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3) 신라의 불교
  • (5) 신라 불국토설의 내용과 대두 시기

(5) 신라 불국토설의 내용과 대두 시기

 흔히 신라 불국토설을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대두 시기에 대한 구체적 논의도 아직 없는 실정이다. 진흥왕의 왕자들 이름이 四轉輪聖王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주장이 별로 근거가 없다고 함은 이미 말한 바와 같다. 이 주장과 관련하여 전륜성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시기는 미륵이 하생하는 때이므로, 신라 불국토란 곧 미륵정토라고 이해하기도 한다.151)金煐泰,<신라 진흥대왕의 信佛과 그 사상 연구>(앞의 책), 71∼79쪽.
安啓賢, 앞의 글, 203쪽.
高翊晉, 앞의 책, 36∼37·45∼46쪽.

 한편 진평왕의 이름이「白淨」이고 그 妃는「摩(麻)耶夫人」이므로 석가의 부모 이름을 취하였으며, 진평왕의 아우 眞正葛文王과 眞安갈문왕은 석가 삼촌의 이름을 따서 각각「伯飯」과「國飯」으로 하였다고 주장한다.152)金哲埈, 앞의 글, 92쪽. 그러나 진안갈문왕의 경우를 보면「一云國芬」이라 하였으며「國其安」갈문왕이라고도 하였다. 淨飯王의 아우 斛飯王(Dronodanaraja)은「穀淨」이라고도 번역되지만「국반」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斛飯」·「穀淨」은 모두 意譯이므로「국반」이 될 리가 없다.153)辛鍾遠,<慈藏과 中古時代의 思想的 課題>(앞의 책), 273쪽. 마치 진평왕대가 되면「王卽佛」의 北方佛敎 영향을 받아서 신라가 釋迦 在世時의 불국토를 재현한 듯 설명하고 있지만, 근거는 매우 약하다. 그리고 교리적으로 보더라도 미륵은 未來佛이므로, 진흥왕대의 전륜성왕 시대 다음에 진평왕대의 釋迦族 王名時代가 온다는 것은 先後가 바뀐 것이다.

 이른 시기의 불국토설 즉 적어도 진흥왕대부터 신라가 불국토였다는 근거는 한두 군데 더 있다. 그 하나는 인도 阿育王(아쇼카왕)이 丈六尊像 鑄造에 실패한 뒤 南閻浮提·중국 등 수천 나라에서도 이루지 못한 것을 신라에서 성공하여서 모셔 놓은 것이 황룡사장육존상이라는 것이다.154)≪三國遺事≫권 3, 塔像 4, 皇龍寺丈六. 다른 하나는 迦葉佛宴坐石이다. 이것은 석가불이 來世하기 전에 가섭불이 앉아서 강연하던 돌인데, 이 돌은 황룡사를 창건할 때(553)155)황룡사는 진흥왕 14년에 짓기 시작하여 같은 왕 27년(566)에 완공되었다. 이 절에 대해서는 李基白,<皇龍寺와 그 創建>(앞의 책)이 있다.부터 佛殿 뒤에 있었다고 한다.156)≪三國遺事≫권 3, 塔像 4, 迦葉佛宴坐石. 이 두 靈異에 대해서는 慈藏이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로부터 들었다고 할 뿐 아니라 그 出典이「玉龍集及慈藏傳」이므로 자장으로부터 나온 이야기이다.157)辛鍾遠,<安弘과 신라불국토설>(앞의 책), 243∼244쪽.

 진흥왕 35년(574)에 만들어졌다고 하는 이 불상은 진평왕 6년(584)에 건립된 重建金堂에 모셔졌다. 금당 중건을 시작으로 하여 황룡사구층탑이 세워짐으로써(645) 황룡사의 2次 伽藍造營은 끝났다. 중건금당이 세워지자 황룡사는 비로소 第一國刹로서의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애초의 금당은 거대한 장육존상이 안치될 정도의 규모는 못되었다. 그러므로 2차 가람에 걸맞는 불상을 만든 것이 황룡사장육존상이며, 그것을 鑄成한 시기는 진평왕대라는≪삼국유사≫皇龍寺丈六條의「或說」이 오히려 타당하다. 황룡사장육존상은 인도양식의 불상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신라 불국토설이 대두되던 시기에 이러한 불상이 선호되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158)辛鍾遠, 위의 책, 274∼277쪽.
현재 남아 있는 신라의 아육왕 양식 불상은 대부분 7세기 후반에서 8세기에 걸치는 것들이다(金理那,<皇龍寺의 丈六尊像과 新羅의 阿育王像系 佛像>,≪震檀學報≫46, 1979;≪韓國古代佛敎彫刻史硏究≫, 一潮閣, 1989 참조).
황룡사장육존상이 만들어진 후 그에 대한 유래를 부연한 사람은 자장이었다고 추측된다.

 지금까지 고찰한 바에 의하면, 신라 불국토설은 진평왕대 후반부터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었고, 그것은 진평왕 및 선덕왕 즉 銅輪系159)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고, 진평왕의 딸이 선덕왕이다. 왕권을 불교적으로 신성화·합리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은 護國三寶로160)신라 三寶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있다.
金相鉉,<新羅 三寶의 成立과 그 意義>(≪東國史學≫14, 1980).
압축될 수 있다. 즉 진평왕의 玉帶는 (帝釋)天使로부터 받았다는 것, 忉利天의 딸인 선덕왕이 황룡사구층탑을 세운 것 및 아육왕상이 신라에 와서야 조성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가섭불연좌석까지 포함시키면 신라 불국토설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신라는 먼 과거로부터 불교와 인연이 있는 땅이며, 그래서 도리천·제석천·사천왕의 보살핌을 받아 西天竺(印度)에 못지 않는 불국토 즉 東天竺이라는 것이다.161)이와같은 自尊的 佛國土觀을 간과하면 오히려 이것을 다음 글과 같이 釋種(釋迦族) 意識 또는 釋迦佛信仰으로 보기 쉽다(金杜珍,<新羅 眞平王代의 釋迦佛信仰>,≪韓國學論叢≫10, 1988, 15∼39쪽). 그리하여 그들은 신라를 중심으로 하나의 새로운 세계관을 형성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 또는 신념이 형성된 배경에는 안으로 왕권에 대한 문제가 있고, 밖으로는 삼국이 대치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있었다. 중고시대의 고승은 이와 같은 시대와 사회에 직면하여 자신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한 지식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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