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2. 백제의 토착신앙
  • 2) 조상숭배신앙

2) 조상숭배신앙

 백제의 조상숭배신앙도 시조묘신앙을 통해 알 수 있으며, 특히 시조묘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백제의 시조묘는 동명묘와 구태묘 두 계통으로 전한다. 중국측 자료에서는 구태묘로, 한국측 자료에서는 동명묘로 기록되어 있다. 먼저 중국측 기록으로≪책부원구≫를 보면 백제에서 4계절의 가운데 달마다 왕이 천 및 오제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시조 구태묘를 국성에 세워 1년에 네번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오제지신은 오방(동·서·남·북·중)의 방위신을 말하는데 지신을 의미한다. 백제는 천신·지신·시조묘에 제사를 지낸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시조가 구태이므로 구태묘를 세워 제사를 지낸 것이다. 이와 유사한 기록이≪수서≫백제전에도 나타나 있다. 동명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자가 있는데 매해 사계절 가운데 달에 왕이 天 및 五帝의 神에 대해 제사를 지내고 그 시조 구태묘를 국성에 세워 일년에 네차례나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이를 통해 구태가 동명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은≪북사≫백제전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삼국사기≫제사지에서는 여러 사서를 인용 비판하여 시조묘를 동명묘로 판단하였다.≪해동고기≫에서는 시조를 동명이라고도 하고 우태라고도 하였다. 그리고≪북사≫나≪수서≫는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있어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는데 여기의 우태는 구태를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에 대하여≪삼국사기≫에서는 동명이 시조였다는 사적이 명백하므로 그 나머지를 믿을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삼국사기≫제사지를 보면<고기>를 인용하여 천지신에 제사한 기록과 함께 시조 동명묘에 대한 제사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시조 동명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기에 이르되 다루왕 2년 봄 정월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였다. 책계왕 2년 봄 정월, 분서왕 2년 봄 정월, 계왕 2년 여름 4월, 아신왕 2년 봄 정월, 전지왕 2년 봄 정월 모두 위와 같이 하였다(≪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

 다루왕 2년(29) 정월에 시조 동명묘에 배알하고, 책계왕 2년(287) 정월, 계왕 2년(345) 4월, 아신왕 2년(393), 전지왕 2년(406) 정월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상 여섯번의 제사가 모두 즉위 다음해에 이루어졌으므로 즉위의례의 성격이 분명하다 하겠다. 또한 제사의례를 행한 달도 계왕 2년 4월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월에 이루어져 기풍제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삼국사기≫제사지에서는 고기를 인용하여 천지신과 동명묘에 대한 제사를 정리하고 있는데<백제본기>를 보면 제사의례에 대해 보다 상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조 온조왕조를 보면 온조왕 원년 5월에 동명묘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 신라의 경우는 남해왕대, 고구려의 경우는 대무신왕대 시조묘를 세웠는데 백제는 시조묘를 시조 온조왕대에 세웠다. 백제 시조는 온조왕이나 시조묘는 동명묘인 점이 특이하다. 더구나 백제의 시조에 대한 견해는 그외에도 비류왕·구태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다.013)盧明鎬,<百濟의 東明神話와 東明廟>(≪歷史學硏究≫10, 全南大, 1981), 39∼89쪽. 그런데 온조왕 17년(A.D. 3)에는 國母에 대한 廟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시조 온조왕대에는 동명묘와 국모묘, 천지에 대한 제사가 따로따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다음왕인 다루왕대에 오면 동명묘와 천지에 대한 제사가 같은해에 이루어졌다. 즉위 다음해 정월 시조 동명묘를 배알하고, 2월에 왕이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 이것은 즉위 다음해 정월에 시조 동명묘에 신왕의 즉위를 고하여 왕위계승을 고유한 다음에 남단에서 백관을 대동하고 천지에 제사함으로써 왕권의 위엄을 보인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기루왕·계루왕·초고왕 등 약 200년간에 시조 동명묘와 천지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구수왕 15년(227)에 동명묘에 대해 제사를 지낸 기록이 보인다. 이 해 3월에 우박이 내리고, 4월에 큰 가뭄이 들어 왕이 동명묘에 기우하니 비가 내렸다. 시조 동명묘에 대한 제사는 이와 같이 농경생산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책계왕 2년(287)에도 동명묘 제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즉위 다음해 동명묘에 배알한 점에서 분서왕 2년(299)의 기사와 같다. 비류왕 9년(312) 동명묘에 대한 배알 기사가 보이며, 이 해 4월에 동명묘에 배알하고 解仇를 兵官佐平으로 삼았다. 이것은 신라의 시조묘 제사나 신궁 제사 때 중신을 임명한 기사와 성격이 같다. 아신왕 2년(393)에도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가 함께 이루어졌다. 아신왕 즉위 다음해 정월에 동명묘에 배알하고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를 지냈으며 眞武를 좌장으로 삼아 병마의 일을 맡겼다. 여기서도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가 동시에 이루어졌으며 중신에 대한 임명이 뒤따랐다.

 한편 전지왕 때에도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가 함께 이루어졌다. 즉위 다음해 정월 왕이 동명묘를 배알하고 남단에서 천지에 제사하고 大赦하였다. 이어 2월에 사신을 晉에 보내 조공하였으며 9월에는 解忠을 달솔로 삼았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대사에 대한 기사이다. 동명묘 제사와 천지신 제사 때의 중신임명 기사뿐만 아니라 대사에 대한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신라의 시조묘 제사나 신궁 제사 때 함께 나타난다.014)崔在錫,<新羅의 始祖廟와 神宮의 祭祀>(≪東方學志≫50, 延世大, 1986), 29∼86쪽. 이후에는 백제 멸망 때까지 시조묘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이후에는 동명묘보다 현실적 시조로서 구태(고이왕)묘 제사가 강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015)李鐘泰,≪三國時代의 「始祖」 認識과 그 變遷≫(國民大 博士學位論文, 1996), 94∼106쪽. 다만 백제의 멸망을 보여주는 제사에 대한 기록만이 보일 뿐이다. 福信이 道琛을 죽였는데 豊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만을 주관할 뿐이었다. 즉 군사적·정치적 능력은 상실하고 다만 제사권만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제사권마저 빼앗낌으로써 백제의 멸망을 고하는 것이다. 즉 부여융이 신라 문무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白馬를 죽여 맹서하였다. 이때 劉仁軌가 盟辭를 지었는데 金書鐵契로 만들어 신라의 종묘안에 간직하게 된 것이다.016)≪三國史記≫권 28, 百濟本紀 6, 의자왕. 이것으로 백제는 그 모습을 완전히 감추게 되는 것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