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Ⅱ. 불교와 도교
  • 2. 도교
  • 2) 도교사상
  • (3) 신라

(3) 신라

 신라는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경유하지 않고는 중국과 교역이 불가능했던 관계로 각종 문화의 전래가 삼국 중에서 가장 뒤졌다. 백제지역에는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마한세력이 남하하면서 온존하고 있었으므로 옛 馬韓地域의 蘇塗信仰 등 고유신앙적인 요소보다는 불교신앙 등으로 체계화된다. 이에 비하면 신라는 역내에 존재하던 변한 등의 세력이 일찍이 소멸되어, 고유신앙적 흐름을 계승하기 용이했던 모양이다. 후술할 風流道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선인적 요소와 불교수용을 거부하는 古神道的 신앙체계가 그것이다. 신라에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교단도교가 전래된 흔적은 밝혀지지 않지만, 그러한 문화토양을 전제로 하고 보면 신라에 도교사상이 폭넓게 유행했으며, 그것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으로 나누어 파악할 수 있다.

 첫째≪도덕경≫및 노장사상의 유행이다. 신라에≪도덕경≫등의 도가서가 전래된 기록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 나타나지만,221)≪三國史記≫권 9, 新羅本紀 9, 효성왕조에는 효소왕 2년(738)에 당의 사신 邢璹가≪도덕경≫등의 서적을 왕에게 바치고 있다. 지식층 사이에는 훨씬 이전부터 유포되어 있었다. 자비왕(458∼479)대의 百結은 榮啓期를 사모하여 청빈함을 즐겼다고 한다. 그는 이웃집에서 떡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오자 아내에게 “죽고 사는 것에는 명이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다. 그것들이 닥쳐올 때 막아서는 안되고 그것들이 갈 때 쫓아가서도 안된다. 너는 무엇을 슬퍼하는가. 내가 너를 위해 절구찧는 소리를 내어서 위로해 주겠다.”222)≪三國史記≫권 48, 列傳 8, 百結先生.고 말하면서 거문고를 켜 아내를 위로했다고 한다. 이는≪列子≫223)≪列子≫天瑞篇.에 나타난 영계기의 고사에 의한 것으로, 自寬自樂하는 삶의 모습이 신라에 영향을 미쳤음을 뜻한다.224)車柱環,<統一新羅時代의 道家思想>(韓國哲學會 편, 앞의 책), 268쪽 참조.

 진평왕(579∼632)대에 활동한 지증왕의 증손 金后稷은 임금이 사냥에 탐익하는데 대하여, “노자는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225)≪三國史記≫권 45, 列傳 5, 金后稷.라는 말로 간하고 있다. 이는≪도덕경≫12장에 나타난 감각적 욕망의 절제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金仁問(629∼694)의 행적에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유가의 책을 많이 읽었고 아울러 노장과 불교의 학설까지 널리 섭렵하였다.”226)≪三國史記≫권 44, 列傳 4, 金仁問.고 전한다.≪도덕경≫을 비롯한 노장사상이 폭넓게 유행했다는 말이다.

 둘째 노장사상의 유행과 함께 전개된 道佛會通 내지 三敎會通思想의 확산이다. 김인문과 같은 시기의 고승 元曉(617∼686)를 예로 들면, 그는 수학과정에서 佛敎內典 외에도 讖書에 이르는 外家書를 두루 섭렵하고 있는데,227)<誓幢和上塔碑>에는 “王城西北有一小寺□讖記□□外書等見斥於世□”이라 하였는데, 이는 儒道典籍은 물론 참서 등 세상에서 배척받는 外家書까지도 섭렵한 것으로 해석된다(梁銀容,<韓國圖讖思想史에 있어서 元曉大師>, 金知見 편,≪元曉聖師의 哲學世界≫, 民族社, 1989, 170쪽 참조). 그러한 사항이 저서 속에 회통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노장적인 것에 한해 보더라도 주저인≪金剛三昧經論≫에서는 제목을 해석하면서 “因에는 功用이 있으나 果에는 공용이 없으니 덜고 또 덜어 無爲에까지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228)元曉,≪金剛三昧經論≫(≪韓國佛敎全書≫1, 東國大出版部, 1979, 606쪽).라고 하였다. 이는≪도덕경≫의 “학문을 하면 날로 더해가는 것이요, 도를 닦으면 날로 덜어진다. 덜고 또 덜면 무위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도 없는 것이다.”229)≪道德經≫48장.라는 내용의 연역이다.

 그의≪大乘起信論疏≫에서도 대승의 宗體를 논하면서 “杜口大士와 目擊丈夫가 아니면 누가 언어를 초월하여 대승을 논하겠는가.”230)元曉,≪大乘起信論疏≫(≪韓國佛敎全書≫1, 698쪽).라고 말하고 있다. 두구대사는 침묵의 설법을 했다는 維摩居士를 가리키며 목격장부는 눈만 마주쳐도 도를 안다는≪莊子南華經≫의 어귀이다.231)≪莊子≫, 田子方 25.「금강삼매」를 인위를 넘어선 무위의 경지로 해석한 것이나,「대승」을 언어를 떠난 개념으로 승화시키는 논리가 다같이 불교이념을 노장사상의 핵심인 무위와 회통시키고 있음이 엿보인다. 이 밖에도 그의 저술에는 불교이념을 노장사상과 대비하여 해석한 곳이 산견되는 것을 보면,232)예컨대≪대승기신론소≫의 “以善淨十善業爲輻 以淨功德資糧爲轂”(≪韓國佛敎全書≫1, 734쪽)은≪도덕경≫11장의 “三十輻共其轂 當其無 有車之用”을 연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효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서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그러한 의식이 확산되었던 것으로 이해되며, 풍류도에 나타나는 3교회통의 논리도 같은 선상에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셋째 신선사상의 유행이다. 시조인 朴赫居世를 仙人으로 그리고 있는 것을 후래인들의 재정리라고 하더라도,233)洪萬宗,≪海東異蹟≫, 朴赫居世傳 등. 그 원류가 될 만한 사료가 적지 않아서,234)≪三國史記≫권 12, 新羅本紀 12, 경순왕.
≪三國遺事≫권 5, 感通 7, 仙道聖母隨喜佛事.
신라사회에는 일찍부터 신선사상이 비교적 널리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實聖王 12년(413) 8월, 경주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이는 것을 보고, “왕은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仙靈이 내려와 노는 곳이니 그 곳은 당연히 福地일 것이다’고 말하고, 그로부터 누구도 그 곳에서 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명하였다.”235)≪三國史記≫권 3, 新羅本紀 3, 실성니사금.고 전한다. 선령과 복지가 상관개념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 이들이 도교적 신선계를 상징하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처럼 고유신앙까지를 섭렵하면서 이루어진 풍류도는 이와 같은 신선사상이 유행하는 기반 위에서 비로소 형성 가능했을 것이다. 최근에 발굴 공개된 金大問(?∼704∼?)찬의≪花郞世紀≫를 분석해 보면 풍류도는 호칭이나 조직이 시대를 따라 다양하게 변하고 있다. 법흥왕(514∼540)대에 여자로 源花를 삼다가 남자를 뽑아 花郞으로 바꿔 불렀는데, 그 우두머리인 風月主의 제1세인 魏花郞이 진흥왕 원년(540)에 취임하였으며, 眞智王 3년(578)에 원화제도가 부활되는 등의 과정을 거쳐 신라말에까지 계승되고 있다.236)梁銀容,<統一新羅時代의 道敎思想과 風流道>(앞의 책), 15쪽 이하 참조. 그 성격은 서문의 ‘화랑은 仙徒’라는 명제에서 분명하며, 풍월주의 찬에서도 “살아서는 선도요, 죽어서는 부처로다. … 國仙으로 화랑이 되어 우리 國風을 크게 진작하였도다.”237)金大問,≪花郞世紀≫, 魏花郞·文弩. 등의 같은 흐름이 나타난다. 당시 사람들은 여기서 말하는 선과 신선사상을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풍류도에는 龍華香徒로 호칭하는 것과 같은 불교 등과의 관련이 있다. 그런 풍류도의 사상성을 신라말의 문호 崔致遠(857∼?)은<鸞郞碑序>238)≪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에서 3교의 敎旨를 두루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다. 3교회통사상이 여기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의 도교는 교단적인 조직을 이루지는 않았으나 그 영향력은 유불 2교와 비교되는 위치로 파악된다. 고구려와 같은 시기에 신라에서도 3교정족의 치세관이 확립되고 있었다는 말이다.

<梁銀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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