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2. 도교
  • 1) 도교의 전래와 수용기반

1) 도교의 전래와 수용기반

 道敎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유교 및 불교와 같이 삼국시대이다. 이들 외래사상인 유불도 3교가 고유신앙사상의 바탕 위에 수용된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국사상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커다란 역할을 미쳐왔다.

 그러나 유불 2교의 公傳이 4세기 후반인데,181)고구려에서 유교의 太學이 小獸林王 2년(372) 건립되었고, 같은 해에 전진에서 불교가 佛法僧 三寶를 갖추어 公傳하고 있다(≪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소수림왕). 도교의 전래에 관한 문헌기록은 7세기에 이르러 확인되고 있다. 즉 榮留王 27년(624)에 당나라에서 파견한 道士가 天尊像을 가지고 와서≪道德經≫을 강론했다는 내용이 있다.182)≪三國遺事≫권 3, 興法 3, 寶藏奉老 普德移庵. 이 중의 도사(교단)·천존상(신앙대상)·≪도덕경≫(경전)은 불교의 佛法僧 三寶와 같이 신앙체제가 갖추어진 도교삼보이다. 여기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도교인 五斗米道를 널리 신앙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정을 전해듣게 된 당의 高祖가 이에 응했다는 사실을 아울러서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는 다만 신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이 함께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183)≪三國史記≫권 29, 高句麗本紀 8, 영류왕조에 唐高祖가 형부상서 沈叔安을 파견하여 왕에게 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王의 작위를 내렸음을 함께 전하고 있다.

 이러한 도교전래와 수용과정을 이해하는 데는 중국에 있어서 도교교단의 형성과 우리 나라에 있어서의 수용기반이라는 두 가지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먼저 중국에 있어서 도교의 성립은 기원 전후에 전래한 불교교단에 자극되면서 옛부터 전해오는 신선·방술·도참·의약·오행 등의 민간신앙 습속에 老莊思想을 가미하여 延命長壽와 道統神仙을 구하는 종교로 조직화되었다. 그러므로 무지·빈곤·질병 등 민중의 현세이익에 대처하면서 結社의 성격을 강하게 지닌다. 그러한 최초의 교단이 후한 말기인 2세기 중엽의 于吉(혹은 干吉, ?∼200)과 張角(?∼184)에 의한 太平道와, 비슷한 시기의 張陵(張道陵, ?∼117)에 의한 오두미도이다.184)窪德忠著,≪道敎史≫(山川出版社, 1977), 112쪽 참조. 오두미도란 입교금으로 5斗의 쌀을 받은 데서 연유한 통칭이며, 교단내에서는 正一敎로 표방해왔다.

 특히 오두미도는≪도덕경≫을 기본경전으로 삼아 교단조직을 갖추고 신도들로 하여금 서로 돕게 하고 형벌을 탕감시키는 등 빈민구호사업을 실시하였다. 노자를 신격화하여 교조로 숭배하면서, 부적을 사른 물(符水)로 질병을 치료하는 등 주술적이며 기복적인 성격이 강한 가르침을 펴나갔다. 이러한 현세이익적인 분위기로 관청의 억압에 시달려 오던 민중의 환영을 받아, 아들인 張衡·손자인 張魯(?∼215∼?)의 삼대에 걸쳐 한중지역에서 거대한 세력을 갖는 교단을 형성하였다. 교단의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창교자 장릉을 天師, 장형을 繼師, 장로를 嗣師로 호칭하였고 따라서 오두미도는 점차 天師道로 불리게 되었다.185)任繼愈主編,≪中國道敎史≫(上海人民出版社, 1989), 34∼37쪽 참조.

 이후 도교는 민중을 응집시키는 세력으로 자리잡으면서 교리·수행·의례·경전 등을 체계화시켜 나갔다. 특히 진의 葛洪(283∼343)은≪抱朴子≫를 지어 수련을 체계화시키고, 북위의 寇謙之(365?∼448)는 오두미도를 新天師道로 재정비하여 불교를 추방하고 국교로 옹립시켰으며, 양의 도사 陶弘景(456∼536)은 많아진 도교경전을 三洞四輔로 정비하는 등의 도교위상이 높아진다. 이렇게 하여 유불 2교와 더불어 3교로 병칭될 정도로 성장한 도교는 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에서도 세력을 신장시켰고, 당나라에 이르러서는 황제가 노자와 같은 李氏임에 착안하여 노자를 황실의 조상으로 받들었다. 영류왕 당시의 당나라는 고조 李淵(재위 618∼626)이 장안에 老子廟를 건립(620)하는 등 도교의 황실신앙화가 터잡히던 시기로 고구려에서도 당나라의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외교경로를 통한 도교의 公傳은 양국우호의 강화라고 하는 정치외교적 성격과 함께 도교교단의 세력이 국가간에 주목을 끌 정도였음을 말해주는 바라 하겠다.

 그런데 도교를 받아들인 우리 나라에서도 수용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흔히 檀君史話에서 찾는데, 단군이 국조로 숭배되는 만큼 문헌기록으로 나타나며,186)檀君史話를 전하는 문헌에는 一然의≪三國遺事≫(1287경)를 비롯하여 李承休,≪帝王韻記≫(1287) ; 權近,≪陽村集≫(1402) ; 鄭麟趾 등,≪世宗實錄≫(1454) ; 權擥,≪應制詩註≫(1461) ; 徐巨正 등,≪東國通鑑≫(1485) ; 李荇 등,≪新增東國輿地勝覽≫(1530) ; 洪萬宗,≪海東異蹟≫(1666) ; 北崖老人,≪揆園史話≫(1675) ; 安鼎福,≪東史綱目≫(1776) ; 李肯翊,≪燃藜室記述≫(18세기) ; 韓致奫,≪海東繹史≫(18세기) 등이 있다. 거기에는 治世觀과 신앙적 성격 등의 사상성이 드러나고 있다. 즉 古記를 통해 확인되는 단군사화는 天帝인 桓因의 서자 桓雄이 弘益人間의 이념을 가지고 천상세계로부터 태백산정 神檀樹 아래에 강림하여 지상세계를 교화하며, 그간에 곰의 화현인 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는데 그가 朝鮮을 개국하며 그 시기는 중국의 堯와 같고, 1,500년간을 통어하다가 중국에서 箕子가 옮에 따라 藏唐京으로 천도했다가 1908세 때에 白岳山 阿斯達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 기본 골격이다.

 도교와 관련해 보면 이러한 단군사화를 중심한 고유신앙에는 일원론적인 仙의 요소와 함께 이원론적인 巫의 요소가 함께 나타난다. 天神族인 환웅족이 배달신앙 즉 광명숭배집단으로서 사람과 산신 등을 넘나드는 모습이 神人合發하는 선의 요소라 한다면, 토템족인 웅녀족이 토속신앙집단으로서 巫祝을 중시하는 모습은 현실기복하는 무의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조인 단군이 君長과 제사장을 겸하고 있는 바에서 이들이 복합되어 나타나며, 이 선과 무가 한국종교의 원형을 이루게 된다.187)柳炳德,≪韓國思想과 圓佛敎≫(교문사, 1989), 6쪽 이하 참조.
한국의 고유신앙에는 Tylor 등이 밝힌 Animism설과 Marett 등의 Manaism설이 공존하고 있다는 논리인데, 선은 Manaism을 이루고 무는 Animism(이것의 신앙행위로서의 Shamanism)을 이루고 있다고 본다.
후일 신라에서 일어난 花郞道의 원류(仙)나188)宋恒龍,<百濟의 道家哲學思想>(韓國哲學會편,≪韓國哲學硏究≫上, 東明社, 1978), 323쪽 이하 참조. 삼국을 비롯한 각 왕조의 국조신앙의 원류(巫)를189)李丙燾,≪韓國史≫古代篇(震檀學會, 1959), 575쪽 참조. 단군사화 내지 고유사상에서 찾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비근한 예라 하겠다. 신라에 한정해 본다면, 전자를 시조 赫居世의 卵生說에서, 후자를 南海次次雄의 巫帝說에서 찾게 되며,190)梁銀容,<統一新羅時代의 道敎思想과 風流道>(한국도교사상연구회 편,≪道敎의 韓國的 受容과 轉移≫, 아세아문화사, 1994), 10쪽 참조. 전자를 수련적인 신선도교, 후자를 민간신앙적인 민중도교의 수용바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李能和는 이러한 문화토양을 도교성립과 관련하여 “예로부터 신선을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黃帝가 崆峒에 있는 廣成子에게 도를 물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진나라 사람 葛洪이 지은≪抱朴子≫에는 황제가 동쪽 靑丘에 와서 紫府선생에게 三皇內文을 받았다고 하였다. 자부선생은 즉 東王公으로서 그가 동방에 있는 까닭에 세상에서 東君이라 이르는 것이다. 壇君은 동방 최초의 임금으로서 壇을 모으고 하늘에 제사하였으므로 단군이라 하며, 그 군자는 동군·帝君·眞君 등 선가의 용어이며 또한 雲中君·湘君 등 신군의 이름과 같은 것이다. 이로 보아 단군이라 함은 仙이라 할 수도 있고 神이라 할 수도 있다.”191)李能和,≪朝鮮道敎史≫(李鍾殷譯, 普成文化社, 1978), 23∼24쪽.고 파악하였다. 蓬萊·方丈·瀛州의 三神山을 각각 금강·지리·한라 등으로 비정해보는192)李能和, 위의 책, 41∼48쪽. 仙鄕意識을 한국인이 계승해 왔던 것 역시 이러한 흐름과 같은 선상에서의 인식이다.

 중국 교단도교의 원류를 일방적으로 우리 나라에서 찾는 데는 좀더 구체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지만,193)도교의 발생논의에 대해서는 鄭在書,≪不死의 神話와 思想≫(민음사, 1994), 63쪽 이하를 참조. 적어도 중국에서 교단체제를 갖춘 도교를 수용하는 기반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른 문화를 수용할 기반이 있었기에 전래과정에서 마찰을 줄이고, 문화의 독자성이 있었기에 중국과는 다른 도교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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