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3) 신라의 불교
  • (4) 미륵신앙의 양상

(4) 미륵신앙의 양상

 미륵불은 未來佛로서 현세의 석가불이 다 濟度하지 못한 중생을 성불시킨다고 한다. 이 미륵신앙도 所依經典에 따라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나눈다. 먼저 현재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을 믿어 死後 天上에 왕생하기를 희구하는 上生信仰이 있다. 또 하나는 먼 미래에 이 땅이 樂土가 되었을때 미륵이 下生하여 龍華樹 아래에서 세 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제도할 때 참여하겠다는 하생신앙이 그것이다. 그리고 미륵이 출현하는 국토에는 전륜성왕이 나타나 正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한다.

 아래에 몇 가지 사료를 검토해감으로써 中古期 즉 통일 이전의 신라 미륵신앙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眞智王 때(576∼579) 흥륜사 승 眞慈는 언제나 堂主인 미륵상 앞에 나아가, 彌勒大聖께서 花郞으로 化身하시어 이 세상에 오시면 늘 뵈옵고 가까이 모시겠다고 서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한 스님이 熊川 水源寺에 가면 彌勒仙花를 뵐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이튿날 진자는 거기를 찾아가서 京師人이라고 밝힌 용모 단정한 소년의 마중만 받고 그냥 돌아왔다. 그런데 먼저 만난 그 소년이 바로 미륵선화라는 산신령의 말을 나중에 듣고서야 靈廟寺 동북쪽의 나무 밑에서 그 소년을 찾았다. 그의 이름이 ‘未尸’인 것만 알 뿐, 일찍 부모를 여의었고 姓도 모른다고 하였다. 왕은 이 소년을 敬愛하여 國仙으로 모셨고, 그의 風流가 7년 동안 빛났는데 문득 종적을 감췄다(≪三國遺事≫ 권 3, 塔像 4, 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

 위 설화에서 우리는 미륵이 신라에 하생하여 화랑이 된다는 당대의 믿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위 사료에서 간과해서는 안될 점이 있다. 첫째 신라인들 스스로가 현재 미륵의 住處를 백제로 인식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의 신라가 곧 佛國土라는 믿음과는 상당한 時差를 보이고 있다. 둘째 미시랑의 출신이 寒微하고 그 終末도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화랑의 출신 신분이나 사회적 성격이 始終 일정했던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미시랑의 나중 행적이 모호한 점은 아마도 진지왕의 폐위와 관련이 있는 것 같고, 여타 화랑집단과의 알력 같은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139)비슷한 이유를 들어서 화랑집단과 미륵신앙의 결합을 진평왕대 이후로 보는 견해가 있다(福士慈稔,<圓光の世俗の五戒と花郞集團について>(≪印度學佛敎學硏究≫37-2, 통권74, 1989, 644∼646쪽).
≪三國遺事≫彌勒仙花 未尸郞 眞慈師조를 분석한 글로 金煐泰,<彌勒仙花攷>(≪佛敎學報≫3·4합집, 1966)이 있다.

 竹旨郞은 眞平王代(579∼632)의 화랑이었고, 김유신의 副帥로서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를 옮겨본다.

죽지랑의 아버지 述宗公이 朔州 都督使로 부임하러 갈 때, 竹旨嶺에서 한 居士가 길을 닦아주었다. 부임 한 달 후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이미 거사는 죽은 뒤였다. 죽지랑의 부모는 거사의 무덤 앞에 石彌勒像을 만들어 모셨다. 이즈음 죽지랑의 어머니는 胎氣가 있었는데, 거사가 託生한 아이라 하여 출산 후 이름을 竹旨라 하였다(≪三國遺事≫ 권 2, 紀異 2, 孝昭王代 竹旨郞).

 이것은 거사가 환생하여 죽지랑이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여기에 미륵석상이 개재되어 있다. 미시랑 설화를 참고할 때 거사의 무덤 앞에 미륵석상을 안치했다는 것은, 거사가 미륵으로 下生하기를 기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화랑을 하생한 미륵으로 인식한 예로서는 김유신(595∼673)이 15세에 화랑이 되었을 때 사람들이 그 무리를「龍華香徒」라고 불렀다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즉 彌勒信徒라는 뜻이다. 미시랑·죽지랑·김유신의 경우를 종합해보면, “화랑단체가 그 이념으로 삼았던 이상국가란 다름아닌 불교의 理想國家觀인 미륵정토를 구현하는 데 있었던 것으로 龍華樹下 三會의 설법에 値遇하여 왕생을 얻고자 하는 미륵하생신앙이 신라라는 현실 국토에 그대로 龍華三會를 그려보려는 데 있었다.”는140)安啓賢, 앞의 글, 203쪽. 주정은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신라 중고시대의 무덤에 미륵석상을 안치하는 경우가 비교적 많았다면, 죽지랑의 경우 반드시 화랑과 미륵신앙이 직결됨을 보여주는 예로서 적합할지 의문이다.

 彌勒石像이 무덤에 놓여 있는 사례를 보도록 하자.

道中寺 僧 生義는, 어떤 스님이 생의를 南山으로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표시한 뒤 자신이 여기에 묻혀 있으니 파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달라고 하는 꿈을 꾸었다. 이튿날 친구와 함께 그 곳을 찾아가서 파보니 石彌勒像이 나와서 三花嶺에 모셨다. 그는 善德王 12년(643)에 여기에 절을 짓고 살았다(≪三國遺事≫권 3, 塔像 4, 生義寺石彌勒).

 일부 학계에서는 경주 남산 長倉谷에서 옮겨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미륵삼존이 바로 이 미륵상이라고 한다.141)黃壽永,<新羅南山三花嶺彌勒世尊>(앞의 책), 256∼261쪽. 이 미륵은 出土處로 볼 때 원래 古墳의 石室에 모셨던 것이라고 이해되어 왔으나, 그 곳은 始原的 형태의 石窟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42)黃壽永, 위의 글, 255쪽. 그러나 죽지랑이나 뒤에서 볼 調信의 예에서 보듯이 오히려 고분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경주 西岳里 고분에서는 앞·뒷면에 金剛力士像이 새겨진 돌문(石扉)이 나온 예도 있다.143)中吉功,<三國時代の金銅佛>(≪新羅·高麗の佛像≫, 二玄社, 1971), 55쪽. 따라서 고분에는 불상은 물론 神將像까지 모셔진 경우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비록 통일 후의 이야기지만 洛山寺 大悲像 앞에서 꿈을 꾼 調信이 꿈속에서 죽은 아들을 파묻었던 곳으로 찾아가 파보니 돌미륵이 나왔다고 한다.144)≪三國遺事≫권 3, 塔像 4, 洛山二大聖 調信. 그러므로 신라인들이 무덤에 미륵상을 묻는 습속은 드물지 않았고,145)金杜珍은 미륵「仙花」곧「神仙」이란 토착적 巫覡信仰에서 받아들여지는 神格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하였다(金杜珍,<新羅 中古時代의 彌勒信仰>,≪韓國學論叢≫9, 國民大, 1987, 20∼21쪽). 장지훈은 國仙의 무리에 속하는 月明師가 鄕歌만 알 뿐 梵聲에는 익숙치 못하다고 한 점을 들어 화랑도가 불교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또 죽은 사람의 영혼이 童子로 化하여 다시 인간세계로 와서 샤만이 된다는 동북아시아 신화 모티프를 예로 들어, 신라인의 종교관에서 볼 때 미륵은 불교적인 존재로서보다는 샤만적 존재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였다(장지훈,<신라미륵신앙의 사상적 특성>,≪宋甲鎬敎授停年退任紀念論文集≫, 高麗大, 1993). 그것은 죽은 이가 미륵 도솔천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것이었다고 해석된다.146)金煐泰도 죽지랑 설화를 언급하면서, “死者를 위해서 (미륵상을) 安置한 것이라면 兜率生天을 祈祝했다고 볼 것이다.”고 하였다(金煐泰,<新羅 白月山 二聖 說話의 硏究>,≪曉城趙明基博士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東國大, 1965, 58쪽). 그러나 그는 “거사를 생각한 것보다도 다시 자기 집에 태어날 새 생명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生天이나 往生을 위한 뜻이 아니라 하였다. 이와 같은 造像 의도는 삼국불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는 北魏의 미륵신앙이 도솔천 上生에 비중을 두면서도 상생의 대상은 發願者 자신이 아니라 돌아가신 부모 등 死者의 追善을 希求한 것이었다는 신앙 경향147)塚本善隆,<龍門石窟に現れたる北魏佛敎>(≪支那佛敎史硏究≫ 北魏篇, 弘文堂, 1942), 502∼503쪽.과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죽지랑의 부모도 그러한 관행에 따라 거사의 무덤에 미륵상을 모셨을 것이다. 그런데 죽지랑이 화랑이 된 뒤, 미륵하생 신앙자들이 거사 무덤의 미륵상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미륵상생신앙의 단적인 예가 바로 중고기에 많이 조성된 미륵반가사유상일 것이며,148)이에 대해서는 黃壽永,<新羅半跏思惟石像>(앞의 책) 참조. 이것은 현재 도솔천에서 수행중인 미륵보살상이라고 함은 익히 아는 바이다.149)韓相吉은 甘山寺彌勒菩薩造像記(719)를 예로 들어, 亡者를 위해 미륵상을 조성하는 일은 보기 드문 경우라 하였는데, 오히려 중고기 이래의 일반적 현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미륵반가사유상을 미륵하생신앙과 연결시켰다(韓相吉,<新羅 彌勒下生信仰의 연구>,≪伽山李智冠스님華甲紀念論叢 韓國佛敎文化思想史≫上, 伽山文庫, 1992, 327쪽).

 미륵상생신앙과 관련하여 주목을 끄는 자료로서 斷石山 神仙寺 마애불과 그 造像銘記가 있다. 경주 단석산 거의 정상에 부처·보살 및 人物像까지 도합 10軀가 高浮彫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반가사유상은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이렇게 조상을 하게 된 인연과 發願을 적은 것이 조상명기로서 약 20行으로 되어 있다. 이 유적은 중고기의 왕비족인 岑喙部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150)辛鍾遠,<斷石山神仙寺 造像銘記에 보이는 彌勒信仰 집단에 대하여-新羅 中古期의 왕비족 岑喙部->(≪歷史學報≫143, 1994), 1∼26쪽. 銘記의 내용은 滅罪·참회하고 福을 닦아 彼岸(도솔천)에 왕생하여 成佛할 것을 서원하면서, 미륵석상 1구와 보살 2구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들은 미륵하생집단 또는 화랑도와는 분명히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들의 참회주의적 계율관은 이른바 세속오계와 대조적이고, 이들이 정통 梵唄인「新曲」을 부르는 데 반해 화랑도는 향가를 즐겨 불렀다. 따라서 중고기의 미륵신앙을 下生 일변도로 보아서는 안되며, 그 실상은 출신 部나 신앙집단에 따라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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