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Ⅲ. 유학과 역사학
  • 3. 삼국의 유학

3. 삼국의 유학

 유학이란 고대 중국인의 오랜 생활방식과 문화전통을 孔子와 孟子가 학문적인 체계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유학은 유교라고도 부르지만 유학은 학문적인, 사상적인 것을 주목하여 지칭하는 것이고, 유교는 교화적·祭禮的 의미를 지닌 것으로 개념상 약간 다르다고 할 수 있다.242)李丙燾,≪韓國儒學史≫(亞細亞文化社, 1987), 1쪽. 그러나 그 사상적 내용은 같은 것이다.

 이 시기의 유학의 전래는 토속적인 전통 생활방식과 구별되는 외래사상이었다. 우리 나라에 유학이 수용될 때에 수용계층이 지배층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반발이나 물의가 없이 순탄하게 하나의 고급문화의 수용으로 전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유학은 우리 나라 역사와 시기를 거의 같이하면서 19세기 말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 점에서 유학은 우리 고유사상과 생활습관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또한 외래문화 중 유학처럼 오랜동안 우리 생활을 규제하고 영향을 미친 사상도 드물다.

 그러나 당시 유학은 불교나 기독교처럼 새로운 종교가 아니라 생활윤리였으므로 쉽게 적용될 수 있었고, 우리의 생활윤리 중에 유학의 근본 가르침과 공통된 부분이 유학전래 이전부터도 존재하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부모에 대한 효, 형제의 우애 등은 인간의 보편적인 덕목이 중국문화 수용 이전의 전통사회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즉 忠·孝·仁·義라는 덕목이 지목되고 규정된 것은 유학의 전래로 인하여 확연해진 것이지만 이런 덕목의 내용은 유학수용 이전의 우리 사회에서도 있어 왔던 것이지 새로이 창출된 개념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전통시대의 역사서를 통해 보면 箕子가 우리 나라에 와서 팔조의 금법 등을 실시함으로써 교화가 시작되었다는 데에서 중국의 유학이 전래한 것으로 오랫동안 믿어져 왔다. 이 설에 따르면 殷나라의 현신인 기자가 은나라가 망하고 周나라가 건국되자 동쪽으로 우리 나라에 와서 고조선을 통치하였는데 주나라 武王은 그를 朝鮮侯에 책봉하여 한국의 유교문화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 설은 고려조에 들어와서 유학이 발달하면서부터 그 정통성을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중국문헌의 기록243)이에는 세 종류의 중국문헌 기록이 바탕이 되었다. 즉≪尙書大傳≫,≪史記≫宋微子世家,≪漢書地理志≫燕條의 기록을 들 수 있다.을 토대로 정립되어 평양에 기자의 사당을 짓고 이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가 이루어졌다. 그 후 조선조에 와서 기자의 東來說과 유교문화의 창시자로서의 위치는 더욱 확고하게 굳어졌다. 즉 고려 仁宗 23년(1145)에 편찬된≪삼국사기≫로부터 조선 초기의≪高麗史≫·≪三國史節要≫·≪東國通鑑≫, 조선 후기 安鼎福의≪東史剛目≫에 이르기까지 이 설은 확고하게 서술되었다.244)좀더 엄격하게 말하면 관찬사서로서 이 설을 기술하고 있는 것은 1894년에 학부에서 편찬한≪東國史略≫까지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기자에 대한 모든 기록들이 집대성되기에 이르렀다.245)尹斗壽의≪箕子誌≫와 李珥의≪箕子實記≫등이 그 대표적 저술이다. 그리고 평양을 방문한 많은 문인들이 이에 대한 시를 지었고 여러 사람의 칭송의 대상이 되었으며(海東樂府), 韓百謙은 기자의 井田 遺制가 평양에 남아 있다는 설을 제기하였으나 崔錫鼎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한국에 근대사학이 확립되어 기자가 동래하여 고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설이 제기된 후246)李丙燾,<「箕子朝鮮」의 正體와 소위「箕子八條敎」에 대한 新考察>(≪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1976), 47∼56쪽 참조. 현재에는 기자의 동래설은 완전히 부정되기에 이르렀다.247)李丙燾,<在來 所謂「箕子朝鮮」의 正體와 周圍 諸宗族 및 燕 秦 漢과의 關係>(≪韓國史≫古代篇, 震檀學會, 1959), 92∼114쪽. 따라서 오늘날 기자의 동래설을 신봉하는 학자는 없다. 이는 토착민이었던 한씨조선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漢文化의 일부인 유학이 한국에 전래한 것은 秦漢交替의 혼란기에 중국측으로부터 밀려온 많은 유이민들을 통하여 한자문화의 전래와 함께 들어왔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248)郭信煥,<儒敎思想의 展開樣相과 生活世界>(≪韓國思想史大系≫2-古代篇), 394쪽. 한사군이 설치된 후 이곳은 중국문화 수용의 기지였다.

 고구려의 유학 : 고구려는 玄菟郡으로부터 관복과 衣幘을 받아오곤 하였으며249)≪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高句麗. 현도군이 축출된 후에는 평양지방에 설치되어 400여 년간 지속된 樂浪郡이 유학수용의 기지였다. 문자를 가진 중국문화는 종래의 우리 토착문화에 비하여 선진이었고 지배층의 권위를 확립함에 유용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처음부터 민간을 통하여 우리의 토착사회에 들어온 유학은 우리의 전통윤리와 문화를 승화시키는 데에 기여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유학의 덕목 중 특히 왕에 대한 충성은 새로운 고대국가의 출현에 따른 덕목으로 국왕으로부터 특히 중시되었다.

 유학이 삼국시대에 전래된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자료로는 고구려 小獸林王 2년(372)에 교육기관인 太學의 설치를 들 수 있다.250)≪三國史記≫권 18, 高句麗本紀 6, 소수림왕 2년. 태학에서 어떤 교재를 가지고 어떻게 교육시켰는지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교수된 유학의 자료는 5경과≪사기≫·≪한서≫·≪후한서≫등의 역사서가 아니었을가 한다. 또한≪孝經≫과≪論語≫등도 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효경≫과≪논어≫는 漢대의 태학에서도 읽혔고 신라의 神文王대에 설치된 국학에서도 기초적으로 읽혔던 점 등을 고려하면 이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그리고≪周書≫高麗傳251)7세기 중엽에 편찬된≪周書≫권 49, 東夷 高麗전에 고구려의 “서적에는 五經·3史·三國志·晉陽秋”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3史는 사마천의≪史記≫, 반고의≪漢書≫, 范曄의≪後漢書≫를 지칭한다.≪晉陽秋≫는 晉나라 孫盛이 편찬한 책으로 말과 논리가 바르어 良史로 평가되었으나 손성이 당시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하여 두려워서 개작하였다. 진나라 孝武帝代 太元년간(376∼396)에 異聞을 널리 구하였는데 이 때 정본을 요동에서 구하여 이를 대조해 보니 상이함이 많아 두 본을 모두 전하였다(≪晉書≫권 82, 列傳 52, 孫盛)고 하나 현재는 逸書가 되었다. 이 요동은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과≪舊唐書≫고려전에 5경과≪사기≫·≪한서≫·≪후한서≫·≪삼국지≫, 孫盛의≪晉陽秋≫등이 고구려에서 애독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학을 포함한 고구려 지식인층의 독서경향을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5경은 한대에 박사제도의 확립과 더불어 정비된 유학의 기본경전으로≪詩經≫·≪書經≫·≪周易≫·≪春秋≫·≪禮記≫를 지칭한다. 한나라에서는 5경박사제도를 두어 경전을 전공하는 학자가 양성되었다.

 태학은 중국 한나라의 교육제도를 취해온 것이다. 또한 태학은 중앙의 교육기관으로 이곳에서 고관 귀족 자제들을 교육시켰다.252)李文遠,<儒敎思想과 古代敎育-高句麗 扃堂의 敎育內容->(≪韓國古代文化와 隣接文化와의 關係≫,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1), 466∼470쪽. 여기서 한대의 태학의 성립과 그 후의 변화에 대하여 소상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중급 이상의 고급단계의 교육을 시키는 교육기관이었다. 그리고≪구당서≫와≪신당서≫에는 扃堂이라는 교육제도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① (고구려의)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 누추한 집안으로 천역에 종사하는 집에 이르기까지 각각 큰 길가에 큰 집을 지어 扃堂이라 하고 자제들이 결혼하기 전에 이곳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 그 읽는 책에는 五經, 史記, 漢書, 范曄의 後漢書, 孫盛의 晉陽秋, 玉篇, 字通, 字林이 있고 또 文選이 있어 더욱 애지중지하였다(≪舊唐書≫권 199上, 列傳 149上, 東夷, 高麗).

②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하여 궁벽한 마을의 가난한 집의 사람까지도 즐겨힘썼다. 큰 길가에 모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불렀다. 결혼하지 않은 자제들이 무리지어 모여 경전을 외우고 활쏘기를 익혔다(≪新唐書≫권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고구려의 경당이 언급된 자료는 ①과 ②뿐이다. 이 중에서도 ①의 자료가 더 자세하므로 이를 주로 인용되고 있다. 자료적인 측면에서는 ②의 자료는 ①의 자료를 가지고 표현을 달리한 것일 뿐 새로운 자료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생각한다면 원 자료는≪구당서≫ ①의 자료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흔히 지방의 평민자제들을 교육시킨 사립 교육기관으로 이해하거나 또는 신라의 花郞과 같은 존재로 보는 설이 있다.253)李基白,<高句麗의 扃堂-韓國古代國家에 있어서의 未成年集會의 一遺制>(≪歷史學報≫35·36합집, 1967), 45∼46쪽. 이는 누추한 집에서 살며 천역을 하는 사람들의 자제들이 결혼 전에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는 표현에 근거한 것뿐이다. 특히 이 표현 중에 지방이라는 표현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오히려 사통팔달의 중심가(街衢)에는 큰 집을 지었다는 표현에서 오히려 이는 지방이라기보다는 수도의 중심가인 번화가를 연상케 한다.254)李基白, 위의 글, 50쪽. 즉 수도가 아니라면 이런 가구를 상정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 경당은 지방이 아니라 중앙의 초급교육기관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평민의 자제들이라고 보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실상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이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수도에 사는 주민들의 청소년 자제들이라고 생각된다. 결혼하기 전의 미성년들이 수학한 곳임을 들어 부족국가시대에 청소년집회의 유제가 경당으로 발전하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255)李基白은 이 경당의 설치연대를 長壽王대로 추정하고 정복전쟁으로 지방민이 군사적으로 동원되던 상황하에서 지방의 평민들의 자제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장수왕대라는 근거는 단지 추정에 불과하다(李基白, 위의 글, 52∼53쪽).

 ①의 사료에서 가장 강조한 점은 일반사람들이 책을 좋아했다는 점이다. 이는 ②의 자료에서는 사람들이 배우기를 좋아했다고 표현하였다. 이는 중국인들이 볼 때에 고구려는 외방인들이면서도 중국의 책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고 이를 일찍부터 배워왔음을 특이한 것으로 보고 이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들 사서에 국립대학인 태학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그러나 고구려가 민간에서 낙랑을 통하여 또는 중국본토를 통하여 한자문화를 이미 익히고 있었으며, 이런 전제 위에 태학이 설립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경당의 존재는 태학 이전의 상태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특히 한나라의 태학이 15세에서 18세의 학생을 교육시킨 점으로 미루어본다면 고구려의 태학도 결혼 후의 성년들의 고급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에서의 태학도 경당에서 결혼전에 교육을 받은 학생 중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고등교육을 시킨 것이 아닐가 한다.

 그리고 누추한 집에 살면서 천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란 표현은 그들의 신분이라기보다는 가정은 비록 가난하면서도 공부에 열성적인 사람들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고구려의 최고 지배층을 이렇게 표현하였을리는 없으므로 이를 신분과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자제들을 공부시킬 수 있는 신분을 일반 평민이라고 보는 것은 당시의 역사적 실상과 거리가 멀다. 따라서 이들은 적어도 하급 지배층 이상의 자제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①의 자료 중 나열된 책은 문맥으로 보아서는 ‘이곳(경당)에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는 표현 중의 ‘책’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를 잘 음미하면 이는 경당에서 교육된 책이라기보다는 첫머리에 나오는 ‘풍속이 서적을 좋아하여’라는 구절의 ‘서적’을 말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즉 ① 자료의 마지막 표현인 ‘또≪文選≫이 있어 더욱 애지중지하였다’라는 것에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①의 인용문 첫머리의 ‘책을 좋아했다’는 표현은 고구려의 습속을 총체적으로 언급한 것으로 이를 반드시 경당에서 읽힌 책이라고만 보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경당에서 교육된 내용은 활쏘기가 무예의 기초적인 훈련인 점으로 미루어보아 한문이나 유학교육도≪字通≫이나≪字林≫을 통한 문자교육과 유교경전의 초보적인 교육도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역사에 대한 기초적인 교육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경당에서 초급 또는 중급교육을 마친 사람 중 학문에 출중한 사람이 태학에 입학하였을 것이라는 것 또한 상정하기가 어렵지 않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학계의 통설로 이해되고 있는 지방의 평민 자제들을 교육시킨 곳이 경당이라는 해석은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경당을 화랑제도와 흡사한 전사단체로 규정하여 왔으나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너무나 부족하다. 물론 고구려도 신라와 같은 단계의 고대국가이므로 유사한 사회단체로서 청소년집회인 화랑제도와 같은 제도가 있을 수 있다. 신라의 화랑제도가 주로 왕경출신의 자제들이었음을 보더라도 고구려의 경당은 중앙 즉 수도의 청소년들의 초급 또는 중등교육기관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초급 또는 중등교육을 위해 경당이라는 제도가 성립하게 된 것은 성년식을 치르기 전인 청소년들의 집회의 유산이 한자문화의 전래로 인하여 교육기관으로 발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문무의 교육이 행해졌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에서 국가적인 태학의 설치나 律令의 반포도 한자문화의 수용을 전제로 가능하였다고 본다. 율령이 실시되려면 이를 이해하는 국민이 다수였음을 전제로 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자문화와 유학은 고구려의 경우 태학 설립보다 훨씬 이전에 수용된 것을 말해준다. 또한 한자문화의 전래는 역사의 기록을 가능하게 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 한자문화의 이해수준을 장수왕 2년(414)에 세워진<廣開土大王陵碑>를 통하여 알 수 있다.

 태학에는 오경과 역사서의 박사들이 학생들을 교수하였다고 이해된다. 이는 嬰陽王 때 태학박사 李文眞이 보이고 있음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구려에서 유학에 대한 교육이 실시되면서 태학은 얼마만큼의 유학적 소양을 갖춘 관리의 선발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태학에서 성적이 우수하다는 조건만으로 관리에 충원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사회가 부족장 중심의 귀족사회였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관리 중 실질적으로 태학출신이 임용된 사례를 문헌으로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고구려의 관직체계에「使者」의 명칭이 붙은 관직계열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太大使者·大使者·小使者·拔位使者 등은 원래 국왕이 능력있는 사람이나 공이 있는 사람을 임용함에서 유래된 관직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유추에 의한다면 초기에는 단순한 능력의 검증이나 공로로 관리에 임용되었겠지만 태학이 설치된 후로는 여기서 발탁되어 임용된 관리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경당에서도 유능한 인물의 발탁이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金大問의≪花郞世紀≫에서 ‘賢佐忠臣’과 ‘良將勇卒’이 화랑으로부터 나왔다는 표현은256)≪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37년. 고구려의 경우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도 세습적 신분제가 강인하게 작용하였다는 점에서 유학이 교육되고 학문적 능력을 쌓은 사람이 있어도 크게 발탁되지 못하였을 것임을 쉽게 상정할 수 있는데, 이는 고대국가에서 유학이 정치이념으로 실현되지 못한 사회적·정치적 배경이며, 고대국가의 공통적 통치력의 한계점이라 할 수 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중에서「仁」·「忠」이란 유학적인 표현이나 문구가 나오고 있으나 이를 유학사상의 실현으로 보는 견해는 그대로 취할 수 없다. 이에는 엄정한 사료비판을 거쳐야 할 것이다. 즉 유학사상이 아니라도 비슷한 사례가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고, 이를 후대에 유학적 표현으로 바꿔 놓았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유학이 정치사상적으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以道輿治’라는 표현이다. 광개토대왕은 그의 시조가 ‘天帝之子’이고 어머니는 ‘河伯女郞’이란 표현으로 선조의 출신의 신성함을 강조함이 표출되었으면서도 도로서 세상을 다스린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 도의 구체적인 내용을 싣고 있지 않아 도의 내용이 비록 유학에서 말하는 도와 일치하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유학적인 성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 鎭墓北壁墨書에서 장지의 선택과 장사날의 선택, 장사지내는 시간을 정함에 주공·공자·무왕의 권위를 빌리려함257)천인석,<三國時代의 儒學思想>(≪韓國學論集≫21, 啓明大, 1994), 39쪽.은 유학적인 소박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부모와 남편의 상복제가 중국과 같이 3년복을 입었다는 것258)≪周書≫권 49, 列傳 41, 異域 上, 高麗.
≪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高麗.
은 의식에 있어서 유학적인 영향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 나라에서 정립된 오행사상도 전래 수용되었음이 고분벽화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백제의 유학:백제가 국가적 성립을 보기 전에 남한지역에는 馬韓이란 부족연맹체 사회가 있었고 마한에서는 이미 낙랑에 와서 印章(직함)과 관복을 받아간 족장들이 천 여명에 달하였다고 하는데259)≪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 韓. 이는 이미 마한사회에 중국의 한자문화가 전래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고조선의 통치권이 유이민인 衛滿에게 찬탈되자 그 일부가 마한지역으로 남하하였으므로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이어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백제는 마한 48국 중의 하나로 출발하여 마한을 통합하여 간 나라이다. 또한 백제는 고구려의 지배층이 유이하여 토착민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백제에서는 마한의 기층민들의 문화와 새로이 지배층으로 내려온 유이민의 문화적 기반이 합쳐졌다. 그 결과 백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전통을 가진 위에 부족적 기반이 고구려나 신라에 비하여 약하였므로 이후 외래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보다 개방적이고 적극적일 수 있었다. 그리고 백제는 낙랑과 대방으로부터 거리상으로도 가까웠고, 해상활동이 활발하여 중국과의 교역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국가의 건국이 비록 고구려보다 늦게 출발하였으나 한문화에 대한 이해는 비교적 선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백제에서 유학을 교육하는 태학이 언제 설치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율령이 반포된 고이왕대에는 이미 한자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이해되었으며, 고구려에서 율령의 반포와 태학의 설치가 때를 같이 하였다는 상황을 고려하면 이 무렵 또는 그 후에 태학이 설치되었다고 생각한다. 백제에서 태학이 설치 운영되었다는 근거는 태학의 교수직인 박사의 명칭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삼국사기≫近肖古王 30년(375)조에 박사 高興의 書記 편찬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이 기사가 근초고왕 30년의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 왕대의 일이기는 하나 어느 연대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경우에 그 왕의 마지막 해에 기록해 두었기 때문이다. 毗有王 24년(450) 송나라에서≪易林≫과≪式占≫을 들여와 실제생활에 도움이 되는 주역과 점이 중시되었다. 어떻든 이 무렵에는 5경박사제가 설치되고 유학과 한문이 일본에 전해진 것260)왕인박사가 일본에≪천자문≫과≪논어≫를 가지고 가서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日本書紀≫권 17, 繼體紀 7년조에 백제에서 五經博士 段陽爾를 보냈다는 기록과 3년 후에는 高安茂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으며 권 19, 欽明紀 14년조에 일본에서 醫博士·易博士·曆博士의 파견을 요청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하여는 李弘稙,<日本에 傳授된 百濟文化>(≪韓國古代史의 硏究≫, 1971) 및 李丙燾,<百濟의 學術 및 技術의 日本傳播>(≪百濟硏究≫2, 忠南大, 1971) 참조. 등은 백제 유교문화의 깊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慰禮城에 도읍을 하였던 전기 백제시대에는 실생활 중심의 유학이 발달하였다.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패하여 수도를 웅진으로 옮긴 이후 중국은 남북조시대로 백제는 남조문화의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즉 유려한 문체중심, 불교와 노장학이 가미된 유학이 백제에 수용되었다.≪周書≫백제전에 의하면 풍속이 말타기와 활쏘기를 중히 여기며, 경전과 사서를 좋아하고 자못 한문 글을 지을 줄 알고, 음양오행을 이해하고 송의 원가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서술하여 중국과의 교섭을 통하여 중국문화를 활발히 수용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고, 부모와 남편의 상에는 3년복을 입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聖王 12년(534)과 18년에는 백제에서 양나라에≪涅槃經≫등의 經義와 毛詩博士, 工匠과 畵師를 보내줄 것을 청하여 이들을 받았다.261)≪南史≫권 79, 列傳 69, 東夷, 百濟. 또한 의약에 대한 이해가 깊고 점술에 능하였다고 한다.262)≪隋書≫권 81, 列傳 46, 東夷, 百濟. 武寧王의 묘지석의 기록은 당시 백제의 유교문화 및 한자문화에 대한 이해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이는 또한 불교와 노장사상이 가미된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기록이다. 즉 무덤은 연꽃이 장식된 벽돌로 축조되었고 買地券은 노장사상이 가미된 토속신앙을 반영하고 있으며 지석문은 유학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 이 무렵 백제에서는 양나라에 講禮박사를 청하여 이를 받아들였다.263)천인석, 앞의 글, 41쪽.

 백제 말기에 살았고 백제가 멸망하자 부흥운동을 일으키다가 뒤에 당나라에 귀화하여 중국의 관인이 되었던 黑齒常之의 묘지명에는 그가 어렸을 때부터≪춘추좌전≫과≪사기≫·≪한서≫등을 읽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백제 관료들의 학문성향의 일단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신라의 유학:신라는 한반도의 귀퉁이에 위치하여 한자문화를 포함하여 중국문화의 전래가 초기 고구려를 통하여 들어왔다. 또한 국가의 성장단계도 고구려와 백제에 비하여 뒤늦게 발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라는 이처럼 외래문화를 고구려나 백제에 비하여 뒤늦게 받아들였으나 전통사회의 윤리와 습속을 승화시킴으로써 공동체의식을 잃지 않았고 이는 삼국을 통일하는 문화적·사회적 저력이 되었다.

 5∼6세기에 만들어진 비석이 최근에 발견됨으로써264)5세기말에 세워진 것으로 이해되는<迎日冷水里新羅碑>와 6세기 초반의<蔚珍鳳坪新羅碑>를 들 수 있다. 신라시대 한자문화의 이해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 한강유역을 점유한 진흥왕대부터는 중국의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비단 유학만이 아니라 불교의 수용에 있어서도 적극적이었다. 불법을 배우러 가는 유학승들에 의하여 초기 유학이 전래되었다고 생각된다. 이는 유학과 전통윤리·불교윤리가 통합된 것을 화랑도가 지켜야할 덕목으로 제시한 圓光의 世俗五戒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즉 事君以忠·事親以孝·交友有信·任戰無退·殺生有擇에서 종래 앞의 세 덕목은 유교적인 것이라 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나 반드시 그렇게 해석하여야 한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사군이충은 유교적 덕목에서 유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사친이효와 교우유신도 표현상으로만 보면 유교덕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는 전통사회에서 있어온 덕목을 한자로 표현한 것일 뿐이고 이를 새로이 생긴 도덕관념이라고 할 수가 없다. 임전무퇴는 당시의 정치사회상으로부터 요구되는 덕목이고, 살생유택은 농업사회의 전통을 반영한 덕목으로 이해되고 있으면서 불교적인 성향이 짙게 깔려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해 주고 있다.

 신라에서의 국가적인 교육제도가 확립된 것은 삼국통일 후인 신문왕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유학을 공부하는 분위기는 있었다. 이는 1934년에 발견된<壬申誓記石>의 내용에서 신라인의 유학사상의 일단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임신년은 眞興王 13년(552), 眞平王 34년(612), 문무왕 12년(672), 聖德王 31년(732)으로 어느 해인지를 확정지을 단서는 없다. 두 화랑이 서로 약속한 내용 중에 “충도를 執持하여 이에 과실이 없기를 하늘에 맹서하며,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대죄를 받을 것을 크게 서약하고, 만약 나라가 불안하여 크게 세상이 어려워지면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서한다”는 것으로 되어 있고 바로 전해(신미년)에 약속한 詩·尙書·禮·傳을 3년 안에 차례로 습득하기로 맹서하였다. 이 내용과 시대상황으로 보아 임신년은 진평왕 34년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고졸한 필체가 또한 이 시기의 유물로 이해된다. 이를 통하여 신라에서 화랑들이 유교경전의 습득을 열심히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의 시는≪詩經≫, 상서는≪書經≫, 예는≪禮記≫, 전은≪左氏傳≫이나≪公羊傳≫·≪穀梁傳≫의 하나일 것이나≪좌씨전≫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진흥왕 29년(568)에 세워진 진흥왕순수비에는 “이리하여 제왕은 연호를 세우고 자기를 수양함으로써 백성을 편하게 하지 않음이 없었다”는≪論語≫에서 인용한 표현과 “兢身自愼 恐違乾道”라는 표현은 유학적 사고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强首는 통일 전에 이미≪孝經≫·≪爾雅≫·≪曲禮≫·≪文選≫을 스승으로부터 배웠다는 점265)≪三國史記≫권 46, 列傳 6, 强首.에서 신라인들의 유학적 소양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인들의 유학에 대한 공부는 眞德王 5년(651)에 있었던 김인문 등이 당나라에 가서 숙위학생으로 국학에 들어가 공부한 것이 遣唐留學生의 시작으로 본격적인 유학을 공부하게 되고 이는 이후 통일신라의 학문의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요컨대 삼국시대의 유학은 한문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교육되었고 그 내용 중 일부가 당시의 정치와 사회에 수용되었다. 이때의 유학은 전통적인 우리 문화의 저변에서 시행되던 덕목과 관련된 것이 유학적으로 승화 표현되었다. 따라서 아직 유학은 역사의 기록이나 역사관을 규정할 정도로 이념적 가치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삼국시대에 전래한 유학은 어떤 성격의 유학이었을까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에서 우선 한문에 대한 이해와 명문의 외교문서를 쓰기 위하여 유학적 내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였다. 이는 삼국이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에서 중국세력과 외교관계를 잘 유지함은 국내정치만이 아니라 국제정세를 자국에 유리하게 장악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다음은 영토를 확장하고 새로운 인민을 국민으로 흡수하면서 왕에 대한 국민의 충성심의 고양은 고대국가가 발전함에 무엇보다도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이를 위하여 충과 효를 강조하는 유학이 실질적으로 중요시되었다. 그러면서도 이는 군주가 백성생활을 안정되게 다스려야 한다는 인식을 낳게 하였다. 이는 현실적인 필요성을 띠게 되었다. 아직 유학이 가족윤리를 규제하거나 실생활에 필요한 덕목으로 정착하기에는 더 급하고 긴요한 위와 같은 문제들이 있었다. 유학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인 교화는 불교가 담당하고 있었던 고대국가의 상황에서 유학이 사회의 교화사상으로 작용함에는 아직 부족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개인적 인격자를 유학을 통하여 기른다는 것도 그리 크게 작용하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고대국가의 유학은 지배층 특히 국왕의 현실적 필요성에서 장려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삼국의 유학은 일본에 전파되어 일본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학문적 기반을 이룩하였다. 이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을 통하여 학문과 기술이 일본에 전파되었으나 특히 백제의 영향력이 컸음은 주지의 사실이다.266)李弘稙,<日本에 傳授된 百濟文化>(≪韓國思想≫9, 1958;≪韓國古代史의 硏究≫, 新丘文化社, 1971).
李丙燾, 앞의 글(1971).
金廷鶴,<古代의 韓日關係>(≪韓國古代文化와 隣接文化와의 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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