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2. 도교
  • 2) 도교사상
  • (2) 백제

(2) 백제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백제는 중국과의 교류가 크게 두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고구려를 통한 간접적인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수로를 이용한 직접적인 경우이다. 그러므로 백제는 불교가 그러했던 것처럼 도교수용에 있어서도 고구려와 시기적으로 비슷했을 터인데, 공식적인 전래의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사서에도 “백제에는 승려와 절과 탑은 많지만 도사는 없다.”206)≪周書≫권 49, 列傳 41, 百濟. 같은 흐름의 기록이≪隋史≫·≪北史≫등에도 나타난다.라 하고 있어서 교단도교적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백제의 기록과 문물을 살펴보면 도교사상이 유행한 흔적을 폭넓게 찾아볼 수 있다.

 첫째 方術의 유행이다. 중국측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다양한 학술이 발전한 가운데 음양오행은 물론 의약·卜筮·占相의 술을 이해하고 있었다.207)≪周書≫권 49, 列傳 41, 百濟.≪北史≫나≪隋書≫등 다른 사서도 같은 사항을 전하고 있다. 백제의 문물은 불교의 日本公傳(538, 일설은 55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에 전해져 일본문화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데,≪日本書紀≫에는 推古天皇 10년(602)조에 “겨울 10월에 백제의 승 觀勒이 本朝에 渡來하여 曆書·천문·지리의 서, 그외 遁甲·方術의 서를 바쳤다. 그래서 서생 3∼4명을 선택하여 관륵 밑에서 학습하게 하였다. 陽胡史의 원조 玉陳은 역법을 배우고, 大友村主인 高聰은 천문·둔갑을 배우고, 山背臣인 日立은 방술을 배워 학업을 다 달성하였다”208)≪日本書紀≫권 22, 推古天皇 10년.고 전한다. 둔갑은 변신술이요, 방술은 의약·천문·복서·점상 등의 도통신선을 위한 잡술이므로 민간도교의 흐름을 말하며,209)都珖淳,<韓國의 道敎>(福井康順외 監修,≪道敎 3-道敎의 傳播≫, 平河出版社, 1983), 78쪽. 위의 중국기록에 나타나는 방술유행 내용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후래의 기록에서 둔갑서 등이 수련도교의 仙籍으로 우리 나라에 전래 상승되며 중시되었던 점을 고려하면210)韓無外,≪海東傳道錄≫(1610)에는 중국 全眞敎의 鍾離權이 신라말의 崔承祐(?∼889∼892∼?) 등에게≪天遁鍊魔法≫등을 전했으며, 그것이 金時習(1436∼1493)-洪裕孫으로 이어지는 조선 鍊丹學派에 전승되고 있음을 전하다. 이러한 서적이 당시 구체적인 학술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찍부터 유서의 5경박사는 물론 의학이나 易學·曆學·卜筮 등에도 각각 박사호칭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런데 이보다 앞서 285∼286년대(일설 405년)에는 박사 王仁이 일본에 건너가서≪논어≫·≪천자문≫·≪효경≫·≪주역≫·≪산해경≫을 전하고, 菟道椎郞子에게 전적들을 가르쳤다.211)權寧遠,<百濟의 崇文精神으로 본 扶餘世系와 儒佛仙三敎思想>(車勇杰 외,≪百濟의 宗敎와 思想≫, 忠淸南道, 1994), 53쪽 참조. 이런 정황으로 왕인 등이 단지 유학자라기보다는 도교적 교양을 겸한 인물이요, 그러한 백제와의 문물교류에 의하여≪延喜式≫의 ‘黃天上帝·三極大君·일월성신’ 등을 대상으로 하는 도교적 색채가 강한 의식 내지 祝詞가 형성되었다고 본다.212)黑板勝美,<우리 나라 상대에 있어서 도교사상 및 도교에 대하여>(≪史林≫8-1) 초록을 참조. 이후에도 백제를 통해 呪禁師 등이 일본에 건너가 관료 등으로 활약하는 기록이 산견되는데,213)中村璋八,<日本의 道敎>(福井康順외 監修, 앞의 책), 9쪽 이하 참조. 그렇다면 백제에는 일찍부터 유행한 방술이 후래에까지 전승되면서 도교적 흐름을 형성했으리라 생각된다. 방술이 구체적인 수련도교의 이해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것의 유행은 교단도교적인 조직이 없는 백제에도 수련도교의 練丹逸士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214)宋恒龍은 “도가사상은 있어도 도교신앙은 두드러지지 않았다”고 보았으나(宋恒龍,<道敎信仰의 展開樣相과 生活世界>,≪韓國思想大系≫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374쪽), 申東浩는 “修鍊道士가 없었다면 그 어려운 방술을 어떻게 터득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하여 교단에 소속되지 않은 도사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申東浩,<百濟의 道家思想>, 車勇杰 외, 앞의 책, 272쪽).

 둘째는 도교사상 내지≪도덕경≫의 유포이다. 近肖古王(346∼375)대에 고구려군이 침입하자 近仇首太子가 대항해 싸워 대파하고 고구려군을 쫓아 진격하자, 장군 莫古解는 “일찍이 듣건대 도가의 말씀에 ‘만족함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바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얻은 바가 많은데 하필 많은 것을 구하려 하십니까.”215)≪三國史記≫권 24, 百濟本紀 2, 근초고왕.라고 간하여, 태자를 설득하고 회군케 하였다. 이는 후일 고구려의 장군 乙支文德이 수나라의 于仲文에게 전하는 말과 같은≪도덕경≫의 구절로, 이후 고구려나 백제의 무장들 사이에 이러한 가르침이 성행하여 백성의 덕성을 훈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문화의 한 전형으로 일컫는 무령왕릉에서는 도교사상과 관련된 지석, 곧 買地券이 발견되었다. 무령왕(501∼523) 부처의 사후에 葬地를 매입하여 장사를 지냈다는 내용인데, 이 매지권은 중국에서 도교사생관에 입각하여 마련하던 사후세계에 대응한 문서이다. 왕릉 발굴 당시(1971) 지석 위에는 동전꾸러미가 놓여 있어 산신에게 장지대금을 치렀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216)李錫浩,<道敎思想史>(鄭柄朝·李錫浩,≪韓國宗敎思想史≫1, 延世大出版部, 1992), 236쪽 참조. 그렇다면 백제에서는 도교사상이 매우 널리 유행했다는 말이 된다.

 셋째는 신선사상의 성행이다. 백제에 있어서 신선사상의 자취는 우선 와당과 향로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각종 文塼 가운데 山景文塼에는 品자형의 세 봉우리가 중첩하여 있고 신선상 같은 인물이 그려져 있어 삼신산과 도관 및 도사를 표현한 것이라 볼 수 있으므로 신선사상 내지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17)李丙燾, 앞의 책, 588쪽 참조. 山水鳳凰문전은 물론 봉황문전·蟠龍문전 등도 같은 흐름이다.

 특히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1993)된 金銅龍鳳蓬萊山香爐는 삼신산 등을 중첩하여 표현한 博山香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박산향로는 당시의 산악숭배, 무속, 不老長生의 방생술과 양생술, 無爲思想, 陰陽思想 등을 쫓는 신선사상이 조형적 배경”218)국립부여박물관 편,≪백제금동향로와 사리감≫(1996), 11쪽.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方格規矩神獸文鏡의 명문에 주목하게 된다. 거기에는 “위에 仙人이 있으니 늙음을 모르네, 목마르면 玉泉의 물을 마시고 시장하면 대추를 먹으니 수명이 金石과 같도다”219)鄭璟喜, 앞의 책, 207쪽 참조.라 하여, 신선사상의 폭넓은 유행을 말해주고 있다. 무왕 35년(634) 왕이 궁성 남쪽에 못을 파고 방장산을 본떠 섬을 만들고 있는 것220)≪三國史記≫권 27, 百濟本紀 5, 무왕.도 같은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신선사상이 방술이나≪도덕경≫의 유행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다만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도교적 삶의 양태를 표현하는 특징이 드러난다. 예컨대 봉래산향로의 그림이 신선사상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양생술을 전개하고 있으며, 동경의 명문에서도 선인에 대한 열망과 함께 물·대추 등의 약물을 복용하므로써 장생한다는 구체적인 방법에까지 접근하고 있다. 백제의 도교가 불교승가처럼 강력한 교단도교의 체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연단수련 등 구체적인 도교의 요소는 뚜렷이 보이며, 가치관이나 사상체계에서부터 생활문화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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