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Ⅸ. 가야인의 생활
  • 2. 종교와 풍속
  • 1) 문헌에 보이는 가야의 종교
  • (2) 유교

(2) 유교

 유교는 중국의 상고신앙을 바탕으로 초월적·절대적 존재로서의 上帝 혹은 天을 중시하는 사상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현실을 중시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839)상고신앙으로서의 유교는 공자에 이르러 인간적 가치를 존중하는 사상으로 체계화 되었다. 공자는 인간의 의지를 넘은 존재로서의「天」또는「天命」에 대한 외경심을 표시하였으나, 이는 주체적으로 각성된 인간성을 통하여 심화되는 세계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교는 윤리도덕의 규범을 강조함과 동시에 종교·철학·정치·교육·사상 등의 학문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유교는 인간생활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측면이 유교를 민본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德治主義와 王道政治를 강조하는 정치사상으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가야를 비롯한 고대 삼국도 유교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각국의 고유문화를 성립시켜 나갔다고 보아진다. 일반적으로 삼국시대를 불교사상을 토대로 한 시기라고 이해하지만, 실제로는 유교가 보다 먼저 전래되어 고대문화의 일부분을 형성하였다. 이는 유교전래의 하한을 고구려 小獸林王 2년(372)의 太學 설립의 기록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백제에서도 近肖古王代(346∼375)에 박사 高興에 의해≪書記≫가 편찬되었다는 기록에서 유교가 전래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眞興王 6년(545)에 이르러≪國史≫가 편찬되었던 점과 교육기관인 國學이 神文王 2년(682)에 설치되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유교가 상당히 늦게 전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訥祗麻立干代에 박제상이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王弟 卜好를 데려오기 위해≪春秋左氏傳≫과≪詩經≫의 문구를 인용하여 고구려왕을 설복시켰던 점840)≪三國史記≫권 45, 列傳 5, 朴堤上條 참조.을 생각한다면 이미 유교의 오경사상이 전래되어 지배층에 널리 읽혀졌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편 가야의 유교사상을 엿볼 수 있는 서술 부분841)≪駕落國記≫의 내용에는 후대의 수식이 더해진 부분이 많기 때문에 문제성이 있다. 그러나 금관가야가 일찍부터 낙랑과 빈번한 통교가 있었던 점을 감안한다면 문물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유교사상도 동시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어지기 때문에 사료로 이용하였다.을≪가락국기≫에서 추출하여 열거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① 假宮을 짓게 하여 入御하였으나 질박하고 검소하고자 하여 茅茨(지붕에 덮은 띠)를 자르지 않고 흙 계단은 三尺이었다.

② 宮闕과 屋舍는 농한기를 이용하여 건축하였다.

③ 王이 대답하기를 하늘이 나를 명하여 즉위케 하여 장차 중국을 편안히 하고 下民을 안도케 함이니 감히 天命을 어기어 位를 주지 못할 것이고 또한 우리 나라의 백성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

④ 그 아래 官僚는 周의 規例와 漢의 제도로써 정하니 이것이 革古鼎新하고 設官分職하는 도리였다.

⑤ 이에 나라와 집안이 질서있게 되고 人民을 자식과 같이 사랑하니 그 敎化는 엄숙치 아니하여도 위엄이 서고 그 정치는 엄하지 아니하여도 다스려졌다.

 위의 내용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가야시대에도 정치사상으로서 유교가 전래되었다는 점이다. 즉 현실 정치를 담당한 위정자의 자질에 필요한 왕도정치와 덕치주의(①·⑤), 추구하는 정치의 근본인 민본주의(②), 도덕성과 역사의식의 근거인 天命思想(③), 그리고 유교적 국가제도의 정비 등의 요소가 보이고 있다.

 이처럼 유교가 불교보다 앞서 그리고 별다른 마찰없이 가야를 비롯한 고대사회에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중국의 유교사상과 한국 고대의 사상이 모두 인간을 근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하는 동질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