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Ⅲ. 유학과 역사학
  • 4. 삼국의 역사편찬
  • 3) 신라

3) 신라

 신라에서는 진흥왕 6년(545)에 이찬 異斯夫의 건의에 의하여 대아찬 居柒夫로 하여금 문사를 모아 國史를 수찬하게 하였다. 이사부가 건의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伊湌 異斯夫가 아뢰기를 “나라의 역사라는 것은 군주와 신하의 善惡을 기록하여 萬代에 褒貶을 보여주는 것이니 이를 수찬하지 않는다면 후대에 무엇을 보겠습니까” 하였다(≪三國史記≫권 4, 新羅本紀 4, 진흥왕 6년).

 이사부가 아뢴 국사편찬의 목적은 자못 미화된 듯한 감이 없지 않다. 당시 역사기록에서 포폄이라는 것이 과연 강조되었을까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사편찬에 대한 건의를 왕이 받아들여 편찬을 곧바로 명하였다고 하나 이는 진흥왕 자신의 결정이라 할 수 없다. 진흥왕은 7살에 즉위하여 왕태후가 섭정하였으며 즉위 12년 즉 開國이라는 연호를 정한 해부터 친정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왕태후는 법흥왕의 비를 의미한다는 견해도 있으나280)李丙燾,≪譯註 三國史記≫(乙酉文化社, 1987), 56쪽. 진흥왕의 어머니인 법흥왕의 딸로 보는 견해도 있다.281)鄭求福 외,≪譯註三國史記≫3(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7), 112쪽 주 75 참조. 이사부는 법흥왕대의 중신이었고 진흥왕 2년(515)에 병부령으로 군사권을 장악하였던 중신이었다.

 이사부의 이 건의에 의하여 대아찬 거칠부에게 이를 편찬토록 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지만 그는 글을 아는 문사를 널리 구하여 편찬을 완료하였고 그 결과로 波珍湌에 승진하게 되었다.282)≪三國史記≫권 44, 列傳 4, 居柒夫傳에는 좀더 자세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국사편찬을 건의한 이사부가 신라 중시조로 이해되고 있는 내물왕의 4세손이고 그 편찬을 담당한 거칠부는 내물왕의 5세손으로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제도문물의 정비에 현재의 김씨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 정치이념에 입각하여 왕자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려는 성격의 것이었다.283)李基東,<古代의 歷史認識>(≪韓國의 歷史家와 歷史學≫上, 1994), 33∼35쪽. 이는 진흥왕 29년(568)에 세워진 순수비에서 태조의 기반을 이어 받았다고 함에서 태조가 내물왕인지 지증왕인지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김씨왕통을 밝혀 이를 강조하려 하였다는 점은 이를 통하여서도 보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진흥대의 국사편찬은 지증왕·법흥왕대의 성공적인 정복전쟁의 승리와 불교공인을 통한 호국의지의 강화, 대왕제의 실시, 독자적인 연호의 사용 등 중요한 정치적 업적을 기술할 목적이 주였다고 할 수 있다.284)申瀅植,<新羅人의 歷史認識과 國史編纂>(≪統一新羅史硏究≫, 삼지원, 1990), 208쪽. 정복전쟁은 당시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과업이었고 이에서 생명을 아끼지 않고 용감하게 싸웠던 사람이 칭찬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판되었을 것이다. 위에 인용한 사료에서의 포폄은 이를 주로 뜻한다고 여겨진다.

 또한 진흥왕의 순수비에는 영토의 확장, 새로이 편입된 사람을 국민으로 만들려는 의식, 고유한 정치사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진흥왕 12년(551)경에 세워진<丹陽赤城碑>에서는 국가를 위해 죽은 사람의 포상조처와 이를 신고한 사람에게도 포상하는 규정을 찾을 수 있어 정복전쟁의 기반조성을 위해 치밀한 대응책을 세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마운령비와 함흥에 세워진 황초령비에는 도교적인 색채도 보이고, 天道 및 鬼神思想 및 외국과의 和平사상도 보이고 있으며, 군주의 修己治人思想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에는<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新古黎庶’라 하여 전부터의 백성은 물론 새로이 편입된 백성에 대한 관심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국가를 위하여 충성을 바친 사람의 공훈을 포상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또한 이들 금석문은 이 무렵의 한문수준을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삼국의 역사, 삼국의 역사책들이 갖는 성격은 개별적으로 다른 점도 있을 것이나 자국의 역사를 기록 편찬함으로써 왕계의 신성성, 왕의 훌륭한 정치적 업적, 신하의 충성 등을 널리 선양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왕의 정치적 업적으로는 정복전쟁의 승리가 국가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을 특별히 강조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삼국의 역사에서는 자기의 역사가 지상에서 최고라는 자존의식이 강하였다고 이해된다. 또한 이런 의식의 기초위에 편찬된 역사서는 단순한 자존의식의 표출만이 아니라 자기 문화를 계승하는 기반을 굳건하게 다지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에서의 역사편찬은 이후 역사기록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당대의 기록을 상세히 남기는 史官제도의 발달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삼국사기≫에 태종무열왕 7년조 기사에서부터는 종전의 월만을 표기하던 것을 날짜까지 표기하는 상세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의 제도화와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삼국의 역사편찬이 비록 유학의 발달과 반드시 연결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유학적 이해가 풍부해지면서 역사편찬이 활발해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유학에서는 문학과 경전, 그리고 역사를 소중한 학문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鄭求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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