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1. 불교
  • 3) 신라의 불교
  • (7) 불교의 대중화

(7) 불교의 대중화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 전도승을 후원했던 毛禮를「毛禮長者」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보아 초창기 포교의 주요 대상은 지방유력자였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王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은 선진문물의 수용이라는 점에서 왕이나 귀족들이 불교를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중에게도 불교는 점차 뿌리를 내려갔다. 불교의 평등주의 이념, 救援이라는 종교적 이상은 피지배 계급의 신앙심을 일으키기에 족했다. 治者의 입장에서도 나라 사람들이 새로 들어온 고등종교의 가르침에 의해 권력에 길들여지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을 것이므로, 계율 등 일부 敎說의 전파에 적극적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진평왕 때에 安興寺의 비구니 智惠도 점찰법회를 열었다. 지장보살은 땅 속에 감춰져 있었던 것을 인격화한 보살이라는 점에서 여래장 敎義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智惠가 지은 佛殿의 지장보살상은 仙桃聖母 즉 산신의 神祠 밑에서 캐낸 금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불교의 보살과 재래신앙의 산신이 이렇게 맺어짐으로써 지장보살이 어떻게 친근하고 쉽게 이해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설화이다.

 같은 점찰법회라 하더라도 원광의 그것은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하는 측면이었지, 민중 속에 살면서 그들과 같은 길을 가는 보살행과는 거리가 있었다. 왕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국가의 輿望을 짊어졌던 고승들이 민중을 멀리하였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일화에 잘 나타나 있다. 남루한 옷을 입은 늙은 거사가 자장을 보고자 하였으나 문전에서 쫓겨났다. 그 거사는 “我相이 있는 자가 어찌 나를 볼 수 있겠는가”하고는 獅子寶座를 타고 가버렸다. 이 거사는 문수보살의 眞身이었다.

 진평왕 때의 승려 惠宿은 國仙 瞿旵公이 사냥 즐기는 것을 나무랐으며, 왕의 부름도 거절하였다. 惠空은 天眞公 하녀의 아들이었는데, 천진공은 그를 聖人이라 하여 존경하였다. 이름없는 절에서 살던 혜공은 거리와 골목을 누비면서 민중교화에 힘썼다. 大安은 언제나 시장바닥에서 밥그릇을 두드리며 “대안, 대안”하고 외쳤다. 왕이 대안으로 하여금 흐트러진≪金剛三昧經≫을 꿰어맞추라고 궁궐로 불렀으나, 그는 이것을 시장에 벌여 놓고 정리하였다. 이와 같이 대중교화에 힘을 쓴 승려들은 권력을 멀리하였고, 쉬운 말로 불교의 뜻을 풀이해주었으며, 간단한 儀式을 통해 신앙생활을 영위하도록 몸소 모범을 보였다.168)불교의 대중화에 대해서는 다음 글이 있다.
金煐泰,<新羅 佛敎大衆化의 역사와 그 사상연구>(≪佛敎學報≫6,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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