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3. 신라의 토착신앙
  • 2) 조상숭배신앙

2) 조상숭배신앙

 신라의 조상숭배신앙에 대한 자료는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풍부하다. 시조묘 이외에 祖廟·國祖廟·廟·先祖廟·祖考廟·五廟를 설치하여 조상을 숭배하였다. 신라의 시조묘는 제2대 남해왕 3년 정월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시조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廟로서 1년에 四時로 이를 祭祀하였으며 친누이인 阿老로서 이를 주제하게 하였다. 이후 제8대 아달라왕 17년(170) 2월에 시조묘를 중수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한편 21대 소지왕대에 이르면 시조묘에 守廟 20家를 증치하였다. 소지왕 7년(485) 2월에 仇伐城을 수축하고 여름 4월에 시조묘에 친사하고 수묘 20가를 증치하였고 5월에는 백제가 내빙하였다. 이때 수묘 20가를 증치한 데 대한 확실한 이유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어 잘알 수가 없다. 다만 수묘 20가를 증치했다는 것을 볼 때 이전에도 수묘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守廟」가「守墓」와 같은 의미일 것 같은 느낌을 준다.

 王廟를 王陵으로 인식한 것은 味鄒王陵의 경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미추왕릉을 始祖堂으로 부르고 있었는데, 이것은 왕묘를 왕릉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廟와 陵이 혼용되어 불리고 있는 것은 金首露王陵에서도 볼 수 있다.≪駕洛國記≫에 보면 김수로왕릉을 왕묘라고 하였으므로 능과 묘가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朴赫居世廟는 박혁거세의 능이라 볼 수 있으며 五陵이 始祖廟라고 볼 수 있다. 미추왕릉을 大祀인 三山과 같은 격으로 제사지내고 5릉의 위에 놓으며 大廟라 칭한≪삼국유사≫味鄒王 竹葉軍條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 시조묘가 어떻게 하나의 능이 아니라 다섯 개의 능으로 되었을까. 이는 통일 이후에 5묘제의 영향으로 인하여 김씨 왕실의 왕묘가 5묘가 될 때 박씨 왕실의 왕묘도 5묘로 되면서 5릉이 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신라의 경우 5묘제가 시행된 것은 神文王代가 처음이며 제도화된 것은 惠恭王代 이후이다. 그러므로 시조묘가 5릉으로 된 시기는 신문왕대와 혜공왕대 사이라고 생각된다.026)崔光植,<新羅 上代 王京의 祭場>(≪新羅 王京 硏究≫, 新羅文化宣揚會, 1995), 74∼76쪽. 그러면 시조묘를 비롯한 묘에 대한 제사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우선≪삼국사기≫신라본기에 나오는 시조묘에 대한 역대 왕의 제사기록과 그 관련기사를 도표화해보면 다음의<표>와 같다.

王代 王名(姓) 年.月 親祀記錄 關 係 記 事
2 南解(朴) 3. 1 立始祖廟  
3 儒理(朴) 2. 2 親祀始祖廟 大赦
4 脫解(昔) 2. 2 親祀始祖廟 春正月拜瓠公爲大輔
5 婆娑(朴) 2. 2 親祀始祖廟 三月巡撫州郡發倉賑給
6 祗摩(朴) 2. 2 親祀始祖廟 拜昌永爲伊飡 以參政事 玉權爲波珍飡 申權爲一吉飡 順宣爲級飡
7 逸聖(朴) 2. 1 親祀始祖廟  
8 阿達羅(朴) 2. 1
17. 2
19. 2
親祀(始)祖廟 大赦 以與宣爲一吉飡
重修始祖廟
有事始祖廟 京都大疫
9 伐休(昔) 2. 1 親祀始祖廟 大赦
10 奈解(昔) 2. 1
3. 4
10. 8
謁始祖廟
始祖廟前臥柳自起
狐鳴金城及始祖廟庭
11 助賁(昔) 1. 7 謁始祖廟  
12 沾解(昔) 1. 7
7. 7
謁始祖廟
禱祀祖廟及名山
封父骨正爲世神葛文王
乃雨 年饑多盜賊
13 味鄒(金) 2. 2
20. 2
親祀國祖廟
謁廟
大赦 封考仇道爲葛文王
 
14 儒禮(昔) 2. 1 謁始祖廟  
15 基臨(昔) 2. 2 祀始祖廟  
16 訖解(昔) 2. 2 親祀始祖廟  
17 奈勿(金) 3. 2
7. 4
親祀始祖廟
 
紫雲盤旋廟上 神雀集於廟庭
始祖廟庭樹連理
18 實聖(金) 3. 2 親謁始祖廟  
19 訥祗(金) 2. 1
19. 4
親謁始祖
祀始祖廟
王弟卜好自高句麗 與堤上奈麻還來
 
20 慈悲(金) 2. 2 謁始祖廟  
21 炤知(金) 2. 2
7. 4
9. 2
17. 1
祀始祖廟
親祀始祖廟

 
增置守廟二十家
置神宮於奈乙 奈乙始祖
初生之處也
王親祀神宮
22 智證(金) 3. 3 親祀神宮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至是禁焉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23 法興(金) 3. 1 親祀神宮 龍見楊山井中
25 眞智(金) 2. 2 王親祀神宮 大赦
26 眞平(金) 2. 2 親祀神宮 以伊飡后稷爲兵部令
27 善德(金) 2. 1 親祀神宮 大赦 復諸州郡一年租調
28 眞德(金) 1.11 王親祀神宮  
30 文武(金) 8.11 謁先祖廟 告曰 祗承先志 與大唐同擧義兵 問罪於百濟高句麗 元兇伏罪 國步泰靜 敢玆控告 神之聽之
31 神文(金) 2. 1
7. 4
 
親祀神宮
遣大臣於祖廟致祭
 
大赦
曰 王某稽首再拜 謹言太祖大王眞智大王文興大王太宗大王文武大王之靈
32 孝昭(金) 3. 1 親祀神宮 大赦 以文穎爲上大等
33 聖德(金) 2. 1 親祀神宮 遣使入唐貢方物
34 孝成(金) 3. 1 拜祖考廟  
35 景德(金) 3. 4 親祀神宮 遣使入唐獻馬
36 惠恭(金) 2. 2 王親祀神宮  
37 宣德(金) 2. 2 親祀神宮  
38 元聖(金) 3. 2 親祀神宮 京都地震 大赦
40 哀莊(金) 2. 2


3. 1
謁始祖廟


王親祀神宮
別立太宗大王文武大王二廟 以始祖大王及王高祖明德大王 曾祖元聖大王皇祖惠忠大王皇考昭聖大王爲王廟 以兵部令彦昇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大赦
 
41 憲德(金) 2. 2
5. 2
王親祀神宮
謁始祖廟
發使修葺國內堤防
玄德門火
42 興德(金) 2. 1
8. 4
親祀神宮
王謁始祖廟
 
46 文聖(金) 5. 7   五虎入神宮園
47 憲安(金) 2. 1 親祀神宮  
48 景文(金) 2. 2
12. 2
王親祀神宮
親祀神宮
 
55 景哀(朴) 1.10 親祀神宮 大赦

<표>역대 왕의 親祀기록과 그 관계기사

 위의<표>를 보면 시조묘의 명칭과 제사의 명칭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주목된다. 시조묘는 시조 박혁거세의 묘이나 단순히 박씨의 조상으로만 보아서는 곤란하다. 박혁거세는 박씨의 조상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신라의 국조인 것이다. 따라서 시조묘 이외에 조묘와 국조묘가 함께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시조묘에 대한 제사는 누가 지냈는가.<신라본기>에는 왕이 친히 제사했다고 되어 있으며,<제사지>에서는 친매인 아노로서 주제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계절마다 지내는 통상적인 의례는 아노와 같은 제관이 주제하고, 즉위의례 등 중요한 경우에는 왕이 친히 제사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왕이 친사하는 경우에도 제관인 아노는 제사에 관여하였다. 왕은 제주로서 제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아노와 같은 제관은 이미 왕의 직속하에 제의의 기능적인 면을 담당하는 데 불과하였다. 그러나 통일기 이후 신문왕대에는 대신을 보내서 조묘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왕이 친제하다가 통상적인 의례의 기능적인 면을 제관에게 넘겨주어 주제하게 하다가 통일기 이후 대신으로 하여금 주제하게 하도록 변화되었다.

 그러면 이러한 시조묘에 대한 제사의례는 어떠한 목적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의의는 무엇인가. 계급사회로 들어서면서 지배자는 여러 신들 중에서 천신에 대한 제사의례를 통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려 하였다. 여러 신들의 서열화 과정에서 천신이 정점을 이루게 되어 제천의례가 행해졌다. 그러나 국가형성이 본격화하면서 지배자는 天의 子 또는 天의 孫이라는 의식을 강조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신라에서는 천강신화를 가진 박혁거세를 위한 시조묘를 세우고 이에 대한 제사를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제의를 통하여 내적인 지배이데올로기로서 활용하고, 주변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는 배타적 지배이데올로기를 확립한 것이다. 따라서 시조묘 제의는 고대 국가형성의 가장 중요한 징표의 하나이며,≪삼국지≫한전에 보이는 대국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소국에서의 천신에 대한 제의가 마침내 대국에서는 천의 자손에 대한 제의로 발전된 양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조묘 제의가 갖는 정치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앞에서 제사제도가 시조묘에서 오묘로, 신궁에서 사직으로 변화하였다고 고찰한 바 있다. 그러나<신라본기>를 보면 오묘나 사직이 설치된 이후에도 시조묘와 신궁에서 행한 제사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시조묘에서 오묘로, 신궁에서 사직으로 변화했다고 한 것은<제사지>를 분석한 내용으로, 그것은 기본적으로 제도상 그러했다는 것이다.<신라본기>에 의하면 통일기 이후에도 시조묘와 신궁에 대한 제사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것은 신라문화의 특징으로 제도와 실제가 다른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제도상으로는 중국을 의식하여 시조묘 대신에 오묘로, 신궁 대신에 사직으로 제도화가 이루어졌지만 신라는 자신들의 독자적인 제사인 시조묘와 신궁에 계속하여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신라는 중국에서 종묘제를 수용하였지만 그 구체적인 사항에서는 중국의 종묘제 원칙을 그대로 따른 것은 아니었다.027)나희라,<신라의 종묘제 수용과 그 내용>(≪韓國史硏究≫98, 1997), 57∼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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