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1. 고구려의 토착신앙
  • 2) 조상숭배신앙

2) 조상숭배신앙

 고구려의 조상숭배신앙을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始祖廟에 대한 기록이다. 고구려의 시조묘에 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삼국지≫고구려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삼국사기≫제사지에 실려 있는<고기>을 보면 神廟에 대한 기록이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기에 이르기를 동명왕 14년 가을 8월에 왕의 어머니 유화가 동부여에서 薨去하자 그 왕 금와가 태후의 예로서 장례를 치루고 드디어 신묘를 세웠다. 태조왕 69년 10월 부여에 순행하여 태후묘에 제사하였다. 신대왕 4년 9월 卒本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하였다. 고국천왕 원년 9월, 동천왕 2년 2월, 중천왕 13년 9월, 고국원왕 2년 2월, 안장왕 3년 4월, 평원왕 2년 3월, 건무왕 2년 4월 모두 위와 같이 행하였다(≪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

 먼저 태후묘 제사에 대해 살펴보면 동명왕 14년(B.C. 24) 8월에 왕의 어머니인 유화가 동부여에서 죽자 금와왕이 태후의 예로서 장례를 지내고 신묘를 세웠다. 그리고 태조왕 69년(121) 10월에 부여에 순행하여 태후묘에 제사 지냈다. 여기서 신묘는 태후묘를 말하며 이는 동명왕 14년에 세웠는데 그에 대한 제사는 태조왕 69년에 단 한번 행해졌다. 그 이전에는 왕이 직접 가지 않고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나무를 깎아 부인상을 만들어 제사하였다.

 그런데 왕이 직접 행한 태후묘에 대한 제사는 태조왕 이후에는 없고, 졸본에 있는 시조묘제사가 주종을 이루었다. 신대왕 4년(168) 4월, 고국천왕 원년(179) 9월, 동천왕 2년(228) 2월, 중천왕 13년(260) 9월, 고국원왕 2년(332) 2월, 안장왕 3년(521) 4월, 평원왕 2년(560) 2월, 건무왕 2년(619) 4월에 왕이 졸본에 직접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전하는 내용이≪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기록되어 있다.<제사지>에는 언제 동명왕묘가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고구려본기>에는 대무신왕 3년(A.D. 20)에 동명왕묘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디에 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시조묘가 졸본에 있었으니 졸본에 세워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대왕 3년 9월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10월에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다음 왕인 고국천왕도 즉위 다음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즉 즉위 다음해 우씨를 왕후로 세우고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한편 동천왕은 우씨를 왕후로 봉하기 직전에 졸본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즉 동천왕은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내고 대사면을 행하고 난 뒤 우씨를 왕태후로 삼았다. 그런데 동천왕 21년(247)조를 보면 廟社를 평양성으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동천왕 21년 환도성이 난리를 겪어 다시 도읍하기 어려우므로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묘사를 옮겼다. 여기서 묘사는 종묘와 사직을 이르므로 환도성에 묘사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조묘는 그 이전에도 졸본에 있었으며 그 이후에도 졸본에 그대로 있다. 왜냐하면 다음 왕인 중천왕 13년(260)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조묘와 종묘에 대해 분명한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하겠다. 졸본에는 시조묘가 있고, 종묘는 도읍을 옮김에 따라 함께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시조묘는 시조 동명성왕이 묻힌 졸본의 시조묘 주변의 사당을 의미한다.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는 장군총의 맨 꼭대기에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라 볼 수 있는 기둥구멍 자리가 있다. 태왕릉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곳의 적석총 위에는 수많은 기와장이 널부러져 있다. 이 적석총 위에도 역시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장군총과 적석총 위에 있었던 건물은 고인을 기리는 사당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사당은 무덤 위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차츰 무덤 옆으로 위치가 옮겨진 것이다. 한편 종묘는 시조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왕들을 함께 모신 사당이다. 따라서 四時로 행하는 제사는 종묘에서 행하고 왕의 즉위의례 등 특별한 경우에 시조묘에 가서 제사를 지냈다.

 고국원왕 2년(332)에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는데 그 목적이 다소 분명히 나타난다. 왕이 즉위 다음해 봄에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하였으므로 이것은 즉위의례적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의 질병을 문안하고 진휼한 것을 볼 때 이 시조묘제사는 巡幸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011)金瑛河,<新羅時代 巡狩의 性格>(≪民族文化硏究≫14, 高麗大, 1979), 119∼245쪽.

 한편 고국양왕 때 종묘를 중수하는 기사가 보이는데 이는 시조묘와는 다른 것으로 동천왕 21년(247)에 평양성에 옮겼던 묘사 등의 종묘이다. 불교의 공인과 함께 宗廟와 國社를 수리하였다. 이것은 사상정책에 있어 불교를 공인하면서 그에 대한 일종의 무마책인 것 같다. 그 이후 광개토왕·장수왕·문자왕대에는 시조묘제사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약 200년간 시조묘제사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다가 안장왕 3년(521)에 왕이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고 나온다. 즉위 직후에 행한 것을 볼 때 즉위의례적 성격이 강하며 순행의 목적도 있었다. 평원왕 2년(560) 2월에 왕이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하고 3월에 돌아오면서 州郡의 獄에 갖힌 죄수를 사면하여 주었다. 영류왕 2년(619)의 시조묘제사도 이와 같은 성격을 보이고 있다. 즉위 다음해인 2년 2월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고 4월에 왕이 졸본에 순행하여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인 보장왕 5년(646)에는 동명왕모 塑像이 3일이나 피를 흘렸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멸망을 예고하는 듯하다. 고구려의 멸망은 제사를 통하여 분명히 알 수 있다. 보장왕 25년에 왕이 태자 福男을 唐에 보내 태산에 제사를 지내는데 시위하게 하였다. 27년(668)에는 唐 高宗이 李積으로 하여금 보장왕을 召陵에 바치고 軍容으로 하여금 鼓歌를 연주하게 하고 京師에 들어가 太廟에 바치게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종묘와 사직이 끝난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와 같이 한 국가의 멸망은 결국 제사권을 빼앗기고 다른 나라의 제사체계 속에 편성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제사의례가 갖는 정치사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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