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에서 하늘(天神)에 대한 신앙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알 수 있는 기록은≪三國志≫魏書 東夷傳,≪三國史記≫祭祀志,≪東國李相國集≫東明王篇,<廣開土王陵碑>등을 들 수 있다.
≪동국이상국집≫동명왕편과<광개토왕릉비>에는 고구려가 天帝의 자손임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고구려의 제천의례인 東盟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행사로 이름을 동맹이라 한다. 그 공적인 모임에는 의복을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하여 입는다. 大加와 主簿는 모두 幘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같기는 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부분이 없으며, 小加는 折風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어 隧穴이라 하는데 10월 國中大會 때 隧神을 모셔다가 나라 동쪽의 위에서 제사를 지내며 나무로 만든 수신을 신좌에 모신다. 감옥은 없으며 죄가 있으면 제가가 의논하여 문득 죽이고 처자를 몰입하여 노비로 삼는다(≪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高句麗).
10월에 제천의례를 행하는데 그 제의는 거국적인 대회이며 그 제의의 이름은 동맹이라 하였다. 이 동맹이란 제의명은 고구려의 건국자 동명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 제의는 제천의례이면서 또한 국조신에 대한 제의로서 양면성을 가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천의 자손인 동명에 대한 제사의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제천대회는 공회로서 국가의 공식적인 의례이며 단순한 민속행사가 아닌 것이다. 아울러 그 공회에 참석할 때 의복을 모두 비단과 금은으로 장식하여 대단히 화려하게 의례를 거행하였다. 따라서 이 의례는 지배계층의 의례라고 볼 수 있다. 모자를 쓰는데 대가와 소가가 차별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복장의 차별성은 바로 고구려 지배층 내부의 계층성이 매우 확연함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국왕이 제의를 주관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보여 수직적인 지배구조를 과시하는 것이다. 제천의례를 행하는데 수혈에서 신을 맞이하여 神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는 것은 맞이굿·오구굿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006)金宅圭,≪韓國民俗文藝論≫(一潮閣, 1980), 22∼32쪽. 수혈의 유적이 지금 集安市 下解放村 산중턱에 通天洞과 國洞大穴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007)鄭永鎬,<高句麗의 東盟과 그 遺蹟>(≪于江權兌遠敎授停年紀念論叢≫, 1994), 7∼9쪽. 東盟은 산위의 통천동과 국동대혈에서 왕과 귀족들의 제례로 시작하여 산아래에 일반민들이 모여 가무를 즐겼다고 생각한다.008)申瀅植,≪集安 高句麗遺蹟의 調査硏究≫(國史編纂委員會, 1996), 167∼169쪽. 제사의례 중에 재판과 형벌이 집행된 경우는<부여전>과 신라의 금석문에서도 볼 수 있다. 종교적인 축제에 범죄자를 재판하는 것은 재판이 神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신앙에 뿌리를 두는 것임을 인류학의 지식에 비추어서 알 수 있다.009)李基白,<韓國 古代의 祝祭와 裁判>(≪歷史學報≫154, 1997), 22∼27쪽. 이것은 제의가 규범으로서의 기능을 갖고 있는 것이다.010)崔光植,≪韓國古代의 祭儀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0), 40쪽. 이처럼 제천의례는 종교적인 행사일 뿐만 아니라 지배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갖고 있던 것이다.
≪三國史記≫祭祀志에서는 고기를 인용하여 제천의례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고기에 운운 … 고구려에서는 항상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서 모여 돼지와 사슴을 잡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하였다(≪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
≪삼국지≫위서 동이전에서는 10월에 제천대회를 하였다고 하였는데≪삼국사기≫제사지에서는 3월 3일에 제천의례를 행하였다고 하였다. 그 제사 지내는 날을 볼 때 중국문화의 영향이 엿보이는데 돼지와 사슴을 잡는 희생의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하늘과 더불어 산천에 함께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장천 1호분은 그림의 내용이 제천의례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사냥하는 모습은 제사에 필요한 犧牲을 잡기 위한 것이며, 나무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이 바로 제의를 행하는 모습이며, 춤추는 모습도 제의 과정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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