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Ⅰ. 토착신앙
  • 4.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관계
  •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1) 토착신앙과 불교와의 갈등

 토착신앙과 불교가 갈등을 빚는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이 이차돈의 순교설화이다. 이차돈의 순교설화는≪삼국사기≫·≪해동고승전≫·≪삼국유사≫및 금석문에 실려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료들을 검토해 보면 법흥왕이 본디 불법을 존중하여 興敎할 뜻이 있었으나 군신들의 반대가 두려워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興法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갖고 있던 이차돈에 의해 창사의 결심을 하고 이차돈에게 왕명을 내리어 창사의 책임을 부여하였다. 군신들은 절을 지으라는 왕명에 대하여 내심으로 반발하였지만 강력하게 반대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차돈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절을 지으려 하자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게 되었고, 이에 따라 創寺가 지연되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창사가 늦어지는 이유를 알고 보니 이차돈이 왕의 허락도 없이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왕은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하려는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군신들의 의견을 도외시 할 수 없었고, 더구나 자기와 장소에 대하여 의논하지 않고 천경림에 창사한 이차돈을 왕의 입장에서 矯命罪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법의 온건파인 법흥왕은 흥법문제에 있어서 군신들이 촉각을 워낙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차돈이 군신들의 신경을 건드려 가며 천경림에 창사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흥법의 강경파인 이차돈은 창사를 할 바에는 아예 토착신앙의 본거지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흥법의 의지를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군신들의 반발이 거세게 나오고자 왕은 군신들의 반발을 일단 완화시키고 왕명의 준엄함을 보이기 위해 이차돈을 교명죄로 처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즉 흥법에 대해 온건파인 법흥왕과 강경파인 이차돈의 의견차이와, 흥법 자체에 대한 반대파인 군신들과의 사이의 갈등과 대립에서 이차돈이 순교를 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아직 강력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불교세력이 결국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왕권의 강화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또한 토착신앙의 성소인 천경림에 창사함으로써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불교가 지배이데올로기화되어 가고 불교세력이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무불교대로 해석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불교가 국가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어 종래 토착신앙이 갖고 있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통치이념의 변화일 뿐 사상적으로는 두 개의 신앙이 마찰과 갈등을 겪으며 융화되어 갔기 때문이다. 즉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토착신앙이 다소 약화되었지만 그 전통은 지속되어 오히려 불교에서 배워온 것도 있고, 반대로 불교가 토착신앙의 제요소와 융화하여 독특한 한국불교로 토착화되어 갔다. 불교는 지배층에서 많은 호응을 받았지만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토착신앙이 일반적 추세였다. 따라서 통치이념의 관점에서 지배층 위주로 볼 때는 무불교대라는 평가를 할 수 있겠지만 사회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평가를 내릴 수 없다. 불교가 공인된 이후에도 피지배층 일반에서는 대부분 기존의 토착신앙을 중요시 하였으며, 또한 불교 자체도 토착신앙과 융화하여 토착화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