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1) 고구려의 불교
  • (3) 불교신앙

(3) 불교신앙

 고구려 불교신앙의 실상에 대해서는 다행히 불상 명문이 몇 가지 남아 있어 접근이 가능하다. 먼저 국보 제119호 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의 光背銘을 보면, “高(句)麗 樂良 東寺의 僧徒 40명이 賢劫千佛을 조성하였는데, 그 스물 아홉번째인 因現義佛을 비구 □□가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이 부처 이름을 통해 이들은≪賢劫經≫의 가르침에 따라 佛事를 하였으며, 아울러 당시 고구려에는 현겁천불신앙이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051)金煐泰,<현겁천불 신앙>(≪삼국시대 불교신앙 연구≫, 불광출판부, 1990), 275∼281쪽. 이 불상의 조성연대를 종래 6세기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長壽王 7년(419)설이 제기되고 있다.052)文明大,≪韓國彫刻史≫(열화당, 1980), 108∼109쪽.
김영태,≪三國新羅時代佛敎金石文考證≫(민족사, 1992), 9쪽.

 1930년 황해도 谷山郡 花村面 蓬山里에서 출토된 辛卯銘金銅三尊無量壽佛 光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구와 善知識 다섯 사람이 돌아가신 스승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무량수불을 만들고, 이 분들이 미륵을 만나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무량수불 즉 아미타불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西方極樂淨土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이라야 교리상으로 타당한데, 오히려 미륵의 兜率淨土를 희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불상의 조성연대로 추정되는 평원왕 13년(571) 당시 고구려인들이 미타정토왕생과 미륵정토왕생을 구분하지 못했다고 일단 보여진다.053)安啓賢,≪韓國佛敎思想史硏究≫(東國大出版部, 1983), 9∼10쪽. 그러나 이들이 서방왕생과 미륵과의 만남을 동시에 원한 것이 아니라, 서방왕생을 원하지만 부득이하면 다음 生에서라도 미륵불의 설법을 듣기를 희망하는 것이라 해석되기도 한다.054)金煐泰,<現存 佛像銘을 통해 본 高句麗 彌勒信仰>(≪蕉雨黃壽永博士古稀紀念 美術史學論叢≫, 通文館, 1988), 445∼449쪽. 어쨌든 이러한 형태의 신앙은 北魏의 그것을 답습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고구려 미륵신앙의 초기 형태이기도 하다.055)위의 글, 449쪽.

 또하나 고구려의 미륵신앙을 보여주는 불상명문으로 平壤市 平川里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永康七年銘 광배가 있다. 즉 “돌아가신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자 彌勒尊像을 조성하였으니 … 慈氏(미륵)의 三會說法을 만나서…”라는 발원문이 그것인데, 이 광배의 연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 불상의 연대에 대해 논란이 많은 까닭은 명문의 연호가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며, 그렇다고 그것을 고구려의 逸名 연호로 보는 것도056)손영종,<금석문에 보이는 삼국 시기의 몇 개 년호에 대하여>(≪력사과학≫ 1966-4, 평양 ;≪북한의 우리고대사 인식≫ 1, 대륙연구소 출판부, 1991, 340∼359쪽). 현재로서는 성급한 판단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탑에 대해서도 유적 및 문헌을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다. 일제시대에 발굴되었던 평양 淸岩里 寺址는 一名 金剛寺址라고도 한다. 평면 八角의 大基壇을 중심으로 그 동·서·북쪽에 세 채의 건물이 배치되었다. 그리고 기단 남쪽에는 門址로 보이는 건물터가 있다. 팔각기단은 木塔址로서, 그 추정 높이는 약 90미터 정도로 추산되어 황룡사구층탑보다 작지 않은 大塔이었다. 이외에도 城郭圖를 통해 알려진 遼東城塔을 비롯하여, 대동군 上五里 寺址 등의 탑은 모두 木塔이었다. 그리고≪삼국유사≫高麗靈塔寺條를 보면, 이곳의 탑은 팔각칠층 석탑이었다.057)≪高句麗の文化≫(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편, 呂南喆 外譯, 1982), 105∼1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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