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2. 도교
  • 2) 도교사상
  • (1) 고구려

(1) 고구려

 고구려의 도교사상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그 유행과 함께 특성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도덕경≫의 유포이다. 고구려의 장군 乙支文德(?∼612∼?)이 수나라 장수 于仲文에게 보낸 시에 “귀신과 같은 계책은 天文을 다하였고 妙算은 지리를 통달하였도다. 싸움에 이겨 전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거든 원컨대 그치라.”194)≪三國史記≫권 44, 列傳 4, 乙支文德. 하였는데, 이 중의 ‘만족함 운운’의 구절은≪도덕경≫에서 유래하고 있다.195)≪道德經≫44장. 그렇다면 고구려에는 이른 시기부터 노장사상 내지 도교신앙이 상당히 유행했을 것이며, 이러한 바탕 위에 榮留王 7년(624)의 公傳이 행해진 것이다.

 마지막 왕인 寶藏王대에는 權臣 淵蓋蘇文이 당에 다시 도교를 청하고 있는데, 중국측의 기록에는 “천존상과 도사들을 그들(고구려)에게 보내어≪도덕경≫을 강론하니 왕과 도사와 일반사람들로서 참관한 자가 수천인이었다”196)≪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고 밝히고 있다. 영류왕대의 도교존숭 분위기가 고구려말까지 계속되는 가운데≪도덕경≫은 노장사상을 넘어서 도교의 경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둘째 神仙思想의 유행이다. 고구려에 있어서 신선사상은 특히 고분벽화에 현저하게 나타난다. 집안현 통구의 四神塚·舞踊塚·4호분·5호분·天王地神塚, 강서의 大墓, 용강의 雙楹塚·龕神塚 등 다수이다.197)鄭璟喜,≪韓國古代社會文化硏究≫(一志社, 1990), 250쪽 참조. 고분의 현실 등에 그려진 벽화에는 청룡·백호·주작·현무의 四神圖와 같이 정형화된 것도 있고, 신화적인 내용을 전하는 것도 있다. 이 신화적인 내용을 전하는 신선도에는 선인들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선인들은 용이나 범을 동반하기도 하고, 봉황이나 학을 타고 飛昇하기도 한다. 무용총 등에는 人面鳥가 묘사되어≪山海經≫의 鳥人一體 신화를 전하고 있다.198)정재서,≪동양적인 것의 슬픔≫(살림, 1996), 145쪽 이하 참조. 이들 벽화는 3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당시 신선사상이 널리 유행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강서대묘의 벽화에 그려진 飛仙은 약그릇과 영지버섯을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199)李丙燾,<江西古墳壁畵의 연구-主로 大墓壁畵에 對한 硏究->(≪東方學志≫1, 延世大, 1954), 135쪽 이하 참조. 그것은 신선이 되는 구체적인 방법, 즉 鍊丹術을 형상하므로 고구려에 유행한 신선사상은 좀더 구체적인 도교색채를 갖는다는 말이다. 양나라의 도사 陶弘景은 “생금은 먹을 수 있지만 독이 있어 제련하지 않고 먹으면 사람이 죽는다. …고려(고구려)·부남 및 서역 외국에서 그릇을 만들 때, 모두 연숙하여 먹을 수 있다.”200)陶弘景,≪證類本草≫, 金屑.고 증명하고 있다. 선인을 흠모하거나 동경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연단술을 수련하는 데까지 이르고 있으므로, 고구려에 金丹道敎201)三木榮,≪朝鮮醫學史及疾病史≫(學術圖書刊行會, 1962), 8쪽 참조.가 유행했다는 말은 설득력을 지닌다. 이와 관련해 보면 仙籍에서 고구려 시조인 東明王을 선인으로 그리면서, 단군의 도맥을 계승했다고 보는 시각202)洪萬宗,≪海東異蹟≫, 檀君·東明王傳.
宋恒龍,≪韓國道敎哲學史≫(成均館大, 1986) 30쪽에서는 天帝의 아들 解慕漱가 河佰의 딸 柳花와 결합하여 동명왕이 탄생했다는 卵生說話(≪三國遺事≫권 1, 紀異 2, 高句麗)를 保氣와 聚精을 통한 신선사상적 사유와 상통된다고 본다.
은 고구려의 신선사상을 구체적인 도교의 전개로 보려는 입장이다.

 셋째 三敎等位 도교관의 확산이다. 고구려에서 오두미도의 존재가 확인되는 말기에 이르면 불교와 도교의 대립이 노정되는 가운데 유불도 3교를 대등하게 인식하는 도교관을 드러낸다. 즉 연개소문은 보장왕 2년(643)에 왕에게 당으로부터의 도교도입을 주청하였는데, 그 전말을 보면 “3월에 소문이 왕에게 고하기를 ‘3교는 비유하자면 鼎足과 같으므로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됩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함께 번성하였으나 도교는 아직 성하지 못하므로 천하의 도술을 갖추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사신을 당에 보내어 도교를 구하여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하소서.’ 하니 왕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글을 보내어 청하니 당 태종이 도사 叔達 등 8명에게 노자의≪도덕경≫을 주어 파견하였다. 이에 왕은 기뻐하며 불교사원(僧寺)을 취하여 道觀으로 하였다.”203)≪三國史記≫권 21, 高句麗本紀 9, 보장왕 2년.고 기술되어 있다. 유불도 3교를 국가경영의 이념으로 보기 때문에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나라가 위태롭다는 논리이다. 3교의 조화로운 공존을 통한 치세를 강조한 이른바 三敎鼎足의 治世觀204)梁銀容,<高句麗末 讖書流布에 대하여>(≪印度學佛敎學硏究≫28-1, 1978, 132쪽) 참조. 이는 이후 한국사상사의 주류를 이루는 三敎等位觀이나 三敎合一思想의 연원이라 할 수 있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당시의 도교장려는 불교계와 갈등을 빚어 사상계의 혼란을 초래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盤龍寺의 고승 普德이 도교와 불교가 대치하여 국운이 위태로와지는 것을 딱하게 여겨 여러번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자, 보장왕 9년(650)에 方丈을 날려 백제지역인 완산주 孤大山으로 옮겨간 경우이다. 갈등의 요인에는 왕실이 당나라 도사들에게 사원을 도관으로 제공하고 儒士보다 높은 예우를 베푸는 가운데 도사들이 국내 산천을 돌아다니면서 圖讖을 지어 유포시킴으로써205)≪三國遺事≫권 3, 興法 3, 寶藏奉老 普德移庵. 국론을 분열시킨 데에도 있다. 그러나 어떻든 도교에 있어서는 오래전에 수용된 유불 2교와 대등한 사회적 위치를 확보하는 일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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