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3) 신라의 불교
  • (2) 불교공인의 실상

(2) 불교공인의 실상

 일반적으로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해는 법흥왕 14년(527, 정미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해에 이차돈은 처형당하고 興輪寺 창건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러므로 정미년은 공인된 해가 아니라 오히려 박해를 받은 해이며, 실질적 공인 연도는 법흥왕 22년(을묘년) 즉 흥륜사 공사가 재개되던 해라고 보기도 한다.127)李基白,<三國時代 佛敎受容과 그 社會的 意義>·<新羅 初期 佛敎와 貴族勢力>(≪新羅時代의 國家佛敎와 儒敎≫, 韓國硏究院, 1978), 12·82쪽. 이와 같이 이차돈에 얽힌 이야기는 비록 宗敎史話라고는 하지만 여러 가지 모순점이 발견된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 사항을 먼저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첫째 흥륜사는 을묘년에 공사를 재개하여 진흥왕 5년(544)에 비로소 완공되었다는≪삼국사기≫의 기사를 일반적으로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삼국유사≫의 두 군데 註에128)≪三國遺事≫권 3, 興法 3, 原宗興法·阿道基羅. 의하면, 법흥왕 14년에 이미 흥륜사는「始開」또는「草創」되어 있었다. 법흥왕 22년 이전에 흥륜사가 이미 존재했던 것은 蔚州 川前里書石을 보면 분명하다. 즉 그 甲寅題記(534)에 ‘甲寅大王寺中 安藏 許作’이라는 명문이 나오는데, 흥륜사는「大王興輪寺」라고도 불렸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갑인년의 ‘대왕사’는 곧 흥륜사인 것이다. 둘째 이차돈 설화에서는 이차돈의 순교정신을 강조한 나머지 법흥왕 자신의 신앙생활, 즉 잠시 政事를 멈추고 三寶의 노예가 되어 入寺修道한「捨身」의 행적이 퇴색되었다는 점이다. 법흥왕의 사신에 대해서는≪삼국유사≫原宗興法條에 “법흥왕은 절이 완성되자 면류관을 벗고 僧服을 입고는 宮戚을 바치어 寺隷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셋째 법흥왕이 당대에 세운 절이란 바로 흥륜사이며, 이 절에서 법흥왕이 머물렀기 때문에 흥륜사는「대왕사」라고도 불리었다.

 그렇다면 법흥왕이 사신한 시기는 언제인가. 이차돈이 흥륜사 창건에 관련되어 죽음에까지 이르렀다면, 그것은 일반인의 信佛을 우려하는 정도의 차원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차돈 같은 예를 보더하도 이미 이즈음 신라사회에는 독실한 불교신자 또한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차돈의 순교는 왕의 信佛行爲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이 가며, 이 부분이 모호하게 처리된 이차돈 설화는 실은 전반부가 빠진 이야기이므로 위에서 든 세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고 새겨 읽어야 한다.

 법흥왕의 사신과 이차돈의 순교를 前後一連의 사건이라고 볼 때, 이 사건의 全貌는 다음과 같이 이해된다. 법흥왕의 사신은 朝野에 큰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고, 이에 귀족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왕이 주재하였지만, 이즈음 王號는 아직「寐錦」을 칭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므로 법흥왕 자신도 귀족회의 구성원의 한 사람으로서 衆議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왕권이 제한된 사정은 순교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차돈의 죄목은 흥륜사 중창 명령을 전한 것이었다. 귀족회의의 결과 법흥왕의 사신에 대한 비난은 왕의 신변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고, 왕의 信行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이차돈이 처형되는 선에서 일단락되었다.

 帝王의 사신은 비록 개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불교정책과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순교사건으로 말미암아 불교를 크게 일으키고자 했던 법흥왕의 의욕은 일단 꺾였지만, 왕권의 신장에 따라 그것은 부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왕이 명실공히 귀족들 위에 군림하게 되는 것은 현재까지의 사료상「大王」을 칭하기 시작했던 법흥왕 21년(524)부터이다. 그러므로 그 이듬해에 흥륜사 중창 공사를 크게 일으키게 되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순서였다. 이와 같은 과정을 간과할 때, 법흥왕 22년의 흥륜사 중창 공사를 실질적 공인의 해로 보기 쉽다. 그러나 법흥왕 17년(정미년)은 왕 자신이 불교에 대한 태도를 천명한 해이며, 이 해에 조정에서 불교수용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차돈이 순교한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정미년은 신라불교사에서 하나의 기원이 되는 해다.≪삼국사기≫에서 이 해에 “처음 佛法을 행했다”고 한 기사나, 모든 佛敎史書에서 정미년을「興法」의 紀年으로 잡은 것은 법흥왕의 捨身을 정당하게 평가한 역사해석이라고 하겠다. 정미년에 법흥왕이 사신을 했고, 그로 말미암아 이차돈이 희생되었다고 하는 史實은 聞慶<鳳巖寺智證大師碑>(924)에도 잘 나타나 있다.129)지금까지 불교공인의 실상에 대한 논지는 辛鍾遠,<신라 불교공인의 실상>·<6세기 신라불교의 남조적 성격>(앞의 책, 162∼208쪽)에 의거하였다.
불교수용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서 김두진,<불교의 수용과 고대사회의 변화>(≪한국고대사론≫, 한길사, 1988)이 참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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