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3) 신라의 불교
  • (3) 진흥왕대의 불교

(3) 진흥왕대의 불교

 진흥왕(540∼576)은 불교를 國政 및 自國 문화의 지도원리로 채택하여 佛敎國家를 이상으로 삼은 왕으로서, 그것은 인도의 아쇼카왕이나 중국 南朝 특히 梁나라 武帝의 정책을 본받은 바가 많다.130)山崎宏,≪支那中世佛敎の展開≫(淸水書店, 1942), 26∼27쪽.
진흥왕대의 불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金煐泰,<신라 진흥대왕의 信佛과 그 사상 연구>(≪佛敎學報≫5, 1967).
村上四男,<佛敎の朝鮮三國ヘの傳來と新羅眞興王代>(≪アジア文化≫9-4, 1973;≪朝鮮古代史硏究≫, 開明書院, 1978).
그는 말년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고 史書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捨身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인하여 와전된 것이라 추측되며, 그는 재위기간 중 적어도 몇 번이나 사신을 했다고 추측된다.131)辛鍾遠,<6세기 신라불교의 남조적 성격>(앞의 책), 197∼202쪽.
福士慈稔,<新羅에 있어서 佛敎의 受容과 展開 -6세기 王族의 出家를 중심으로->(≪진산한기두박사화갑기념 韓國宗敎思想의 再照明≫, 1993).

 진흥왕은 영토확장을 감행하여 새로 정복한 지역을 巡狩할 때, 많은 인원을 대동하였다. 이때 새긴 기념비 즉 순수비 중 黃草嶺碑나 磨雲嶺碑의 비문에 ‘沙門道人法藏慧忍’이 보인다. 수행한 신하들 가운데 이들 승려의 이름이 맨 처음에 나온다는 것은 그들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를 할 때에는 새로 정복된 지역민으로부터 충성을 약속받고, 왕과 신하는 이들을 보살필 것을 맹세한다. 여기에 승려가 참여하고 있는 것은 會盟의 정신이 불교에 입각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제 불교는 개인의 신앙 차원을 넘어 사회의 새로운 지도이념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진흥왕 11년(550)에 安藏法師를 大書省에, 그리고 惠亮을 僧統(國統)에 임명하였다. 승통 밑에는 大都唯那와 都唯那娘을 두어, 각각 寶良과 阿尼를 임명하였다. 처음으로 僧官制가 실시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즈음의 승통이란 왕이 승려를 우대하기 위한 榮典的 칭호였으며, 승관제 역시 형식적인 데에 지나지 않았다.132)中井眞孝,<新羅における佛敎統制機關について>(≪朝鮮學報≫59, 1971), 91∼92쪽.

 진흥왕은 戰歿士卒을 위하여 八關會를 열었다(572).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팔관회가 호국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在家信徒가 경전에 입각하여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불교수행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신라사회에서 미륵신앙을 처음 수용한 방증으로서 진흥왕대에 팔관회를 열었던 사실을 든다. 그것은 彌勒三部經에 모두 八關(戒)齋를 修習한 공덕으로 도솔천에 왕생하고 또 미륵의 處所에 태어나게 된다는 가르침이 있기 때문이다. 이 팔관회는 고구려에서 귀화한 惠亮에 의해 베풀어졌으므로 신라의 미륵신앙은 고구려로부터 전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 明觀이 佛經論 1,700여 권을 가져왔을 때 그 중에는 미륵 관계 典籍이 들어 있다고 보아, 미륵신앙은 중국 남조를 통해서도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133)金煐泰, 앞의 책(1990), 150∼154쪽.

 이러한 주장에 개연성이 인정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좀더 명확한 자료가 있기 전에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먼저 팔관회의 所依經典이 미륵경이라고 하고 있으나, 국가 차원의 팔관회는 오히려≪佛說齋經≫이나≪奉法要≫에 입각한 儀式으로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한 것이었다.134)辛鍾遠, 앞의 책, 196∼197쪽. 그리고 화랑과 미륵신앙의 결합이 진흥왕대의 왕권과 사회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진흥왕대의 轉輪聖王사상을 들기도 한다.135)金哲埈, 앞의 글, 91쪽.
金煐泰,<新羅 眞興大王의 信佛과 그 思想硏究>(≪佛敎學報≫5, 1967), 71∼79쪽.
즉 진흥왕의 태자 이름이「銅輪」이고, 次子(眞智王)의 이름은「舍輪」혹은「金輪」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동륜」은 一名「東輪」으로도 쓴다. 진지왕의 이름 중「금륜」만을 취하여 태자와 차자의 이름에 순서가 바뀐 듯하다는 지적도 있지만,136)金煐泰, 위의 글, 72쪽. 그런 연유 때문인지「금륜」은 곧「鐵輪」일 것이라는 궁여지책이 나오기도 하였다.137)金哲埈, 앞의 글, 91쪽. 진흥왕의 행적이 전륜성왕의 그것을 방불케 하는 점이 있기는 하지만, 왕족의 이름에서 전륜성왕 사상을 볼 수 있다는 주장에는 수긍하기 어렵다.

 진흥왕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에 유학갔던 승려가 속속 돌아왔다. 먼저 覺德이 진흥왕 10년(549)에 佛舍利를 가져오게 됨으로써, 소위 眞身을 모시게 되어 신앙면에서 차원을 한 단계 높이게 되었다. 특히 陳나라에서 明觀을 시켜 經論 1,700여 권을 보내어 오게 됨으로써(565) 신라는 당시 漢譯 경전의 대다수를 갖추게 되었다.138)史書에 따라 卷數에 차이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辛鍾遠, 앞의 책, 194쪽 참조. 그 후 신라불교는 수용 단계를 지나 독자적 발전을 이루어 갔고, 또한 自國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였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