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Ⅲ. 유학과 역사학
  • 1. 역사개념의 출현

1. 역사개념의 출현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은 자연의 변화와 밀접히 연결되었다. 그들의 생활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평상적으로 반복되는 것이었고 이런 평상적인 경험은 아버지로부터 자식에게 전승되었다. 그러다가 인간의 활동이 획기적으로 다양해지게 되는 때는 청동기시대부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그들의 활동범위가 넓어졌으며, 사회가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구분될 정도로 분화되었으며, 다른 집단과의 전쟁도 일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일상적인 생활만이 아니라 다른 정치적 사회적 활동이 다양해지면서 인간은 이를 기록해두는 문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상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청동기시대에 거의 대부분의 문자가 만들어지는 것은 우연한 일치가 아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문자를 필요로 한 까닭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당시 자연에 대한 제사날을 기록하기 위하여, 농사를 위한 계절과 자연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하여, 또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남기기 위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청동기문화는 외부로부터 전래되었다. 이는 중국계통의 것이 아니라 북방 스키타이계통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청동기문화가 수용된 후 오랜동안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의 독자적인 문자가 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리 나라의 독자적인 문자가 생기는 과정에서 중국의 한자문화가 철기문화와 함께 전래함으로써 무산된 것인지 아니면 문자가 생기기 전에 한자가 도래하였는지는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청동기시대에 조각된 울주 반구대의 암각벽화에는 분명히 기호표시가 보이고 있음을 통하여 문자생성의 단계를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고유한 문자가 생기려는 단계인 청동기시대 중기에 철기문화가 중국으로부터 수용됨과 더불어 중국의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한자의 전래로 인하여 독자적인 문자의 생성이 완성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역사기록의 필수요건은 문자이다. 고유한 문자를 발명해 냄에 실패한 한민족은 중국의 한자를 수용하여 썼다. 한자는 기원전 4세기경에 중국의 철기문화의 수용과 함께 고조선에 전래되었다고 생각된다. 고조선의 八條禁法이 비록 성문법이 아닌 관습법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법조문이 형성되었다면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자의 보급은 漢四郡이 설치될 무렵 이후로부터 고구려가 건국된 기원 전후로 여겨지며, 신라의 경우 5세기 말엽의 迎日郡 冷水里 비문을 통하여 3∼4세기 전후에는 한자의 사용이 가능하였다고 여겨진다. 백제의 경우 한자의 보급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한사군을 통하여 신라보다 먼저 한자를 수용하였다고 판단된다. 3세기 후반인 고이왕 때에 율령제가 도입된 것으로 보아 2세기말에는 한자의 사용이 보편화된 것으로 짐작된다.

 역사기록의 또 하나의 요건은 冊曆이 보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역사기록에는 년과 달, 날짜가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 초기 책력의 수용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중국의 책력이 수입되어 사용되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역사기록을 남기는 정치적 배경으로는 정치체제의 확립과 왕권의 강화를 들 수 있다. 왕권의 강화는 정복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영토를 확장하면서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인근의 다른 부족을 많이 정복하고 영토를 크게 확장하면서 강화된 왕권에 의하여 자신의 업적을 기록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기록을 남기지 못한 선사인들도 역사라는 개념은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들의 역사개념은 자연중심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의 의식주 생활이 자연과 밀접하게 관련되었다는 점과 아직 자연에 대한 무지 등이 자연중심적 역사관을 갖게 된 중요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즉 풍흉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고 이는 자연신의 작용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하였다. 부여 등에서 흉년이 들면 왕을 죽였다는≪三國志≫魏書 東夷傳의 기록은 왕이 이에 대한 책임을 졌다는 사실을 반영하여 주는 것이다. 이는 왕이 自然神239)이들이 숭배한 自然神 중 최고의 신은 하늘님이었고, 태양·산천과 바다·강 등의 자연신이 있었다.을 경건하게 숭배하지 않음으로써 그런 결과를 초래하였다고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 결과를 인간의 의지나 노력으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의 힘에 의하여 좌우된다고 믿었다. 이 점이 바로 선사시대인들의 역사관의 중요한 특징이다.

 그들의 역사내용은 축적된 경험을 후세에 전달한다는 의미를 또한 가졌다. 그러나 이는 일상생활상의 경험이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갖는 경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역민들의 共同祭祀, 자연의 변화, 그리고 공동체의 영웅이었던 인간의 출생과 계보가 주를 이루었다. 중국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공통적인 특질을 국가마다의 전국민이 참여하는 제사와 그리고 음주가무로 본 것은 부족마다의 공동제사가 얼마나 중시되었는가를 알게 하여준다. 선사시대의 역사내용은 구전되었음으로 설화적인 성격이 강하다. 설화이기 때문에 장소와 일시가 구체적이지 못하고 구전되는 동안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였다. 이 점은 기록을 정확히 남기는 역사시대의 기록과 구별되는 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역사의식을 찾을 수 있는 자료로는 비록 후대의 기록이지만 檀君神話를 들 수 있다. 이 단군신화에서 天帝의 아들이 내려와 동물을 인간으로 만드는 창조적 내용과 쑥과 마늘을 먹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원시사회 성년식의 모습, 농경의 중요성, 신에게 기원하는 고대의 종교적 행위, 제정일치사회의 모습, 토템사상, 도읍의 중시사상,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 천제가 인간생활을 보살펴 주고 있으며, 이를 인간이 숭배한 사상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리 나라 신화는 시조가 모두 천제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성을 갖는다. 천제에 대한 구체적 신앙은 고구려의 경우 태양임을 확인할 수 있다.240)<廣開土大王陵碑>와<牟頭婁墓誌銘>에 보이고 있다(盧泰敦,<高句麗의 歷史와 思想>,≪韓國思想史大系≫2-古代篇,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1, 18∼19쪽). 그리고 천제와 地神의 결합을 보여주는 내용이 東明聖王신화에서 찾아진다. 천제의 아들과 河伯女의 결합을 들 수 있다. 고구려에서 말기까지 시조신과 하백녀인 국모신, 그리고 천제에 대한 제사와 신앙이 행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241)≪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 10월의 국중대회인 동명제에는 국왕이 참여하여 직접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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