, 釜山女大, 1991), 70쪽.

 그리고 당시의 대외 교역활동의 담당 집단이 이들 외해계 어민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시기의 것으로서 김해지역에 보이는 패총의 지리적 입지가 단순히 어업만을 목적으로 해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반영한다. 다시 말해서 패총과 분묘 등에서 출토되는 외래계 반입품은 당시의 대외교역활동이 加耶 諸國 집단간의 교역범위를 벗어나 중국·일본과도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음은 수공업으로서의 철 문제이다. 철은 고대국가 형성에 중요한 역할824)李龍範,<高句麗의 成長과 鐵>(≪白山學報≫1, 1966).을 한 것으로 낙동강 하류의 김해지역은 초기 철기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의 하나이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경상남도지역의 17개 소의 鐵鑛床 가운데 13개 소가 김해 부근에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825)李南珪,<韓國初期 鐵器文化의 一考察>(≪韓國考古學報≫13, 1982), 42쪽. 또한 김해군 상동면에서 야철지가 확인826)安春培,<伽倻社會의 形成過程硏究>(≪伽倻文化硏究≫창간호, 1990), 60∼61쪽.되고 있는데, 이는 다음의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진다.

나라에는 鐵이 나는데 韓·濊·倭가 모두 와서 이것을 취해 갔다. 모든 賣買에는 모두 鐵을 사용하는데 中國에서 錢을 사용함과 같다. 또한 二郡에 供給한다(≪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 弁辰).

 철을 매개로 한 전기 가야의 교역활동을 문헌과 유물을 토대로 하여 살펴보면, 낙랑지역이 중국과의 중개무역으로 번성하고 있었다면 전기 가야의 김해지방은 낙랑의 선진문물을 수입하여서 낙동강 수로를 통하여 경상 내륙지방의 가야 여러 소국이나 신라 등지에다 팔아서 그 부를 축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對馬島와 壹岐島를 거쳐 倭國에도 선진문물을 수출함으로써 막대한 중개무역의 이익을 축적하는 중개기지로서 번성하였으리라고 추정된다. 최근 김해지역에서 출토된 중국거울·일본계 청동기 등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전기 가야의 김해를 중심으로 한 이러한 산업양상은 낙랑의 소멸에 따른 낙랑과의 교역단절, 이어 전개되는 한반도내에서의 일련의 정세변화로 그 중심지가 고령을 중심으로 한 경상 내륙 산간지방으로 옮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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