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3. 신라의 토착신앙
  • 3) 지신신앙

3) 지신신앙

 신라의 지신과 산천에 대한 신앙은 고구려와 백제보다 자료가 풍부하다.≪삼국사기≫신라본기뿐만 아니라 제사지에 위계적으로 잘 나타나 있으며,≪삼국유사≫에도 땅과 산악에 대한 신앙이 잘 나타나 있다.

 逸聖尼師今 5년(138) 10월에 왕이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한편 基臨尼師今 3년(300) 3월에 왕이 우두주(지금의 춘천지방)에 이르러 태백산에 望祭를 지냈다. 이와 같이 신라초부터 산악에 대한 제사를 왕이 친히 지낸 것을 볼 때 산악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태백산에 대한 제사를 중요시 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하려는 의지와 깊은 관련을 갖고 있다. 기림니사금 3년에 牛頭州가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망제는 먼 곳에 위치한 名山大川을 바라보면서 지내는 제사이지만 바라보며 지내는 제사의 대상은 자국의 영토로 한정되기 때문이다.028)鄭雲龍,≪5-6世紀 新羅 對外關係史 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6), 51∼53쪽.

 한편 지신에 대한 숭배는 하늘에 대한 신앙과 함께 이루어졌다. 백제에서와 같이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확실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천신신앙에서 살펴보았듯이 신궁은 천지신에 대한 제사를 지냈던 곳이다.

 炤知王 7년(485) 4월에 왕이 시조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수묘 20가를 증치하였다. 그리고 9년 2월에는 신궁을 나을에 설치하였는데 나을은 시조가 처음 태어난 곳이다.029)崔光植,<新羅 上代 王京의 祭場>(≪新羅 王京 硏究≫, 新羅文化宣揚會, 1995), 74∼76쪽. 시조묘에 대한 제사에서 시조가 태어난 땅에 대한 제사로 옮겨간 것이다. 또한 17년 정월에는 왕이 신궁에서 친히 제사를 지냈다. 智證王 3년(502) 3월 왕이 친히 신궁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후 역대 왕들은 즉위 직후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한편<제사지>를 보면 제22대 지증왕이 시조가 태어난 땅인 나을에 신궁을 창립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신궁이 소지왕 때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고,<제사지>에는 지증왕 때 설치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신궁이 소지왕 때에 설치되었으나 신궁에 대한 제사가 즉위 직후에 행한 것은 지증왕 때부터이므로<제사지>에서는 제도화한 때를 기록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즉 소지왕 9년(487)에 처음으로 신궁을 설치하고, 17년에 처음으로 왕이 신궁에 제사를 지냈으나 왕의 즉위 직후에 지내는 즉위의례로서의 제사는 지증왕 3년이므로 이를<제사지>에 기록한 것이다.

 <제사지>에서는 처음에 종묘의 제도에 대해서 논하고 3산5악 이하 명산대천은 대사·중사·소사로 나누어 구분하였다. 신라는 신라 영역내에 있는 명산과 대천을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제사를 지낸 것이다.030)崔光植,<新羅의 大祀·中祀·小祀의 祭場>(≪역사민속학≫4, 역사민속학회, 1994), 50∼70쪽. 이는 고구려나 백제보다 제사체계가 잘 짜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신라의 영토관념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031)濱田耕策,<新羅の祀典と名山大川の祭祀>(≪泡末集≫4), 147∼166쪽.<제사지>에 기록된 내용은 통일전쟁 이후에 체계화된 것이지만 통일전쟁 전에도 이와 같은 제사체계는 있었다. 예컨대 3산에 대한 기록은 통일 전부터 나타나고 있다.≪삼국유사≫김유신조에 보면 김유신과 3산의 신들과의 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郎(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히 꾀하고 있을 때 白石이란 자가 그 일을 알고 낭에게 고하되 자기와 公이 함께 몰래 적국을 선탐한 뒤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낭이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서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을 때 두 여자가 나타나 낭을 따라왔다. 骨火川에 이르러 유숙하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와서 공은 세 여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하였다. …여자들이 고하되 ‘공이 말하는 바는 이미 알고 있으니 원하건대 공은 백석을 그냥 두고 우리와 함께 숲속에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말하겠다’ 하고 이어 함께 들어갔다. 여자들이 문득 귀신이 되어 말하기를 ‘우리들은 奈林·穴禮·骨火 등 세 곳의 호국신이다. 지금 적국인이 낭을 유인하는 것을 낭이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가 낭을 만류시키려 이곳에 온 것이다’라고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아니하였다(≪三國遺事≫권 1, 紀異 2, 金庾信).

 이를 통하여 통일전쟁 이전에 이미 3산의 신들이 중요시되고 있었으며 또한 이들이 호국신임을 알 수 있다. 奈林은≪삼국사기≫에 의하면 習比部에 있던 산이며, 骨火는 영천지방에 있는 산이다. 穴禮는 종래에는 청도의 오리산이나 월성군의 단석산으로 비정하였으나 최근에는 영일냉수리비가 발견된 뒷산인 어래산이 유력하다. 즉 혈례산→열례산→얼레산→어래산으로 음전되어 지금의 어래산이 된 것이라 보고 있다.032)金崙禹,<新羅時代 大城郡에 관한 考察>(≪新羅文化≫3·4합집, 東國大, 1987), 22∼24쪽. 따라서 호국삼신에 대하여 제사를 지냈던 대사의 장소들은 신라의 수도 경주와 그 인접지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통일전쟁 전에는 3산5악의 위치가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통일전쟁 이후에는 국토의 영역 확대와 함께 전국적 규모로 변화하였다.033)李基白,<新羅五岳의 成立과 그 意義>(≪震壇學報≫33, 1969), 7∼23쪽. 즉 3산5악의 산신신앙은 신라 초기의 경주지방의 산신숭배신앙에서 통일전쟁 이후 전국에 걸친 지역의 산신숭배신앙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숭배대상만이 바뀐 것이 아니라 급격히 변화하는 당시 사회의 변화상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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