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1) 고구려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1) 불교의 전래

 고구려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들어온 해는 小獸林王 2년(372)이다. 前秦王 符堅이 고구려에 사신과 함께 僧 順道를 보내었는데, 이 때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왔다. 그 2년 뒤에는 僧 阿道가 왔다. 소수림왕 5년에 省門寺와 伊弗蘭寺를 지어 순도와 아도를 각각 살게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불교정책은 전진과 외교관계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당연히 국가의 지원이 따랐을 것이다.「省門寺」라는 절 이름은, 그것이 본래 관청 건물의 일부였음을 말해준다. 아도는 국적이 불분명하므로 개인자격으로 전도하러 왔다고 생각된다.

 한편 曇始가 東晉의 太元(376∼396)「말년」에 고구려에 불교를 처음 전했다는 기사가 崔致遠의<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924) 및 중국측 고승전에 보인다고 하여, 오히려 이 기사가 믿을 만하다는 주장이 있다.042)木村宣彰,<曇始と高句麗佛敎>(≪佛敎學セミナ-≫31, 大谷大學佛敎學會, 1980), 30∼41쪽. 그 이유는 순도·아도가 불교를 전해주었다는 기사는 기껏해야 12세기에 성립된≪三國史記≫에 처음 나오지만, 중국측 사서에는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즉≪삼국사기≫란 중국측 사서를 보고 적당히 紀傳體로 날조한 역사책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출발한 논리인데,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볼 때 수긍하기 어렵다. 첫째≪三國遺事≫나≪海東高僧傳≫에 나오는 순도·아도에 관한 기사는 金富軾의≪삼국사기≫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두 책의 기사는≪삼국사기≫와 내용이 다르다. 특히≪삼국유사≫는 고구려 불교의 시작에 대해<高麗本記>을 인용하였는데, 이<고려본기>는≪삼국사기≫의 高句麗本紀가 아닌 점으로 볼 때≪舊三國史≫일 가능성이 크다.043)辛鍾遠,<新羅 佛敎傳來의 諸問題>(≪新羅初期佛敎史硏究≫, 民族社, 1992), 145쪽. 그렇다면 순도 등에 관한 기사는 별도의 典據가 있었다는 말이 되며, 그것은 12세기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 최치원이 순도·아도 사적을 언급하지 않은 까닭은, 최치원이 그들에 대해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반면에 최치원은 중국 문헌에 매우 밝은 사람이었다. 셋째 고구려의 불교 初傳에 관한 한≪삼국사기≫는 담시에 대하여 일체 언급하고 있지 않아 사료가치가 매우 적은 듯 말하고 있다. 그러나≪삼국사기≫撰者도「末年」을「末期」의 뜻으로 보았을 것이므로,≪삼국사기≫고구려본기의 編年式 체제상 담시 기사는 게재될 여지가 없다. 요컨대 고구려 불교사를 이해함에 있어 중국측 문헌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는 태도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으며, 최치원의 비문 또한 절대적일 수 없다.044)담시 初傳說을 비판한 다음 글이 있다.
金煐泰,<高句麗 佛敎傳來의 諸問題>(≪佛敎學報≫23, 東國大, 1986 ;≪삼국시대 불교신앙 연구≫, 불광출판부, 1990).

 동진의 고승 支遁道林(314∼366)이「高麗道人」에게 보낸 편지가 있는데, 약 30년 年上인 竺法深의 높은 德과 불교를 널리 편 공적을 찬양한 내용이다. 지둔도림의 생존연대를 참작하면,「고려도인」은 순도가 고구려에 오기 이전에 동진에서 활약한 인물이다.045)辛鍾遠,<6세기 신라불교의 南朝的 성격>(앞의 책), 182쪽.

 당시 고구려의 서울은 國內城이었으므로 일명 興國寺·興福寺로 불린 성문사와 이불란사는 輯安에 있던 것이 틀림없는데, 평양에도 흥국사와 흥복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평양에는 광개토왕 3년(393)에 九寺를 창건한 바 있는데, 이것은 고구려가 南進政策을 펴는 과정에서 평양으로 遷都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그러므로 국가를 일으키는 데 있어 불교의 역할을 크게 기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성문사와 이불란사도 이 때 이름이 바뀌었고, 다음 장수왕대에 평양으로 천도할 때 흥국사와 흥복사도 평양으로 옮겨졌을 것이라 추측된다.046)신동하,<고구려의 寺院造成과 그 의미>(≪韓國史論≫19, 서울大, 1986), 3∼29쪽.

 고구려에 처음 전래된 불교의 성격은 格義佛敎 및 神異的인 것으로 추측되는데, 당시 중국의 5胡 16國 및 동진 초기 불교의 성격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축법심이나 지둔도림은 淸談格義불교의 대가로 유명하다.「청담」이란 魏晉시대에 유행하였던 老莊思想의 풍조를 일컫는 말인데, 이러한 사상 기반을 가지고 불경을 이해하는 연구방법을「격의」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중국사회에 일찍부터 傳譯되었던 般若思想을 그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老莊의 典籍에서 예를 들어 설명하는 것이다. 또한 북중국의 胡族을 敎化시킬 때 곧 잘 쓰는 방법이 신통력이었다. 呪文 등을 통해 기적을 보임으로써 위로는 국왕의 尊崇까지 받게 되었다는 영험담이 고승전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러한 예를 담시의 일화에서 잘 볼 수 있다. 그러나 담시는 고구려에 “三乘의 가르침을 전해주고 三歸五戒의 법을 세웠다.”는 평을 듣고 있듯이, 이미 이즈음에 와서는 初傳佛敎의 성격을 벗어나 經論의 연구 및 실천수행에 진력하는 불교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047)李龍範,<北朝前期 불교의 高句麗傳來>(≪東國大學校論文集≫12, 1973).
金煐泰,<高句麗佛敎思想>(≪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 圓光大, 1975).
鎌田茂雄,<高句麗佛敎の 開敎者-白足和尙 曇始>(≪文山金三龍博士華甲紀念 韓國文化와 圓佛敎思想≫, 圓光大,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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