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3) 신라의 불교
  • (6) 중고시대의 고승

가. 원광(541∼630?)

 원광이 처음 중국에 갔을 때는 승려의 신분이 아니라 선진문물을 배우러 간 유학생이었다고 판단된다. 陳나라 황제의 칙허를 얻어 승려가 된 그는 梁 武帝의 師友인 莊嚴寺 僧旻의 弟子로부터 受學하였다.≪續高僧傳≫慧旻傳에 의하면, 혜민이 15세(587) 때 “회향사의 신라 光法師로부터 成(實)論을 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연대상으로 보아 광법사는 원광이 틀림없다. 이와 같이 이름을 날리던 원광은 수나라의 서울 長安으로 가서(589)≪攝大乘論≫을 연구하고, 본국의 요청에 의해 진평왕 22년(600)에 朝聘使 2인과 함께 귀국하였다. 진평왕 30년, 隋나라에 乞師表를 쓰라는 왕명을 받자 원광은 그것이 沙門의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또한 자신은 신라의 臣民이기 때문에 명령을 받들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世俗法과 佛法을 二元的으로 파악하고 있는 원광의 고민을 여기에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태도는 원광 이후 승려들의 적극적인 호국활동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사고는 그가 世俗五戒를 가르칠 때 불교에는 菩薩戒가 있다고 말한 데서도 드러난다. 즉 신라의 청소년들에게 殺生有擇과 臨戰無退를 가르쳤지만 자신에게는 佛法의 길이 따로 있었던 것이다. 진평왕 35년(613)에 황룡사에서 百高座會를 열었을 때, 원광은 거기서≪인왕경≫을 강의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것은 隋·唐代 이후의 호국 즉 밀교적 주술에서 나오는 강력한 法力을 기대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남조불교의 한 특징으로서,≪인왕경≫은 護國經典史上 正法治國思想과 밀교적 治國의 중간적 위치를 차지한다.

 왕은 원광으로부터 戒를 받고 참회하였다. 계율과 참회의 병행은 중국적 대승보살계의 특징으로서, 그 목적은 戒行에 있다기보다 참회에 의해 죄를 소멸하고 현세에서 복을 받는 데 있다. 계를 받은 왕, 즉「菩薩戒弟子」왕이 원광에게 衣食을 손수 마련해드렸다는 일화는 과장이나 꾸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바와 같이 국가와 국왕에 대한 원광의 태도는 梁 武帝 때의 崇佛 태도와 흡사한 것으로서, 원광의 초기 유학시절의 견문은 귀국 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원광의 대중포교 활동으로는 嘉栖寺에서 占察法會를 개최한 것이 유명하다. 그것은≪占察善惡業報經≫에 의거하여 몇 차례의 占擲을 통해 참회함으로써, 衆生心이 본래 깨끗하고 무한한 功德을 갖춘 如來藏임을 自得하고 지장보살의 원력에 의해서 죄를 없애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광은 신라에 여래장사상과 지장신앙을 심어준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그가≪如來藏經私記≫와≪大方等如來藏經疏≫를 지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162)辛鍾遠,<圓光과 眞平王代의 占察法會>(앞의 책), 223∼228쪽.
이외에도 원광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이 있다.
李基白,<圓光과 그의 思想>(앞의 책).
정병조,<원광의 보살계사상>(≪한국고대문화와 인접문화와의 관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최연식,<圓光의 生涯와 思想>(≪泰東古典硏究≫12, 1995).
한편 福士慈稔은 史書에 나타난 화랑들을 볼 때 화랑과 미륵신앙의 결합은 600년 이후가 될 것이며, 세속오계 또한 儒·佛 등 諸思想을 신라의 國是에 맞게 선택한 것이며,≪점찰경≫에「미륵」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우선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원광 이전에 화랑의 이념 중 불교적 요소를 찾기 힘들며, 원광을 미륵신앙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하였다(福士慈稔,<圓光の世俗の五戒と花郞集團について>, 앞의 책, 132∼134쪽 및<新羅圓光法師傳考>,≪羅·唐佛敎의 再照明≫, 大韓傳統佛敎硏究院, 1993, 323∼355쪽). 그러나 지장보살은 미륵이 成佛할 때까지 無佛時代의 중생 교화를 맡는다는 것이 地藏경전 敎說의 공통된 바이며, 뒤에서 언급된 비구니 智惠의 佛殿에 모신「主尊三像」또한 釋迦·地藏·彌勒像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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