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3. 신라의 토착신앙
  • 1) 천신신앙

1) 천신신앙

 ≪삼국지≫위서 동이전을 보면 삼한의 제천대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귀신을 믿는데 국읍에 각각 1인을 세워 천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을 주재하게 하였다. 그러나≪삼국사기≫신라본기를 보면 천신에 대한 제사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제천의례의 기록이 김부식의 사대적 관념의 투영에 의해 삭제된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023)金泰永,<朝鮮初期 祀典의 成立에 대하여-國家意識의 變遷을 中心으로->(≪韓國史論文選集≫朝鮮前期篇, 1976), 1∼30쪽. 그러나≪삼국사기≫제사지를 면밀하게 살펴보면 신궁에서 천지신에 대한 제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① 제2대 남해왕 3년 봄에 처음으로 시조 혁거세묘를 세우고 四時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親妹인 阿老로서 主祭하게 하였다. ② 제22대 지증왕대에 시조가 탄강한 땅인 奈乙에 神宮을 창립하고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③ 제36대 혜공왕대 이르러 五廟를 세웠는데 미추왕은 김성 시조이고 태종대왕·문무대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는 데 큰 공덕이 있음으로 모두 대대로 不毁之宗으로 하고 親廟 둘로서 오묘를 삼았다. ④ 제37대 선덕왕대에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는데 사전에 보이는 것은 모두 경내 산천뿐이고 천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⑤ 이것은 대개 王制에 이르기를 天子는 七廟이며, 諸侯는 五廟로 二昭와 二穆과 太祖의 廟와 더불어 다섯이며, 천자는 천지와 천하 명산대천에 제사하고 제후는 사직과 명산대천의 그 땅에만 제사지내는 고로 감히 예를 벗어나지 않고 실행한 것이다(≪三國史記≫권 32, 志 1, 祭祀).

 종래에는 사료 ①·②·③만을 이용하여 시조묘에서 신궁으로, 신궁에서 5묘로 바뀐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 사료는 ④와 ⑤를 포함시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기록을 전체적으로 조감하여 보면 세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즉 ①과 ②, ③과 ④, 그리고 ⑤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①과 ②의 제도가 ③과 ④의 제도로 변화한 것이며, ⑤는 그렇게 변화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 되는 것이다. 즉 ①의 시조묘가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③의 5묘의 제도로 변화하고, ②의 신궁이 ④의 사직단으로 변화하였으며, ⑤는≪禮記≫王制篇을 근거로 하여 이러한 일련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시조묘가 5묘로 변화하고, 신궁이 사직단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리고 ⑤에 따르면 신궁의 주신은 천지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대 남해왕 3년 시조 혁거세를 모시는 시조묘를 세우고 제22대 지증왕대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을 시조가 탄강한 땅인 나을에 세웠는데 중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36대 혜공왕대에 이르러 5묘제로 변화하고 제37대 선덕왕대 이르러 사직단을 세웠다는 것이다. 즉 천자의 예에서 제후의 예로 변화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그 근거는 사료 ⑤로서≪예기≫왕제편의 기록이다.

 이러한 천지신을 숭배하는 신궁이 설치된 의미는 무엇일까. 소지왕 9년(467) 2월에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을 시조가 태어난 나을에 설치하고 나서 한달 뒤 3월 사방에 우역을 설치하고 소사에게 관도의 수리를 명하고 7월에는 월성을 수즙하였다. 따라서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설치가 중앙통치력 확대과정의 일환으로써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국내의 체제정비 및 왕권강화와 대외적 국가의식의 성장은 지증왕대에 이르면 더욱 강고해진다. 천지신을 모시는 신궁의 설치는 대내적으로 국가체제의 정비에 따른 사상적 통일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증왕대 신궁제사를 토착신앙 자체내의 사상적 통일정책의 성공으로 간주한다면 불교공인 이전에 왕실의 노력으로 토착신앙내의 사상적 통일을 자주적으로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024)崔光植,<新羅의 神宮設置에 대한 新考察>(≪韓國史硏究≫43, 1983), 61∼79쪽.

 그렇다면 불교의 공인은 이와 같이 자체적으로 사상적 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신라사회의 자신감에서 이룩된 것이지 새로운 통치이념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불교공인 이후에도 천지신을 모신 신궁에 대한 제사는 계속해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공인을 巫·佛의 교대로 파악해서는 안되며 오히려 자체적으로 사상의 통일을 이룩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외래사상인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적 발전을 꾀하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토착신앙을 기반으로 외래신앙인 불교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갔는가 하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사찰내의 산신각과 장승을 단순히 토착신앙의 잔재가 아니고 토착신앙의 제당구조 안에 불당을 받아들이는 특유한 복합형태로 파악한 것은 그 한 예라 하겠다.025)崔光植,<巫俗信仰이 韓國佛敎에 끼친 影響-山神閣과 장승을 중심으로->(≪白山學報≫26, 1981), 47∼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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