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1. 언어와 문학
  • 2) 시가
  • (3) 삼국의 시가와 한국시의 전통

(3) 삼국의 시가와 한국시의 전통

 이른바 삼국시대라 불리는 기원 전후 1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민족공동체로서의 역사적 기반을 구축하고 민족문화로서의 독자적 개성을 확립해 나간 민족사적으로 위대한 시대라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이 시대는 민족의 발견과 더불어 소국체제에서 소국 연맹체로, 영역국가로 확대되는 격변을 겪으면서, 마침내 三國으로 통합되어 나가는 실질적인 민족공동체의 확립기에 해당한다. 문화적으로도 이 시대는 漢文化와 佛敎文化로 대표되는 선진적 외래문화의 수용을 통하여, 우리문화의 자생적 기반을 확고히 다진 실질적인 민족문화의 확립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문학적으로 보면, 이 시기는 곧 우리문학이 다른 문학과 다른 한국적 개성을 획득해 나가는 ‘민족문학의 형성기’라 할 수 있다.

 창작시의 출현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시가문학은, 바로 이런 위대한 시대에 우리문학의 중심부에 서서 민족문학의 형성을 실질적으로 주도해 나간 주체였던 셈이다. 이 시대에 성취한 한국적 개성의 획득이란 사실상 이 시기 삼국의 시가문학이 성취해 낸 한국시의 전통 확립과 직접 맞물린 형상이었으며, 그러한 개성 획득의 구체적 단면이 바로 7세기에 이미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鄕歌의 전통이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시가 현상을 살피는 일은 곧 한국시의 전통이 확립되어 나가는 구체적 과정을 살피는 작업, 나아가 민족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 형성되어 나가는 역사적 과정을 살피는 작업과도 직접 맞물린 문제인 것이다.323)그러나 삼국의 시가를 중심으로 한 1∼7세기 한국시의 이런 양상은, 자료적 여건 때문에 사실상 정밀한 세부적 검토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이 시기에 전개된 삼국 시가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에는 남아있는 자료의 양이 너무나 빈약하기 때문이다. 우선 現傳하는 작품이 백제의<井邑詞>와 신라의<薯童謠>·<風謠>·<彗星歌>등 겨우 4편에 지나지 않고, 일부 단편적으로 남아있는 不傳歌謠 자료들조차 이름만 전하거나 사료적 신빙성이 의심되는 등의 부정확한 자료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마저도, 자료의 편중현상이 심해서 삼국 시가의 실상을 고루 파악하는 데는 여러 가지 장벽이 가로놓여 있다. 현전 작품을 비롯한 대부분의 자료가 후기(6∼7세기)에 편중되어 있어 그 이전의 중간과정을 살피기가 어렵고, 그마저도 신라 쪽에 집중되어 고구려와 백제의 시가는 윤곽조차 잡기 어려운 형편인 것이다. 따라서 삼국시대 시의 현상을 체계화하는 작업 역시 현재의 자료적 여건으로서는 상당 부분을 추론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 조차 큰 흐름만 가닥 잡는 정도의 소략한 접근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삼국의 시가가 이처럼 민족문학으로서의 한국적 개성을 획득하면서 시로서의 서정적 전통을 확립해 나갈 수 있었던 기반은 물론 기원 전후 1세기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앞 항에서 거듭 강조해 온 바와 같이, 기원 전후 1세기는 창작시의 출현과 더불어 한국시로서의 역사성과 개별성 문제가 처음으로 우리 문학사에서 의미를 띠게 되는 시기다. 바꾸어 말해 이 시기에 거두어 낸 한국시 형성의 전환기적 국면은, 자생적인 민족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상층부 지배집단이 맞닥뜨린 정치현실과의 강렬한 긴장 속에서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마련된 한국시 형성의 기반은 노래가 정치현실과의 긴장 속에서 생성, 전개되기 시작한 사실과 불가분의 관련 속에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원 전후 1세기의 정치상황과 관련하여 이미 상세히 검토한 바 있는 시적 전통의 다변화 현상은, 물론 한국시 형성의 기반으로서 가장 먼저 지목해야 할 시적 성과이다. 곧 이 시기 정치현실과의 긴장으로 말미암아 다변화된 네 계열의 시적 전통-주술적 노래 계열(구지가)과 민요적 서정시 계열(회소곡)로 대표되는 구술적 노래의 전통, 개인적 서정시 계열(황조가)과 공리적 서정시 계열(도솔가)로 대표되는 창작적 노래의 전통-은, 삼국의 시가가 나아갈 구체적 방향을 설정해 준 한국시 전통의 기본 틀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시는 이들 네 계열의 시적 전통이 삼국 시가의 전개 과정을 통해 구체화됨으로써, 비로소 독자적 개성을 획득하면서 실질적인 제 모습을 갖추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주목해서 검토해야 할 한국시 형성의 기반은 작품 향유의 메커니즘 문제일 것이다. 민족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노래가 상층부 지배집단의 정치현실과 불가분의 관련 속에 놓이게 됨에 따라, 이 시기에는 또한 노래를 산출하고 즐기는 향유전통의 다변화 현상이 함께 나타나게 되었다. 곧 구술적 노래와 창작적 노래로 대별되는 네 계열의 시적 전통과 더불어, 이 시기에는 왕실 중심의 歌樂系 노래와 민간 중심의 非歌樂系 노래로 대별되는 두 가닥의 향유전통이 새로이 마련된 것이다. 이는 특히 국가로서의 통치체제를 확립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왕실의 공식적 의례에 사용할 음악을 새로이 제정하기 시작한 ‘가악의 제도화’ 문제와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었다.

 기원 전후 1세기 시의 특징적 현상으로서 주목되는 가악의 제도화는, 거듭 지적하는 바이지만 민족국가의 형성과 더불어 건국 초기의 통치기반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지배체제의 확립과 직결되어 있다. ‘此歌樂之始也’의 문제로 일찍부터 관심을 끌어 온<도솔가>와 6촌 여인들의 길쌈놀이와 관련된<회소곡>(회악)의 가악화 과정이 곧 그러한 사정을 대변해 준다. 이들 노래의 가악화 과정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신라 유리왕대에 추진된 일련의 국가체제 정비시책과 직접 맞물려 있다. 즉 지배기반으로서의 6촌 정비, 통치기구로서의 관제 확립, 산업기반으로서의 농기구 제작 등에 상응하는, 왕실기반 조성으로서의 가악을 제도화해 나가는 과정이 바로<도솔가>와<회소곡>의 가악화 과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런 사정은 다소 부정확하나마 고구려 쪽의 자료를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다. 李奎報의<東明王篇>에 인용된 기록에 의하면 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직후 음악으로써 왕실의 威儀를 갖추기 위해 이웃 비류국의 악기〔鼓角〕를 몰래 탈취해 온다.324)李奎報,≪東國李相國集≫권 3, 古律詩 東明王篇 挾注. 이 역시 백록주사의 경우처럼 비류국과의 세력다툼에 관련된 이야기지만, 이 문맥에서 특히 주목할 바는 ‘鼓角威儀’로 표현된 음악의 정치적 기능이다. 악기가 없어 비류국의 使者를 왕의 예로 맞을 수 없기 때문에 속임수로 악기를 가로챈다는 이야기는, 음악이 군주의 권능과 통치체제 확립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드러내 주는 단적인 예가 되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이런 사정을 감안한다면, 국가 창업에 따른 가악의 제도화는 신라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가야 등 국가단계에 진입한 이 시기 다른 소국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실현되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325)이런 현상이 중국의 禮樂傳統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지는 이 시기 중국문화 수용의 수준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 창업의 일환으로 수행된 이 시기 가악의 제도화가, 그 후 유교적 예악사상의 본격적 수용에 힘입어 궁중악부나 악장의 형태로 한국시의 형성과 전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익히 아는 바와 같다.

 향유전통의 다변화가 이 시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가악의 제도화로 왕실 중심의 가악계 노래가 새로이 등장하게 되자, 작품향유의 통로가 두 가닥으로 분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곧 왕실을 중심으로 새로이 형성된 가악계 노래의 향유전통과, 개인이나 사회집단을 중심으로 이전부터 향유되어 오던 비가악계 노래의 향유전통이 병립하게 되는, 전승 통로의 이원화가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이다.<도솔가>와<회소곡>이 새로이 나타난 가악계 노래의 전형적 예라면,<황조가>와<구지가>는 비가악계 노래의 대표적 예가 될 것이다. 기원 전후 1세기에 마련된 이들 두 가닥의 향유전통은 삼국의 시가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곧 이들은 삼국의 시가를 통해 구체적 모습을 갖추어 나가게 되는 한국시 형성의 중심 통로였다. 삼국의 시가는 이들 가악계 노래와 비가악계 노래라는 두 가닥의 전승 통로를 따라 전개되면서, 한국시로서의 독자적 전통을 확립해 나갔다.

 가악계 노래는 처음부터 왕실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창작계 가악과, 원래 민간전승의 노래가 왕실음악으로 상승하여 가악화된 민요계 가악이라는 두개의 큰 흐름을 따라 전개되었다. 창작계 가악은 그 본래의 목적상 治者集團의 정치적 의도성이 강하게 투영된 송축적 성격의 노래를 주축으로 전개되었다면, 민요계 가악은 민요 본래의 성격상 기층민의 일상적 애환을 반영한 향토색 짙은 노래가 주류를 이루며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두 흐름의 가악적 기반 역시 기원 전후의 삼국 초기에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도솔가>가 창작계 가악의 첫 장을 연 작품이라면<회소곡>은 민요계 가악의 첫 길을 튼 작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창작계 가악의 경우 1세기 전반의<도솔가>·<신열악>및 3세기 전후의<思內>와 같은 초기 작품과, 倭에 인질로 잡혀 있던 동생과 재회하는 기쁨을 노래한 5세기초 눌지왕의<憂息曲>, 北漢山州 탈환의 공을 기리기 위해 지은 7세기초의<長漢城>, 태평성대의 경주를 찬양한 연대미상의<東京>등 신라쪽의 자료가≪三國史記≫와≪高麗史≫에 전하고 있어 그 전반적 흐름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다. 다만 고구려는 隋의 高句麗伎에<芝栖>라는 歌曲이 있었다는 기록만≪隋書≫에 전하고,326)≪隋書≫권 15, 志 10, 音樂下. 이 밖에 靜洲의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에 성을 쌓고 투항해 오는 狄人들을 거두어 살게 한 일을 노래로써 기렸다는<來遠城>도 있으나(≪高麗史≫악지), 고구려의 강역으로 보아 압록강변의 정주가 고구려의 邊境일 수 없으므로 이를 고구려 노래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백제 역시 광주 무등산에 성을 쌓아 백성들이 안락을 얻게 되었다는<無等山>만≪고려사≫에 전하고 있어 편린만 겨우 엿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구려 고분벽화와 奏樂圖나 수·당의 고구려기, 百濟樂이 당에 설치되어 있었다는≪通典≫의 기록 등에서 보듯, 고구려·백제의 음악적 수준이 신라보다 오히려 높았다고 할 수 있는 만큼 창작계 가악도 신라 못지 않게 널리 향유되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민요계 가악 역시 ‘郡樂’이라 불리는 신라의 지방음악 자료가 여러 편≪삼국사기≫악지에 전하고 있어, 그 양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즉 日上郡(미상)의<內知>, 押梁郡(지금의 경산군 압량면)의<白實>, 道同伐郡(지금의 영천군 지역)의<石南思內>, 河西郡(지금의 강릉?)의<德思內>, 北隈郡(미상)의<祀中>등은 모두가 지방의 토착민요가 상승하여 가악화된「군악」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327)이들은 모두 연대미상의 작품들이어서 삼국통일 이전 자료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하다. 그러나 지명이 모두 경덕왕 이전의 옛 이름인 점으로 미루어 통일 전에 이미 가악화되어 있었던, 삼국시대의 자료로 간주하는 데는 별다른 문제점이 없을 것이다. 이는 가야의 음악사 자료를 담고 있는 于勒의 十二曲으로 더욱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대가야 말기 가실왕 때 우륵이 가악화했다는<上加羅都>·<下加羅都>·<居烈>등 12곡 역시 대부분 가야의 지방음악이기 때문이다.328)梁柱東,≪古歌硏究≫(박문출판사, 1946), 30∼31쪽. 더욱이 우륵의 음악을 전수받은 신라의 제자 法知·階古·萬德이 이들 12곡을 5곡으로 줄였다는 기록은 가야의 민요계 가악이 다시 신라의 가악으로 재편되는 과정까지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高麗史≫·≪樂學軌範≫에 전하는 백제의 유일한 현전 작품인<井邑>, 수자리 나간 남편에의 기다림을 노래한<禪雲山>, 왕도 꺾지 못한 정절의 노래<智異山>등의 작품 역시 이런 과정을 거쳐 문학사에 부상할 수 있었던 백제의 민요계 가악이라 할 수 있다.329)고구려에도 이에 해당하는 민요계 가악으로서 서울 書生과 강릉 처녀의 佳綠을 배경으로 한<溟州>가≪高麗史≫에 전하고 있는 하나, 많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이는 고구려 노래로 보기 어려운 점이 많다. 일찍이 輿地勝覽에서는 통일신라 때 노래로, 文獻備考에서는 고려 때 노래로 비정한 바 있다.

 다른 한편으로 비가악계 노래는 왕실 밖의 민간사회에서 향유되는 노래를 총칭적으로 범주화한 것이기 때문에 그 성격이나 흐름이 상당히 다양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현재의 자료적 상황을 감안하여 살핀다면 이 역시 비가악계 창작시와 비가악계 구비시가라는 두 개의 큰 흐름을 따라 전개되었던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또한 비가악계 창작시가 주로 현실적 경험이나 감성체험을 개인의 내면적 주관 속에서 토로해 내는 서정적 성격의 노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면, 비가악계 구비시가는 기층민의 삶과 애환을 담은 전승민요와 현실적 문제의 주술적 해결을 목적으로 한 주술계 노래가 중심이 되어 전개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 쪽이나 가악계보다 남아있는 자료가 적기 때문에 접근에 더욱 큰 어려움이 따른다. 특히 고구려·백제의 경우 비가악계 자료에 대한 기록이 한 편도 전하는 것이 없어, 자료에 의해 삼국시대 비가악계 노래의 전반적 흐름을 짚어 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형편에 있다. 때문에 이의 검토는 전체의 과정을 두 흐름에 따라 의미화하되, 신라를 중심으로 계통을 세우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비가악계 창작시는 물론 그 향유전통의 기반을 멀리 고구려 유리왕의<황조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개인적 창작시의 첫 장을 연 작품이라는 이유 때문만 아니라, 작품에 나타난 시의 특성이 후대의 흐름을 특징짓는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곧<황조가>에 보이는 강한 현실성, 특히 동일성 상실의 아픔이 사회현실과의 강렬한 긴장 속에서 토로되는 시의 서정적 특성은, 이 시대 비가악계 창작시의 특성을 규정짓는 중요한 지표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유일한 중간과정의 자료라 할 3세기초의<勿稽子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물계자가>는 공을 세우고도 정치권력에서 소외당한 勿稽子 자신의 곧은 性癖을 자연 사물에 비겨서 노래한 작품이다.330)≪三國遺事≫권 5, 避隱 8, 勿稽子. 따라서 이 역시 신라사회가 빚어낸 모순된 정치현실과의 긴장 속에서 촉발되어, 그러한 현실과의 대결적 긴장으로 말미암은 자아의 동일성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현실과의 긴장을 내면화하는 정도가 오히려 더 강해진다는 면에서 보면, 문화의 성숙과 더불어 개인 창작시로서의 성격이 후대로 오면서 더욱 분명해지는 현상까지 함께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 후기, 곧 7세기 무렵의<實兮歌>·<天冠怨詞>·<亥論歌>·<陽山歌>등 일련의 비가악계 창작시 자료들은, 이런 성격을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변화의 측면까지 함께 드러내고 있다. 간신배의 농간으로 변방에 밀려난 심경을 장편의 노래에 실어 내보인 實兮의<실혜가>는,331)≪三國史記≫권 48, 열전 8, 實兮. 수세기에 걸쳐 내려온 개인 창작시의 전통이 장편으로 확대되는 양상을 보여 주고 있다. 김유신에게 버림받은 원망의 정념을 노래한 天冠의<천관원사>는,332)≪新增東國輿地勝覽≫권 21, 慶州府 古蹟. 개인 창작시의 향유층이 이미 상층부 지배집단을 넘어 일반의 민간집단에까지 내려앉는 단면을 보여 준다. 그리고<해론가>와<양산가>는 백제군과의 치열한 싸움에서 전사한 亥論과 金歆運의 영웅적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라는 점에서,333)≪三國史記≫권 47, 열전 7, 亥論.
≪三國史記≫권 48, 열전 8, 金歆運.
이와는 다소 다른 면이 보이기도 한다. 집단적 감성이 시적 정조의 기반을 이루고, 구비 서사시적 전통도 상당한 정도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에서, 개인 창작시로서의 성격이 상대적으로 무디어졌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시 삼국이 각축하는 사회현실과의 긴장 속에서 생성되었고, 영웅의 죽음에 대한 비탄의 정념이 시의 정서적 기반을 이루리라는 점에서는, 비가악계 창작시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비가악계 구비시가의 전통은 그 원류가 멀리 생성기의 구지가계 노래와<공무도하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므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다. 그러나 입으로만 전승되는 구비시가의 특성상, 정착의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남아 전할 수 없기 때문에 이의 자료는 지극히 빈약하다. 전승민요의 경우 정착의 계기는 오직 왕실음악으로 상승하여 가악화되는 길밖에 없었던 실정이므로, 민간사회에서 향유되던 순수한 전승민요 자료는 한 편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오직 7세기에 정착된 향가<風謠>가 노동요로서의 방아노래와 무관하지 않다는 기록이≪삼국유사≫에 남아 있어, 이 시대 전승민요의 한 일단이나마 짐작하게 해 줄 수 있을 뿐이다.

 이에 비한다면 주술계 노래의 자료적 여건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다. 일찍이 기원 전후의 삼국시대 초기에는 주몽의 백록주사와 가락국의<구지가>가 있었고, 6·7세기에도 辟鬼呪術로서의<鼻荊郞詞>와 避火呪術로서의<志鬼詞>가≪三國遺事≫와≪大東韻府群玉≫에 남아 있어, 이의 지속적인 향유전통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술유형상 이들은 모두 강제적 명령을 통해 주술적 소망을 실현시키려는 위압적 주술에 속하나, 그렇다고 이를 삼국시대 주술계 노래의 전체상인 것처럼 확대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6세기 말 경의 주술계 향가작품인<서동요>와<혜성가>가 선험적 주술의 문학적 변용이라는 점에서, 다른 유형의 주술계 노래들도 함께 전승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6·7세기에 오면 주술계 노래의 운명은 이미 새로운 사태에 직면하고 있었던 듯하다. 삼국의 시가가 이 시기에 이르러 마침내 한국시로서의 미학적 전통을 확고히 뿌리 내리게 되자, 주술계 노래의 전통이 더 이상 미적 설득력을 얻기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주술적 전통을 완강히 지키려는 쪽은 시의 주변부로 밀려나 문학적 전락의 길을 걷게 되고, 주술적 전통의 미적 변용을 시도하는 쪽은 향가로 수용되어 문학적 승화의 길을 걷게 되는 분화의 현상이 이 무렵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시기<비형랑사>와<지귀사>가 전자의 길로 나아가는 한 과정을 보이는 예라면,<서동요>와<혜성가>는 곧 후자의 길로 나아가는 주술계 향가의 한 단면인 것이다.

 가악계 노래와 비가악계 노래로 이원화된 두 가닥의 향유전통에 대한 접근은, 이상의 검토과정에서 드러나듯이 그 자체로서도 삼국시대 시가문학의 역사적 과정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과정만 아니라 한국시로서의 미학적 전통이 확립되어 나가는 과정까지 함께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미 지적한 주술적 노래 계열, 민요적 서정시 계열, 개인적 서정시 계열, 공리적 서정시 계열 등 네 계열의 시적 전통이 전개되는 역사적 양상은 바로 이들 두 가닥의 향유전통에 대한 접근을 통해서만 제대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민요적 서정시 계열과 공리적 서정시 계열은 주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가악계 노래의 향유전통을 따라서 전개되었다. 민요적 서정시 계열이 민간사회에서도 향유되지 않은 바는 아니나, 노래로서의 시적 세련성을 획득하면서 문학사에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민요계 가악의 향유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공리적 서정시의 형성과 전개가 전적으로 頌祝系 가악의 향유전통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주술적 노래 계열과 개인적 서정시 계열은 주로 민간사회를 중심으로 한 비가악계 노래의 향유전통을 따라서 전개되었다. 곧 주술적 노래는 비가악계 구비시가의 향유전통을 따라 전개되고, 개인적 서정시는 비가악계 창작시의 향유전통을 따라 전개되었음이 그것이다.

 그러나 비가악계 노래의 향유전통과 관련하여, 나아가 한국시의 독자적 전통 확립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해야 할 시기는 6·7세기다. 이 시기 민간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된 비가악계 노래의 향유전통에는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6·7세기는 곧 비가악계 노래가 가악계 노래의 영향력을 압도하면서 시가문학의 실질적 주체로 부상해 나간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비가악계 노래가 이미 상당한 정도의 시적 수준에 이를 만큼 그 자체의 미학적 토대를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었던 사실과 직접 연결된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시의 독자적 전통 확립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향가가 장르로서의 성격을 확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향가의 형성은 우선 전승민요의 문학적 부상, 주술계 노래의 분화, 개인 창작시의 다변화 내지 대중화 경향 등, 위에서 살핀 6·7세기 비가악계 노래의 전반적 변화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오히려 이런 일련의 변화에 동승하여, 비가악계 노래의 수준 향상과 향유 폭의 확산을 주도해 나가면서 형성된 장르가 곧 향가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기층민의 소박한 전승민요는 민요계 향가를 통해 미적 세련성을 획득하면서 마침내 시가문학의 전면에 부상할 수 있었다. 이 시기<풍요>와<서동요>로 대표되는 4구체 향가의 출현이 곧 그것이다.<풍요>는 기층민의 노동요인 방아노래를 직접적 모태로 하되, 소동요를 불교적 공덕가로 바꾸는 기능적 전이를 통하여 생성된 노래라 할 수 있다.<서동요>역시 아이들의 전통적 유희요인 전래동요를 직접적 모태로 하되, 동요를 주술계 노래와 통합하는 기능적 합성(유희기능과 주술기능의 합성)을 통하여 생성된 노래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비가악계 창작시 역시 사뇌가계 향가를 통해 시적 형상력과 대중성을 동시에 확보하면서 마침내 시가문학의 중심부에 자리할 수 있었다. 이 시기 融天師의<혜성가>로 대표되는 10구체 향가의 출현이 곧 그것이다.<혜성가>는 주술계 노래의 향유전통을 개인 창작시에 수용한 서정적 노래라는 점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개인 창작시에 주술적 기능을 부여한다는 것, 더욱이 그것을 서정적 형상력의 획득을 통해 이루어 낸다는 것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첫째 주술적 해결의 기능까지 창작시가 포용한다는 것은, 개인 창작시가 지배집단의 정치현실만 아니라 사회일반의 생활세계까지도 끌어안을 수 있는 대중적 호소력을 확보하게 되었음과 직접 통한다. 둘째 그러한 호소력의 확보가 시의 서정적 형상력 확보와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개인 창작시가 마침내 서정시로서의 미학적 토대를 독자적으로 구축하게 되었음과 직접 통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후대에까지 관류하는 향가의 미학적 본질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향가가 비가악계 노래의 향유전통을 이으며 6·7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장르로서의 독자적 성격을 확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론 가악계 노래의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도솔가>에서 비롯되는 ‘詞腦格’의 전통이<사내>·<덕사내>·<석남사내>등을 통해 향가의 사뇌가에 잇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고, 세련된 가악계 노래의 지속적 영향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6·7세기 비가악계 노래가 도달한 시적 수준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재적 전통과 더불어 삼국시대 후기의 사회 문화적 배경 또한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6·7세기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왕권국가의 확립과 함께 본격적으로 삼국체제에 돌입한 시기다. 동시에 문화적으로 중국의 한문화와 불교문화 수용을 통한 민족문화의 자생적 기반이 이미 상당한 정도 구축되어 있던 시기다. 借字表記法의 발달, 화랑제도의 성립, 종교적 세계관의 형성 등은 그러한 가운데서도 향가의 형성과 더욱 직접적인 관련을 지닌 배경들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향가가 고구려·백제의 시가와 동질적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한동안 수수께끼로 남겨둘 수밖에 없겠지만, 어떻든 이 시기를 전후한 고구려·백제의 시가 역시 신라의 문학적 상황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成基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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