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1. 고구려의 토착신앙
  • 3) 지신신앙

3) 지신신앙

 고구려에서의 땅에 대한 신앙에 관해서는 먼저≪삼국지≫위서 동이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나라 동쪽에 큰 구멍이 있어 이름을 수혈이라 하였는데 10월 국중대회 때 수신을 맞이하여 모시고 나라에 돌아가 동쪽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들어 신좌에 모신다(≪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高句麗).

 10월 제천대회인 동맹을 행할 때 하늘에 뿐만 아니라 땅에 대해서도 제사의례를 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라 동쪽에 있는 큰 굴에서 지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 모셔다가 나무로 만들어 신좌에 모셨다. 신의 모습을 나무에 의탁하였다. 따라서 국중대회인 동맹이 열릴 때마다 천신과 아울러 지신에 대한 제사의례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도 지신신앙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시조 동명성왕의 성은 고요, 휘는 주몽이다. 이에 앞서 부여왕 解夫婁가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사를 지내 후사를 구하고, 말이 가는대로 鯤淵에 이르러 큰 돌이 서로 마주보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그 돌을 젖치게 하니 금색으로 된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가 있었다. 왕이 기뻐하여 이는 하늘이 나에게 뒤를 잇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 하고 거두어 기르니 이름을 金蝸라 하고 장성하여서는 태자가 되었다(≪三國史記≫권 13, 高句麗本紀 1, 시조 동명성왕).

 시조 동명성왕의 출계를 밝히고자 하는 서두에서 부여왕 해부루가 태자인 금와를 얻게 된 과정을 기술한 내용이다. 그런데 금와를 얻기 위하여 산천에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다.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나서 말이 곤연으로 이끌고 간 것이다. 거기서 신이한 장면을 목격하였고 금색 모양의 어린아이를 얻게 되었다. 해부루는 제사를 지낸 후에 이러한 신이한 일이 일어났음으로 하늘이 자기에게 내려준 것으로 이해하고 데려다 길렀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장성하여서는 신이하게 탄생한 그가 태자가 될 수 있었다. 산천에 대한 제사가 하늘에 닿아 돌에서 아이를 얻었고 그 아이는 마침내 후사를 잇게 된 것이다. 물론 고구려의 것은 아니고 부여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고구려의 山上王도 자식이 없어 산천에 제사하여 아들을 얻었다.

7년 3월 왕이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하였다. 이 달 15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말하기를 ‘내가 너에게 小后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하려고 하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하늘이 나에게 이와 같이 순순히 이야기하였으나 소후가 없으니 어찌하느냐’고 하였다. 乙巴素가 대하여 아뢰기를 ‘천명은 가히 헤아리기 어려우니 기다리십시요’라고 하였다(≪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산상왕 7년).

 산상왕 7년(203) 3월에 왕이 자식이 없어 산천에 기도한 것은 부여의 경우와 같다. 기도의 효험으로 꿈에 하늘이 소후로 하여금 아들을 낳게 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산천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이 도와주는 구조도 부여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아들을 찾게 되는 과정에 부여의 경우는 말이 길잡이가 되는데 고구려에서는 돼지가 길잡이가 된다.

12년 겨울 11월에 郊豕(제사에 사용하는 돼지)가 달아나자 담당자가 이를 쫓아 酒桶村에 이르렀으나 머뭇거리다 잡지 못하였다. 이때 스무살쯤 된 아주 예쁜 여자가 웃으며 앞에서 교시를 잡아 쫓아간 사람이 이를 얻을 수 있었다. 왕이 듣고 이상히 여겨 그녀를 보고 싶어 미행하여 밤에 그녀의 집에 이르러 시중드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야기하도록 하였다. 그 집에서는 왕이 왔다는 것을 알고 감히 거역하지 못하여 방으로 들게 하고 그녀를 불러 모시도록 하였다. 그녀가 고하여 가로되 ‘대왕의 명령은 감히 피할 수 없으니 만약 자식이 생기면 저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약속을 하였다. 丙夜(새벽)에 이르러 왕이 일어나 환궁하였다 … 13년 가을 9월에 주통촌녀가 아들을 낳았다. 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나에게 후손을 내려주신 것이라’ 하였다. 교시의 일로부터 시작되어 그 어미를 만났으므로 그 아이의 이름을 교시라 하고 그 어미를 小后로 삼았다. 처음에 소후의 어미가 잉태하고 아직 낳지 않았을 때 무당이 말하기를 ‘반드시 왕후를 낳을 것이라’ 하여 어미가 기뻐 이름을 后女라 하였다 … 17년 봄 정월에 교시를 태자로 삼았다(≪三國史記≫권 16, 高句麗本紀 4, 산상왕).

 제사에 희생물로 쓰이는 돼지가 도망간 것을 계기로 주통촌의 여자를 알게 되었고 그녀가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아들이었다. 이것은 5년전에 산천에 기도하여 하늘이 꿈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된 것이다. 더구나 소후의 몸에서 아들을 낳는다고 하였는데 그것도 꿈의 내용과 같다. 또한 그의 어미의 탄생에 있어서도 무당이 왕후가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하였다. 왕은 이 아이를 하늘이 내려주신 것으로 이해하고 마침내 왕태자로 삼았다. 산천에 대한 제사가 꿈에서 앞일을 예언받게 되었으며 제사에 쓰는 돼지가 여자를 만나게 하였으며 마침내 아들을 낳았으며 왕태자가 되었다. 산천에 대한 제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따라서 난리를 겪을 때 도읍을 옮기며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함께 토지신을 모시는 社를 함께 옮겼다. 東川王 21년(247)에 환도성이 난리를 만나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게 되자 평양성을 쌓고 백성과 묘사를 옮겼다.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함께 토지신을 모시는 사를 옮기는 것을 볼 때 토지신에 대한 중요성을 알 수 있다. 故國壤王 때에도 종묘와 국사를 함께 수리하였다. 고국양왕 9년(391) 3월에 왕이 불교를 공인하면서 국사를 세우고 종묘를 수리하였다. 종묘가 기본적으로 왕실의 조상숭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종묘제의 변화가 왕실세계 인식의 변화와 일정하게 관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012)趙仁成,<4, 5세기 高句麗 王室의 世系認識 變化>(≪韓國古代史硏究≫, 1991), 70∼74쪽. 하여튼 여기서도 조상신을 모시는 종묘와 토지신을 모시는 국사가 함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平原王 때에는 가뭄이 들자 산천에 기도하였다. 평원왕 5년(563) 여름에 가뭄이 크게 들자 임금이 평상시보다 반찬의 가지수를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나면 산천에 제사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서는 사냥을 하고 나서도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삼국사기≫제사지에<고기>를 인용하여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에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하늘과 산천에 제사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 사슴과 돼지를 잡아 희생으로 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매년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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