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2) 백제의 불교
  • (3)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

(3) 백제불교의 일본 전파

 元興寺緣起에 의하면, 聖王이 使者를 일본에 보내어 太子像·灌佛器·≪說佛起書卷≫을 倭國 朝廷에 보냈다고 한다. 이것은 성왕 16년(538)의 일로서, 불교가 일본에 처음 전해진 사적을 말한다고 일본 학계에서는 이해하고 있다.111)田村圓澄,<百濟佛敎史序說>(≪百濟文化と飛鳥文化≫, 吉川弘文館, 1978), 325쪽.≪설불기서권≫은 석가의 傳記이므로 위의 태자상은 곧 悉達太子像이라고 한다.112)田村圓澄,≪古代朝鮮佛敎と日本佛敎≫(위의 책), 85쪽.

 6세기 후반은 威德王(553∼597)의 治世로서 그는 신라의 침공을 막는 데 주력하는 한편 內治에도 힘써 고도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재위 24년(577)에는 경전 외에도 律師·禪師·비구니·呪禁師·造佛工·造瓦工 등을 일본에 보내었다. 재위 30년에는 백제승 日羅가 일본에 건너가며, 31년에는 鹿深臣이 백제로부터 미륵석상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오고, 같은 해에 佐伯連도 불상 1軀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녹심신이 가지고 온 미륵석상은 半跏思惟像이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는데, 이것은 백제에서 반가상을 적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좌백련이 가지고 온 불상은 蘇我馬子가 받아 佛殿에 모시고, 司馬達等과 池邊水田에게 명하여 修行者를 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播磨에 살고 있던 환속한 고구려의 老夫婦, 惠便과 法明을 만나게 되었다. 사마달등의 딸들은 法明을 스승으로 하여 출가하였는데, 善信尼·禪藏尼·惠善尼가 그들이다.113)이들이 俗人 부부에게서 得度出家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惠便과 法明은 이미 法師가 되어 이들을 沙彌尼로 득도시켰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金煐泰,<百濟의 尼衆受戒와 尼僧職 관계>, 위의 책, 381∼385쪽). 이 사적은 일본에 있어서 불교수용이 구체화되는 과정이라고 흔히 일컬어지고 있다. 정식으로 계를 받지 않은 선신니 등은 戒師로부터 계를 받기 위해 소아마자에게 백제에 보내달라고 청하였다. 위덕왕 34년(587)에 일본에 온 백제 사신의 설명에 의하면, 백제에서 비구니가 계를 받으려면 먼저 尼寺에서 10인의 尼師를 청해 계를 받은 뒤 法師의 절에 가서 10인의 법사를 청해 계를 받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백제에서는 비구의 절과 비구니의 절이 서로 종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위덕왕 35년에 백제는 令照律師와 그의 제자 惠聰, 令威法師와 그 제자 惠勳, 道嚴法師와 그 제자 令契의 여섯 승려와 40인의 工人, 그리고 鏤盤師·瓦師 등 一團을 일본에 보냈다. 그것은 受戒에 필요한 승려 및 절을 지을 工人의 파견을 소아마자가 요청했기 때문이다. 소아마자는 이들 백제 기술자의 지도를 받아 尼寺로서 建興寺를, 法師寺로서 法興寺를 짓기 시작했다. 법흥사 造營은 東漢氏의 감독하에 忍海·朝要·鞍部·山西의 4호족을 首領으로 하고 그 사유민에 의해 이루어졌다. 다시 말하면 법흥사 조영의 지도는 백제 기술자가 맡고, 작업을 담당한 사람들은 소아씨의 지배하에 있던 渡來氏族이었다.114)田村圓澄,<百濟佛敎史序說>(앞의 책), 331∼332쪽. 이를 통해 당시 백제불교의 높은 수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위덕왕 37년에 선신니 등은 정식 비구니가 되어 백제로부터 돌아왔다. 위덕왕 40년에 건흥사(豊浦寺)의 금당과 禮佛堂이 준공되었고, 마침내 그 3년 뒤에는 법흥사 탑이 준공되었다. 건흥사도 그러한 예이지만, 佛寺를 짓는 데 있어 먼저 탑부터 세우는 것은 백제의 佛寺造營 방식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고구려 승려 慧慈와 백제승 慧聰 두 사람은 일본 최초의 法師寺인 법흥사에 모셔졌고, 이후 법흥사는 일본에 있어 佛法興隆의 중심지가 되었다.

 무왕 3년(602)에 백제승 觀勒은 曆本·天文地理書·遁甲方術書를 가지고 일본에 갔다. 야마또 조정에서는 書生 數人을 뽑아 각각 역법, 천문 및 둔갑방술을 배우도록 했다.115)≪日本書紀≫권22, 推古天皇 10년. 이 기사를 두고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백제에서는 승려가 불교 이외에 陰陽道에 관계되는 학문을 修得했다. 둘째 관륵이 체득한 학문은 제자에게 敎授할 정도로 높은 수준이었다. 셋째 일본에서는 曆學을 포함해서 陰陽道를 그 후 정부의 독점하에 두고 局外者가 이러한 것들을 운용하거나 敎授하는 것은 금지되었는데, 승려가 역학 등을 배울 수 있었던 백제에서는 승려와 정부 내지 궁중과의 관계가 밀접했다.116)田村圓澄, 앞의 책, 340쪽.

 그로부터 22년 뒤에 관륵은 일본 최초의 僧正職에 올랐다. 한편≪本朝高僧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백제 사람들은 三論을 연구하였고, 外學에도 통달하였다(≪本朝高僧傳≫권 1, 百濟國沙門觀勒)

 이즈음은 백제뿐 아니라 중국과 고구려의 불교계에서도 삼론학이 일반적으로 유행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다음 사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승 慧灌은 일본의 제2대 僧正으로 임명되었는데, 일본 삼론종의 시조였다. 그러나 관륵·혜관 모두 자신들의 전공인 삼론 철학을 일본에서 강의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일본 불교학계가 삼론을 이해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륵이 당시의 民度에 맞추어 曆·遁甲·方術 등을 가르쳤던 것은 외국승으로서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117)金東華, 앞의 글(1962), 73∼74쪽. 그리고 이즈음 일본의 僧官制度가 승정을 중심으로 하는 南朝系였던만큼 백제의 승관제도도 남조계였다고 추측된다.118)金煐泰,<百濟의 僧職制度>(앞의 책, 1985), 44∼54쪽.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