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3) 신라의 불교
  • (1) 불교의 전래

(1) 불교의 전래

 신라 불교전래에 관한 原史料로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金大問의≪鷄林雜傳≫인데,≪삼국사기≫·≪삼국유사≫·≪해동고승전≫에 모두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신라 눌지왕(417∼458) 때 고구려로부터 沙門 墨胡子가 一善郡(경상북도 善山) 毛禮의 집에 와 있었는데, 梁(502∼557)나라 사신이 가지고 온 香의 용도를 일러주었으며, 왕녀의 병도 고쳐주었다는 것이다. 4세기말 이래 신라가 고구려에 종속적인 외교관계를 긴밀히 유지했던 사실로 보면, 눌지왕대에 처음 불교가 전해졌다는 기사는 타당할 것이다. 다만 위 기사는 고구려와의 접경을 통하여 불교가 민간에 전해졌던 사실이 傳承으로 잘 남아 있는 경우일 뿐이며, 유물·유적을 통해 보면 고구려와 통하는 또 다른 경로인 경상북도 북부의 영주·안동쪽으로도 불교는 전해졌다.119)秦弘燮,<古新羅時代 佛像樣式 北方傳來の問題>(≪新羅と日本古代文化≫, 吉川弘文館, 1981).

 그리고 신라 왕실이 불교를 접한 시기가 고구려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았음은 5세기 초엽의 신라 왕릉 유물에서 연꽃무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며,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왕족이 직접 가져왔거나 아니면 신라 왕실에 보내어진 것이라 추측된다.120)國立博物館,≪壺杅塚과 銀鈴塚≫(乙酉文化社, 1946). 그러므로 묵호자를 통하여 신라 왕실이 처음 불교에 접했다는 기사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羅濟同盟(433) 이후 신라와 백제 사이의 관계는 외교나 군사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면에서도 밀접하였다. 신라가 先進 불교문화를 고구려를 통하여만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일반적 史實과 부합되지 않는 발상이다. 지방에 숨어 있던 묵호자가 왕실에까지 불교를 포교하였다거나, 이때 시대상으로도 맞지 않는 梁나라 사신이 등장하는 것은 시대와 성격을 달리하는 고구려·백제 두 계통의 불교가 각각 전래된 사실이 하나로 중첩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121)辛鍾遠,<新羅 佛敎傳來의 諸樣相>(앞의 책), 131∼155쪽. 신라는 법흥왕 8년(521)에 백제 사신을 따라가서 梁나라에 처음으로 조공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참작해볼 때, 신라는 백제를 통해 南朝의 불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며, 그것은 외교적 색채가 강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北朝佛敎的 성격이었다고 추정되는, 신라에 처음 전래된 불교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122)종래 신라 초기불교에서 북방불교의 성격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대표적인 글로는 金哲埈,<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下(≪歷史學報≫2, 1952)가 있다.

 한편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사적에 대해서는 阿道(혹은 我道)碑文이 있는데,≪해동고승전≫과≪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미추왕 2년(263)에 아도가 고구려에서 왔는데, 그는 曹魏人 我掘摩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일연은 이 기사에 대하여 시대만 너무 빠를 뿐 아도의 행적이≪계림잡전≫의 묵호자 사적과 비슷하다고 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즉 아도와 묵호자는 동일인이며, 소수림왕 2년(374)에 고구려에 온 아도가 곧 阿道碑의 아도라는 것이다.123)일연의 논평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는 李基白,<三國遺事의 史學史的 意義>(≪韓國史學의 方向≫, 一潮閣, 1978)가 있다.
아도비의 아도는 고구려에 온 전도승 아도와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로는 李丙燾·金煐泰가 있다. 특히 이병도는 아도가 소지왕대(479∼500)에 南中國에서 백제를 거쳐 왔다고 하였다(李丙燾,<新羅佛敎의 浸透過程과 異次頓 殉敎問題의 新考察>,≪學術院論文集≫14, 1975;앞의 책, 647∼649쪽 및 金煐泰,<新羅佛敎初傳者考>,≪東國大論文集≫17, 1978;≪三國遺事所傳의 新羅佛敎思想硏究≫, 新興出版社, 1979, 251쪽).
이 주장은 고구려에 온 아도가 魏나라에서 왔다는 가정 위에서 성립되는 것인데, 일연은 이 점에 대하여 전적으로≪해동고승전≫의 저자 覺訓의 설을 답습하고 있다. 그러나 각훈이 근거하고 있는 자료는 다름 아닌 阿道碑로서, 각훈은 고구려 및 신라의 두 아도를 동일인으로 보고 이미≪해동고승전≫에서 하나의 阿道傳만 둔 것이다. 아도비의 내용은 시대착오가 심하며, 설화적 구성이 짙은 사료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아도는 晉나라에서 왔다는<高麗本記>의 기사가 있으므로,124)≪三國遺事≫권 3, 興法 3, 順道肇麗. 위와 같은 이유를 들어 두 나라의 전도승 아도를 동일시하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다. 다만 생존연대로 보아 고구려에 온 아도가 자신의 말년에 신라에 왔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승려가 아도라고 하는 사료는 아도비밖에 없다.<古記>에 의하면 아도는 正方과 滅垢玭에 이어 세번째로 왔으며, 高得相의 詠史詩에는 아도가 두 번이나 죽음을 당하고 또다시 신라에 온 승려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도는 신라 전도승의 대명사와도 같이 쓰였으므로, 아도를 반드시 初傳僧으로 규정지을 수는 없다.

 소지왕대(479∼500)에 모례의 집에는 몇 명의 승려가 신도들을 상대로 경전을 강의하였는데, 이러한 敎勢는 王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왕실에는 內佛堂이 있고, 이곳의 焚修僧과 宮主 사이에 일어났던 불미스러운 사건이≪삼국유사≫射琴匣條에 보인다. 이 사건은 실은 불교를 비방하는 세력의 모함으로 보이는데, 결국 이들이 처형을 받았다는 것은 왕권강화를 위해 왕실에서 불교를 적극 권장했다고 하는 종래의 주장과 상반된다. 이것은 불교수용에 대해 정치적인 선입견이 일률적으로 통용될 수 없다는 점을 환기시켜준다.

 법흥왕 이전의 불교 실태는 전래 사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공백에 가까운 듯이 생각되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榮州郡 順興의 ‘乙卯年於宿知述干’銘墓 고분벽화에는 羨道 천장에 滿開한 연꽃이 한 송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인접한 또 하나의 벽화고분에는 “己未中墓像人名□□”의 명문과 아울러 연꽃과 연밥 및 서쪽으로 향해 있는 새가 그려져 있다. 於宿墓의 연대는 595년 또는 535년이라 하여 주장이 엇갈리고 있으며, 己未銘 고분에 대해서는 법흥왕 26년(539)설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被葬者의 활동연대는 소위 불교공인의 해(527) 전후가 된다.125)순흥지방 벽화고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조된다.
≪영주순흥벽화고분 발굴조사보고서≫(梨花女大 博物館, 1984).
≪順興邑內里壁畵古墳≫(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86).
金昌鎬,<순흥 기미명 벽화고분의 축조연대>(≪부산시립박물관연보≫11, 1989).
이돈희,<순흥 기미년명 벽화분에 대하여>(≪두산김택규박사화갑기념 문화인류학논총≫, 1989).
≪順興邑內里壁畵古墳 發掘調査報告書≫(大邱大 博物館, 1995).
이것은 법흥왕 자신이 불교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신자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방에도 불교가 공공연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볼 때 막연히 사용되는「公認」의 의미는 축소될 수밖에 없다.126)辛鍾遠,<신라 불교전래의 제양상>(앞의 책), 132∼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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