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2. 회화
  • 1) 고구려의 회화

1) 고구려의 회화

 고구려는 고분벽화의 형태로나마 삼국 가운데 가장 많은 회화를 남겨 놓고 있다. 문헌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성립 초기의 小國 단계에 이미 회화활동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334)졸본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싼 朱蒙과 松讓王의 쟁투기사에 나오는 다음 구절은 주몽의 남하이전부터 原高句麗지역에서는 이미 일정한 회화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松讓以王累稱天孫 乃自懷疑 欲試其才 乃曰 願與王射矣 以畵鹿置百步內射之 其矢不入鹿臍 猶如倒乎 王使人以玉指環 懸於百步之外射之 破如瓦解 松讓大驚”(李奎報,≪東國李相國集≫東明王編). 오늘날까지 실물로 남아 전하는 것은 고분벽화뿐이다. 화가집단이나 화가 개인에 의해 그려졌던 여러 종류, 여러 형식의 그림 가운데 고분벽화 이외의 그림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335)7세기에 일본에서 활동한 曇徵·加西溢·子麻呂 등은 여러 종류의 불교회화를 잘 그렸던 고구려 출신 화가들이다.
李東洲,≪韓國繪畵小史≫(瑞文堂, 1972).
安輝濬,<韓日繪畵 1500年>(≪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
지금까지 무덤 칸 안에 벽화를 그려 넣은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 벽화고분의 숫자는 90여 基이다. 이 가운데 고구려 전기의 수도이던 桓仁 및 集安지역에서 발견된 것이 24기, 후기의 수도인 平壤과 그 인근에서 확인된 것이 60여 기, 재령강 유역인 安岳지역에서 찾아진 것이 12기 정도이다.336)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고분의 분포와 벽화의 현황에 대해서는 全虎兌,≪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내세관표현을 중심으로≫(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7) 제1장 참조.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주로 흙무지돌방무덤(封土石室墳)에서 찾아지지만 간혹 돌방무덤에 가까운 돌무지무덤(積石塚)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집안의 禹山下 41호분은 돌무지무덤이지만 무덤칸 벽에 그림이 그려진 벽화고분이다. 이들 고구려의 벽화고분과 벽화는 遼東일대와 대동강변 樂浪지역에서 축조·제작되었던 중국 漢·魏·晋代 벽화고분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337)金元龍,<高句麗古墳壁畵의 起源에 대한 硏究-古墳美術에 끼친 中國美術의 영향->(≪震檀學報≫21, 1960;≪韓國美術史硏究≫, 一志社, 1987, 재수록).
―――,≪韓國壁畵古墳≫(一志社, 1981).
그러나 무덤축조 및 벽화제작 방식이 고구려에 수용된 이후 오래지 않아 무덤 구조나 벽화 구성, 표현 등은 고구려화 한다. 이러한 면은 357년경 제작된 안악 3호분 벽화의 등장 인물들이 전형적인 중국계 복식을 하고 있는 반면, 408년에 그려진 德興里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반세기전에 비해 상당히 고구려화 된 복식을 하고 있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고구려 고분벽화의 주제는 크게 생활풍속·장식무늬·四神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각각의 주제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독립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서로 혼합되기도 한다. 이러한 면은 시기와 지역에 따른 고구려 사회상의 변화나 내세관의 중심줄기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고분을 조성하고 벽화를 제작한 시기를 가늠하는 편년기준을 설정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고분구조와 벽화주제 등을 함께 고려하면서 고분벽화 제작시기를 가늠하여 보면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기는 3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걸치는 시기로 여러방무덤에 생활풍속이 즐겨 그려진다. 이 시기의 고분벽화는 주로 벽면에 회칠을 한 다음, 회가 마르기 전에 밑그림을 그리고 이어 채색을 하는 濕地壁畵法(프레스코법)으로 제작된다. 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초에 걸쳐 여러방무덤과 외방무덤에 생활풍속·장식무늬·사신이 독자적으로, 혹은 뒤섞여 그려지는 시기이다. 2기의 고분벽화에는 기존의 습지벽화법에, 회가 마른 다음 畵面에 그림을 그리는 乾地壁畵法(쎄코법)이 부분적으로 더해지기도 한다.338)장천 1호분 벽화가 그 좋은 사례이다.
全虎兌,<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론>(≪古文化≫50, 1997).
제3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에 걸친 시기로 외방무덤에 사신이 사실상 유일한 벽화 주제로 등장한다. 제3기의 고분벽화는 무덤칸벽 및 천장부의 석면을 잘 다듬고 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방법으로 제작되는 것이 특징이다. 대부분의 고분벽화는 模本에 따라 墨이나 목탄·먹바늘 등으로 밑그림을 그린 후, 채색하는 방법으로 제작된다. 그러나 밑그림을 따로 그리지 않은 상태로 그려진 경우도 있다. 顔料로는 朱砂·石綠·石靑·石黃·白赭石 등 천연광물질이 주로 사용되고, 식물성인 花靑·藤黃·胭脂 등과 특수한 성분으로 黃金·白銀·朱粉 등이 함께 쓰인다. 색채는 무덤칸의 분위기를 부드럽고 차분하게 하는 褐色系統이 많이 쓰이며, 흑색·황색·자색·청색·녹색 등이 함께 사용된다.

 이미 언급하였듯이 제1기는 3세기말에서 5세기초에 걸치는 시기로 생활풍속이 벽화의 중심 주제로 즐겨 택해진다. 그러나 이 시기의 벽화고분에서는 사신이나 장식무늬가 벽화 주제로 선택된 경우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생활풍속이 벽화 주제인 무덤에는 무덤 속의 방이 둘 이상인 여러방무덤이 많은 반면, 사신이나 장식무늬위주의 벽화무덤은 외방무덤인 경우가 일반적이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벽화고분은 무덤 구조와 벽화 내용이 죽은 자의 생전의 저택 구조를 재현하거나 상징적으로 드러내도록 서로 맞물리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무덤은 흔히 무덤칸의 벽모서리와 벽의 위 부분에 자주색 안료로 기둥과 들보, 頭栱 등 목조가옥의 골조를 표현하여 무덤 내부가 주택처럼 느껴지게 한다. 목조가옥의 골조 표현은 장식무늬가 주제인 같은 시기의 고분벽화에서도 보인다. 그러나 四神이 주제인 고분벽화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고분벽화의 주제로 생활풍속 및 장식무늬가 선택될 때와 사신이 선택될 때, 무덤 내부를 보는 시각이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풍속과 무늬로 장식되는 곳은 일상 생활의 공간, 혹은 수평적 來世空間인 반면, 하늘의 28별자리가 형상화된 사신이 그려지는 곳은 우주적 공간, 혹은 수직적 내세 공간으로 여겨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풍속은 죽은 자의 생전의 公的 생활 가운데 기념할만한 것과 私的 생활에서 누린 풍요로움을 무덤 안에 그림으로써 내세에도 이와 같은 삶이 재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택해진 벽화주제이다. 때문에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고분벽화에서는 무덤주인이 홀로, 혹은 부인과 함께 正坐한 채 남녀 시종들의 시중을 받는 장면, 大行列에 둘러싸여 出行하는 장면, 山野를 질주하며 사냥하는 장면, 연회를 베풀고 歌舞와 놀이를 즐기는 장면 등이 자주 나온다. 벽화 속의 인물들은 흔히 신분과 계급 정도에 따라 다른 사람의 몇 배, 혹은 몇 분의 1 크기로 그려지며, 모자와 머리모양, 입은 옷의 무늬와 빛깔의 다양성, 소매나 가랑이의 너비와 길이 등이 다르게 묘사된다.

 생활풍속을 주제로 한 평양 및 안악지역 벽화고분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안악 3호분과 덕흥리 벽화고분을 들 수 있다. 두 무덤 모두 벽화 내용이 풍부하고 잘 남아 있으며 무덤 안에 墨書銘이 있어 무덤의 조성 시기와 당시의 생활풍속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안악 3호분은 발견이래 묵서명의 주인공, 곧 336년경 前燕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冬壽가 被葬者인지, 아니면 동수는 피장자의 護衛武官에 불과하고 무덤주인공은 고구려왕 즉 美川王이거나 故國原王인지에 대한 논란에 종지부를 찍지 못한 상태이다.339)안악 3호분 주인공문제에 대한 논쟁은 金貞培,<安岳 3號墳 被葬者논쟁에 대하여-冬壽墓說과 美川王陵說을 중심으로->(≪古文化≫16, 1978)과 孔錫龜,<安岳 3號墳의 墨書銘에 대한 考察>(≪歷史學報≫121, 1989)에 잘 정리되어 있다. 덕흥리 벽화고분 역시 피장자인 鎭이 燕출신의 망명객으로 幽州刺史를 역임한 인물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고구려인으로 광개토왕대에 고구려의 幽州 經略 및 경영과 관계있는 인물인지에 대한 異見이 아직 결말을 보지 못한 문제의 유적이다.340)덕흥리 벽화고분의 주인공과 幽州문제에 대한 근래의 논고로는 손영종,<덕흥리벽화무덤의 피장자망명인설에 대한 비판(1),(2)>(≪력사과학≫1991년 1기·2기)과 孔錫龜,<德興里 壁畵古墳 被葬者의 國籍問題>(≪韓國上古史學報≫22, 1996)가 있다. 안악 3호분 및 덕흥리 벽화고분 묵서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341)두 고분 묵서명의 판독 및 역주본으로는 韓國古代社會硏究所編,≪譯註 韓國古代金石文≫제1권(1992)가 참조된다.

안악 3호분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十六日 □□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昌黎玄兎帶方太守都 □□幽州遼東平郭 □□鄕敬上里冬壽字 □硏六十九薨官

덕흥리 벽화고분

 □□郡信都「縣」都鄕「中」甘里 釋加文佛弟子□□氏鎭仕 位建威將軍「國」小大兄左將軍 龍壤將軍遼東太守使持 節東「夷」校尉幽州刺史鎭 年七十七薨「焉」永樂十八年 太歲在戊申十二月辛酉朔十五日 乙酉成遷移玉柩周公相地 孔子擇日武王「選」時歲使一 良葬送之「後」富及七世子孫 番昌仕宦日遷移至侯王 造藏萬功日煞牛羊酒肉米粲 不可盡「掃」旦食鹽「鼓」食一椋記 「之」「後」世寓寄無疆

 안악 3호분은 널길방·앞방과 좌우 곁방·널방·회랑으로 이루어진 여러방무덤으로 천정짜임은 삼각고임이며 무덤 방향은 남향이다. 평면‘T’자형 구조, 돌기둥 여러 개로 구분된 앞방과 널방, 앞방과 널방을 ‘ㄱ’자형으로 휘돌게 설치된 회랑 등 무덤 구조상의 특징이 중국 한·위·진대에 축조된 요동지역 벽화고분과 脈이 닿는다.342)金元龍, 앞의 글(1960). 널길방 벽에서 앞방의 입구 쪽 좌우 벽에 걸쳐 의장대와 鼓吹樂隊 그림, 앞방 왼쪽 벽에 手搏戱 장면, 앞방의 오른쪽 곁방 입구 좌우 벽에 護衛文武臣과 7행 68자의 묵서명, 오른쪽 곁방 안벽에는 묘주인도, 오른 벽에는 墓主婦人圖, 왼쪽 켵방 안에는 방아간·용두레우물·마구간·외양간·車庫·肉庫·주방 등 가내시설과 관련 인물들의 모습, 널방 왼벽에는 舞樂圖, 널방 천정에는 연꽃그림, 회랑에는 10.5m에 걸쳐 250명 이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규모 무덤주인 出行圖 등을 그렸다. 이들 벽화중의 인물과 각종 시설 옆에는 설명 형식의 묵서가 쓰여 있어 내용의 이해에 도움을 주고 있다. 벽화의 배치 내용과 무덤방 구조를 함께 고려하면 안악 3호분은 4세기 고구려 大貴族의 저택을 무덤 속에 재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악 3호분 벽화에 적용된 고대적 회화기법은 앞방 오른쪽 곁방의 무덤주인 夫婦圖와 회랑의 大行列圖에서 잘 드러난다. 회랑의 대행렬도는 행렬의 일부만을 그린 것인 만큼 前列·中列의 규모에 견주어 後列까지 고려에 넣으면, 행렬 전체는 500여 명에 이르는 대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행렬중의 인물을 겹쳐 그림으로써 화면에 空間感을 주려한 점이 눈에 띤다(<그림 2>). 대상을 겹쳐 그림으로써 공간적 깊이를 드러내는 기법은 고대회화에서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표현기법에 속한다. 한편, 인물들의 얼굴은 대부분 3/4側面觀이며 자세나 복장은 각기 다르나 얼굴 표정은 거의 동일하다. 대상의 개성 표현은 회화기법의 발전과도 관련 있지만 대상의 개별성에 대한 인식과도 관련이 깊다. 한 인간을 부족이나 씨족의 구성원으로서가 아니라 한 가문을 대표하는 자로, 혹은 개개의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고대사회의 마지막 시기, 혹은 중세사회 초기에 이르러서이다.343)盧泰敦,<羅代의 門客>(≪韓國史硏究≫21·22, 1981)은 이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따라서 비교적 세련된 표현기법에도 불구하고 벽화중의 인물들이 沒個性的으로 그려진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방식상의 시대적 한계도 일부 작용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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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안악 3호분 대행렬도 部分
<그림 2>안악 3호분 대행렬도 部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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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쪽 곁방의 무덤주인과 그의 부인은 각각 꼭대기의 두 귀퉁이와 한 가운데가 연봉오리 및 반쯤 핀 연꽃으로 장식된 榻蓋 안에 앉아 政事를 보고 있거나 시중을 받고 있다(<그림 3>). 정좌한 무덤주인을 중심으로 그 좌우의 인물들은 지위와 거리에 따라 점차 작아져 화면 전체가 삼각형의 구도를 이루게 하고 있는데, 이러한 구도는 무덤주인 쪽을 바라보며 약간 비스듬히 앉은 부인도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무덤주인과 侍者들의 얼굴은 몰개성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나, 무덤주인의 옷주름 표현에는 초보적인 형태로 나마 泰西法, 혹은 凹凸法에 비견될 기법이 적용되고 있다.344)安輝濬,<韓國古代繪畵의 特性과 意義-三國時代 人物畵를 中心으로->上·下(≪美術資料≫41·42, 1988). 탑개의 연꽃과 연봉오리는 고구려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전래되는 372년 이전, 늦어도 4세기 중엽 경에는 개별적이거나 非公式的인 형태로 소개되고 수용되었음을 시사하는 자료 가운데 하나이다.345)全虎兌,<5세기 高句麗古墳壁畵에 나타난 佛敎的 來世觀>(≪韓國史論≫21, 서울大,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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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안악 3호분 묘주인도
<그림 3>안악 3호분 묘주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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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흥리 벽화고분(408)은 널길, 앞방과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두방무덤으로 천장부는 돔식이며 무덤방향은 남향이다. 무덤방벽과 천장부 하단에 목조가옥의 골조를 그려 넣은 다음 그 안에 생활풍속을 묘사함으로써 무덤방안을 피장자의 집으로 상정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널길 벽에는 괴물수문장·연꽃·인물을, 앞방 벽에는 무덤주인의 출행도·13郡 太守拜禮圖·무덤주인의 幕府業務圖 등을, 앞방 천장부에는 해와 달·60여 개의 별자리·별자리신앙과 관계된 상상 속의 존재들과 사냥 장면을 그렸다. 이음길 입구 상단에는 묵서로 墓誌銘을 썼다. 이음길 벽에는 무덤주인의 부인이 주인공인 듯한 출행도가 있으며 널방 벽에는 연못과 묘주인의 七寶供養行事圖·馬射戱圖·牛轎車圖·무덤주인정좌도 및 마구간과 외양간·누각과 高床倉庫 등의 가내시설들이, 널방 천장에는 활짝 핀 연꽃과 구름 등이 자리잡았다. 벽과 천장부에 그려진 인물과 시설, 행사장면 옆에는 안악 3호분의 경우에서와 같이 설명 형식의 묵서가 쓰여 있다. 벽화의 배치로 보아 5세기초에는 고구려 귀족의 저택이 사랑채와 안채로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재의 구성내용으로 볼 때,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손님을 맡거나 공적업무를 처리하는 장소로 쓰였으며, 안채는 놀이 및 휴식과 사적 행사를 위한 생활공간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346)장상렬,<덕흥리벽화무덤에 반영된 건축술에 대하여>(≪덕흥리고구려벽화무덤≫,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81;朝鮮畵報社編, 高寬敏日譯,≪德興里高句麗壁畵古墳≫, 講談社, 東京, 1986).(<그림 4>). 덕흥리 고분벽화에서 주목되는 것은 무덤주인 초상의 표현과 그 위치·인물·동물·산수의 표현양식·불교관계 표현과 묵서묘지명의 내용 등이다. 무덤구조가 고구려식의 두방무덤으로 바뀌면서 무덤주인의 초상은 곁방에서 앞방 안벽과 널방 안벽으로 옮겨졌다. 무덤주인 초상에 적용되던 화면상의 삼각형 구도는 이전에 비해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나, 대상비중법칙에 기초한 신분비례적 인물 표현은 바뀌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엄격해졌다. 13군 태수배례도나 무덤주인 출행도 등에 보이는 인물 표현은 여전히 몰개성적이다. 반면 개별 제재의 표현기법과 수준은 오히려 더 낮아져 인물이나 동물 모두 나란히 펼쳐져 표현됨으로써 화면상의 공간감은 크게 약화되었다. 복식은 안악 3호분벽화의 인물에 비해 고구려화 되었는데, 시녀의 주름치마 등에서 이러한 흐름이 잘 드러난다. 앞방 천장부 아랫부분 사냥도중의 산과 나무는 둥글게 오려 나란히 붙인 판지 위에 유황덩이가 큰 성냥개비를 세워 놓은 듯한 모습으로 그려졌다.347)安輝濬,<韓國山水畵의 發達硏究>(≪美術資料≫26, 1980;≪韓國繪畵의 傳統≫, 文藝出版社, 1988에 재수록). 이것은 벽화를 그린 화가가 산수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만한 회화 수준에 이르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산수가 아직은 독자적인 회화 표현의 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했던 데에 말미암은 면도 있을 것이다.348)李泰浩,<韓國古代山水畵의 發生硏究-三國時代 및 統一新羅時代 山岳 및 樹木表現을 中心으로->(≪美術資料≫38, 1987). 널길벽부터 나타나는 연꽃과 널방의 연못 및 칠보공양도로 보아 무덤주인 鎭은 생시에 각종 공양을 통해 淨土往生을 기원하던 독실한 불교신자이기도 했겠으나, 묵서 묘지명중의 “孔子擇日 武王選時…周公相地” 등의 내용으로 볼 때, 중국 전래의 전통적인 葬儀觀도 아울러 지니고 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349)全虎兌,<고구려의 五行信仰과 四神圖>(≪國史館論叢≫48, 國史編纂委員會,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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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덕흥리 벽화고분
<그림 4>덕흥리 벽화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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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두 고분벽화 외에도 제1기 평양·안악지역 고분벽화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遼東城과 그 안의 3층탑이 그려진 遼東城塚, 천장부가 화려한 연꽃무늬로 장식된 안악 1호분, 천장부에 간결하고 짜임새 있는 별자리가 남아 있는 伏獅里 壁畵墳 등이 있다. 생활풍속이 주제인 평양지역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대개의 경우 맞섶이나 오른섶에 소매와 통이 넓은 중국계 복장을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지역에 彩篋塚과 같은 중국계 덧널무덤(木槨墓)을 남긴 樂浪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제1기에 속하는 집안지역의 벽화고분으로 생활풍속이 벽화 주제인 무덤 가운데에는 角抵塚과 舞踊塚이 두드러진다. 禹山 남쪽기슭에 나란히 축조된 두 무덤은 똑같이 퇴화형 앞방과 정방형에 가까운 널방을 지닌 두방무덤으로 앞방 천장짜임은 穹窿式, 널방 천장짜임은 變形 8각고임이며 서남향이다. 두 무덤의 내부는 목조건축의 골조그림에 의해 각 벽면과 천장부가 나누어졌으며, 벽면의 개별 화제는 큰 나무로 구분되었다. 무덤 구조 및 벽화 내용으로 보아 각저총과 무용총의 조성 시기는 평양지역의 안악 3호분 및 덕흥리 벽화고분보다 늦은 5세기초에서 중엽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350)全虎兌,<고구려 각저총벽화 연구>(≪美術資料≫57, 1996).

 각저총은 앞방 네 벽과 널방 앞벽에 커다랗게 그려진 나무들과 커다란 나무 옆에서 노인을 심판으로 삼아 씨름에 열중하는 매부리코의 서아시아계 인물과 고구려인의 그림으로 잘 알려졌다. 또한 두 부인을 거느린 무덤주인의 정좌상이 표현된 널방 안벽그림과 초롱무늬와 해와 달, 별자리들로 장식된 널방 천장부 벽화로도 관심을 모았던 고분이다. 널방 안벽의 무덤주인부부와 시종은 같은 시기 평양지역 생활풍속계 고분벽화에서와는 달리 가내생활중의 여유로운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그림 5>).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볼에 군살이 없이 얼굴선이 깔끔하게 내려오는 고구려인 특유의 얼굴을 지녔다. 이들의 얼굴표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벽면의 나무들은 하나

 이 가지는 자색으로, 잎은 연녹색으로 채색되었다. 가지와 잎 모두 윤곽선 없이 채색한 듯하여 윤곽선이 뚜렷한 인물화와 표현기법상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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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각저총 묘주부부도
<그림 5>각저총 묘주부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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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자로 교차하며 얽힌 가지, 버섯의 갓모양 덩어리진 잎 등은 표현기법상 중국 漢代 畵像石墓 그림중의 連理樹를 연상시키는 면도 있다. 그러나 집안을 비롯하여 동북아시아의 온대지역에서 자라는 가래추자나무류는 5월경 가지 끝에서 잎이 덩어리지듯이 돋는다. 신록의 계절에 흔히 볼 수 있는 가래추자나무의 이러한 모습과 이를 보면서도 묘사가 따르지 못했던 화가의 회화기교상의 한계가 맞물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 아닐까.351)전호태, 위위 글(집안을 비롯한 이 일대에서는 ‘가래’를 장수와 관련한 약재로 인식하고 복용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씨름장면의 일부인 커다란 자색나무의 가지 사이에 표현된 검은 새 여러 마리와 나무 밑둥 좌우의 곰과 호랑이는 당시 고구려인의 전통신앙과 관계 있는 동물이다. 이들은 자세와 표정에서, 화면의 다른 제재와 함께 풍속화적 표현의 한 단계를 보여주는 존재이다.352)安輝濬, 앞의 글(1980).

 무용총은 널방 왼벽의 歌舞徘送圖, 오른벽의 狩獵圖, 안벽의 墓主接客圖, 천장부의 手搏戱장면과 四神, 彈琴仙人과 乘鶴仙人 등 여러 선인들, 麒麟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상서로운 새와 짐승들, 하늘로 떠오르는 연꽃과 연봉오리, 해와 달, 별자리로 가득한 하늘세계 그림으로 잘 알려진 무덤이다. 널방 왼벽의 가무배송도는 말을 타고 나가는 무덤주인과 그 뒤의 侍童, 무덤주인을 배웅하는 무용수들과 합창대로 이루어졌는데, 5세기 전반 집안지역 화가의 기량을 잘 드러내고 있어 눈길을 끈다(<그림 6>). 무용수 가운데 나란히 선 듯한 다섯 사람은 실제로는 비스듬한 선을 이루는 세 사람과 수평선상에 나란히 선 두 사람으로 나뉜다. 이는 앞의 세 사람 가운데 둘째와 셋째 사람의 두루마기 빛깔이 다르게 표현하고, 넷째와 다섯째 사람의 저고리와 바지색이 서로 엇바뀌게 그리며, 합창대로 추정되는 일곱 사람 가운데 셋째 사람을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모습으로 그리는 등의 방법과 함께 화면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려는 화가의 의도에 따른 창의적 표현으로 적절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 무용수들은 한결 같이 두 팔을 一字로 펴면서 뒤로 제킨 듯한 자세인데, 화면상으로는 두 팔이 한쪽 겨드랑이에서 돋아난 듯이 표현되었다. 화가의 표현기량이 한계를 드러낸 부분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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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무용총 가무배송도 部分
<그림 6>무용총 가무배송도 部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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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 벽의 수렵도에는 사냥자와 짐승들 사이에 형성되는 사냥터 특유의 쫓고 쫓기는 급박한 흐름이 힘있고 간결한 필치로 잘 표현되었다. 놀라 달아나는 호랑이와 사슴들, 말을 질주시키며 정면을 향해, 혹은 몸을 돌려 활시위를 당기려는 騎馬人物의 자세는 굵고 가는 파상선 띠겹침으로 표현된 산줄기에 의해 한층 더 속도감과 긴장감을 부여받고 있다. 사람과 짐승의 자세와 동작이 비교적 정확하면서도 세련되게 표현되었다. 반면, 산줄기는 공간감을 결여하였고 산봉우리의 나무는 고사리순처럼 표현되는 등 산수의 묘사수준은 초보적이다. 이러한 점은 평양지역 덕흥리 벽화고분중의 수렵도에서와 같으나 화가의 전반적인 표현기량은 이전보다 향상되고 있다. 산줄기를 사이에 둔 사람과 짐승들 사이의 遠近 比例가 무시되거나, 산과 사람, 짐승, 나무 사이에 大小 비례가 맞지 않는 점 등은 화면 전체에 흐르는 강한 운동감에 의해 溶解되어 전혀 어색한 감을 주지 않는다. 가장 가까운 산은 흰색, 그 뒤의 산들은 붉은 색, 먼 산은 노란 색을 바탕색으로 한 것은 보는 사람에게서 멀어짐에 따라 白-赤-黃의 차례로 채색하는 고대 設彩法의 원리에 따른 것이다.353)安輝濬,<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회화>(≪韓國繪畵史≫, 一志社, 1980).

 안벽의 墓主接客圖는 무덤주인과 대화하는 두 인물이 승려인지의 여부로 말미암아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무덤주인이 더 이상 神像과 같이 정좌한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특정 장면의 주요 등장인물의 하나로 그려져 내세관의 변화와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그림이기도 하다.354)金元龍,<高句麗古墳壁畵에 있어서의 佛敎的 要素>(≪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1959;≪韓國美術史硏究≫一志社, 1987에 재수록).
全虎兌, 앞의 글(1989).
천장부의 四神은 제1기로 편년되는 집안지역 벽화고분 가운데 벽화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어 눈에 띤다. 靑龍과 白虎는 각종 동물의 특징이 어색하게 배합된 모습이며, 朱雀은 장닭과 같이 그려졌다.

 각저총을 비롯한 제2기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인물들은 흔히 고구려 특유의 점무늬가 있는 왼섶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진다. 같은 시기 평양지역 고분벽화 인물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늬 없는 맞섶 내지 오른섶 옷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355)최원희,<고구려 녀자옷에 관한 연구>(≪문화유산≫1962년 2기).
劉頌玉,<高句麗服飾硏究>(≪成大論文集≫28, 1980).
왼섶은 북방 유목계 복장의 특징적 요소의 하나이다.

 제2기는 5세기 중엽에서 6세기초에 걸치는 시기로 외방이나 두방무덤에 생활풍속과 사신, 혹은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공존하는 그림과 장식무늬만을 주제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진다. 생활풍속이 벽화의 주제인 경우는 극히 드물게 발견된다. 평양과 안악지역에서는 생활풍속과 사신이 공동의 벽화주제로 즐겨 택해지는 반면, 집안지역에서는 생활풍속과 장식무늬를 공동주제로 하거나, 장식무늬만을 주제로 삼은 무덤이 흔히 찾아진다. 벽화의 장식무늬로는 同心圓文, ‘王’字文, 연꽃문 등이 즐겨 선택된다. 이 가운데 연꽃문을 벽화의 유일한 주제로 삼은 벽화고분이 다수 발견되는 것과 5세기에 이르러 고구려에서 불교가 크게 유행하는 것은 상호관련이 깊다. 무덤 안에 그려진 연꽃문은 대개의 경우 죽은 이의 정토왕생을 희구하는 표현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356)全虎兌,<고구려고분벽화에 나타난 하늘연꽃>(≪美術資料≫46, 1990).

 이 시기의 고분벽화에서 일부 인물묘사는 매우 세련된 수준에 이르나, 산수는 여전히 초보적인 표현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장식무늬 가운데 구름무늬나 불꽃무늬류는 점차 단순해지는 반면, 연꽃무늬와 인동당초무늬류는 점차 복잡하고 화려해진다. 사신과 祥禽瑞獸類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세련되어지는 묘사기법에 의해 상상적 존재 특유의 사실성을 갖추어가기도 한다.

 생활풍속과 장식무늬가 벽화 주제로 공존하는 집안지역의 대표적인 벽화고분으로는 長川 1호분을 들 수 있다. 장천 1호분은 전형적인 두방무덤으로 앞방 앞벽 좌우에 守門衛士, 왼벽에 歌舞進饌, 오른벽에 百戱伎樂과 사냥장면, 안벽 좌우에 문지기, 이음길 좌우벽에 시녀, 앞방 천장부에 四神·戰鬪·菩薩·如來坐像과 禮佛供養者·飛天과 伎樂天·연꽃과 蓮花化生 등을 그렸으며, 널방 벽과 천장부에 연꽃, 천정석에 해와 달·북두칠성 등을 그렸다. 벽화중의 인물표현에서 주목되는 것은 실물 크기로 그려진 문지기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뚜렷한 개성이다(<그림 7>). 둥근 얼굴, 부드러운 눈매,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모아 쥔 공손한 자세로 말미암아 文人을 연상시키는 오른벽 인물과 달리, 왼벽 인물은 각진 얼굴, 날카로운 눈매, 두 손을 배앞에 대고 상대를 위압하려는 듯한 자세로 말미암아 武人的 기질을 느끼게 한다. 각저총과 무용총벽화에서 싹튼 인물의 개성 표현이 이 벽화에 이르러 줄기를 뚜렷이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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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장천 1호분 守門人圖
<그림 7>장천 1호분 守門人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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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에 부여한 비중에 따라 크기를 조절하는 고대적인 표현방식 또한 이 시기에 이르면 서서히 拂拭되어간다. 백희기악과 가무진찬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과 동물들 사이에 적용된 表現 比例差는 사람보다 몇 배 크게 그려진 흰말 정도를 예외로 하면, 앞 시기의 벽화에 비해 크게 줄어들고 있다.357)全虎兌,<高句麗 古墳壁畵 人物圖에 나타난 身分觀-집안지역을 중심으로->(≪韓國古代의 身分制와 官等制≫, 민음사, 1998).

 벽화에서 확인되는 인물표현 기량의 발전, 대상비중 표현방식의 止揚은 5세기 전후 고구려의 폭넓고 밀도 있는 대외관계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358)全虎兌,<고구려장천1호분벽화의 서역계 인물>(≪蔚山史學≫6, 1993). 5세기경의 고구려는 중국의 南北朝 뿐 아니라 스텝지대의 유목국가 및 중앙아시아지역과도 사절을 교환하였으며, 이 과정에 이들 지역에서 번성하던 불교문화 및 이와 관련된 제반요소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앞방 천장부의 보살도와 예불공양도 등은 이 시기의 고구려문화가 불교회화와 접촉하면서 새로운 회화기법을 받아들여 익혀가고 있었음을 알게 하는 좋은 사례이다. 천장부 안쪽면 4·5층고임의 한가운데 묘사된 飛天의 正面下降 모습은 앞 시기의 벽화에서는 적용사례가 없던 短縮法으로 그려 기대했던 표현효과를 얻어내고 있다. 반면, 2·3층고임 오른편의 남녀공양자가 행하는 五體投地의 예불모습은 적절한 표현기법을 찾지 못해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하고 있다(<그림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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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장천 1호분 예불공양도
<그림 8>장천 1호분 예불공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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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여래와 공양자 사이에 표현 비례차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비천과 기악천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다양한 자세와 유연하고 힘찬 몸놀림을 보여준다. 모두 고구려문화가 불교회화와 접촉하면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다.

 천장부 안쪽 면 1층고임에 그려진 四神은 무용총벽화의 사신에 비해 일층 세련된 모습을 보여준다. 청룡과 백호의 탄력있게 제킨 목, 뒤로 가며 부드럽게 휘어 올라간 몸통, 逆 ‘S’字꼴로 뻗어나간 꼬리 등 몸체 각 부분의 굵기와 자세, 얼굴 세부요소 사이의 어울림은 매우 자연스러워 고구려 회화가 앞 시기와는 다른 수준의 표현단계에 이르렀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蓮類식물을 사이에 두고 나래치고 있는 암수주작에는 세련된 묘사와 어색한 표현이 뒤섞여 있다. 비교적 가볍게 위로 치켜진 꼬리깃, 짧고 통통한 새다운 몸통과 지나치게 두터운 부리와 벼슬, 반원꼴로 편 가죽막과 같은 날개를 지닌 암수주작을 청룡·백호와는 달리 未完成의 남방수호신으로 인식하게 한다.359)全虎兌, 위의 글.

 생활풍속과 사신이 함께 나타나는 평양과 안악지역의 생활풍속계열 무덤에서는 초기단계에는 사신이 무덤 돌방의 천장부에 하늘별자리와 함께 그리 높지 않은 비중으로 그려진다. 이어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서 사신은 생활풍속장면과 벽의 위와 아래를 나누어 표현되다가, 마지막에는 벽면에 가득차게 그려진다. 이와 대조적으로 생활풍속 그림의 벽화 내 비중은 점차 낮아지다가 결국 소멸한다. 사신계열의 무덤에서는 생활풍속그림이 일시 함께 그려지는 듯하다가 곧 사신 위주로 바뀐다. 이와 같은 현상은 시간이 흐르면서 고분벽화의 주제로서 생활풍속보다는 사신이 選好되었음을 의미한다. 두 계열 모두에서 무덤의 돌방 천장부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여 벽화 내 비중이 낮은 단계의 사신은 문헌상으로 전하는 갖가지 동물의 형상적 특징을 어색하게 합성시킨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벽면의 半이상을 차지하는 단계에 이르면 상상동물 특유의 신비성을 갖춘 사실적 형태로 그려진다.360)全虎兌, 위의 글.

 雙楹塚은 벽화중의 사신 비중이 높아지면서 생활풍속의 후퇴가 뚜렷이 진행되던 시기의 생활풍속계열 벽화무덤이다. 널길 좌우 벽에 행렬, 앞방의 입구 좌우 벽에 守門衛士, 앞방 좌우 벽에 청룡과 백호, 안벽 좌우에 문지기를 그렸으며, 앞방과 널방 사이에 세워진 두 개의 8각 돌기둥에는 龍, 널방 앞벽 위 소슬그림 사이에 주작 한 쌍, 왼벽 윗 부분에 귀부인을 주인공으로 한 공양행렬, 안벽에 부부정좌상과 雙玄武를 묘사했다. 이처럼 구성된 벽화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인물과 사신의 묘사이다. 널길 벽과 널방 왼벽의 인물들은 앞 시기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깔끔하고 세련된 필선으로 묘사한 데에 비해, 널방 안벽의 무덤주인부부는 여전히 별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神像型 인물로 그렸다. 더욱이 그 크기는 앞 시기의 다른 벽화에 비해 작아졌다. 이것은 화가에 의한 인물표현 기량은 앞 시기보다 나아졌으나, 벽화 중에 무덤주인부부를 그려 넣을 필요성은 오히려 낮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기의 인물묘사 수준은 水山里 고분벽화의 인물도 및 안악 2호분 벽화 중의 비천도에서도 그 세련됨이 거듭 확인이 된다. 사신 역시 앞방의 청룡과 백호는 세련된 모습으로 벽면에 넓게 자리잡고 있으나, 널방의 주작과 현무는 어색한 형태로 벽면 위나 한편에 좁게 자리잡고 있어 대조를 이룬다. 대상에 대한 인식의 깊이와 표현기량의 발달 정도는 상호 비례함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德花里 1호분은 널방 앞벽에 주작, 좌우 벽에 청룡과 백호, 안벽 상부에 인물행렬, 하부에 현무, 천장부에 해와 달, 北斗七星과 南斗六星, 천정석에 연꽃이 그려진 생활풍속 소멸 단계의 사신계열 무덤이다. 청룡과 백호는 직선형 몸통과 계단형 꼬리로 대표되는 초기 사신표현의 특징적 요소를 아직 지니고 있으나 얼굴 세부요소 사이의 조화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주작 역시 몸의 각 구성요소 사이에 어색함이나 이지러짐이 없고, 현무는 守護神的 존재로서의 모습을 의연히 드러내며 벽면 아래 부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청룡·백호와 주작·현무 사이에 존재했던 인식과 표현기량의 격차가 극복·해소되고, 사신표현에 상상적 사실성이 담겨지는 단계의 한 예이다.361)全虎兌, 위의 글.

 제3기는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전반에 걸치는 시기로 널방만 있는 외방무덤에 사신도가 즐겨 그려진다. 무덤은 모두 뒤로는 산을 지고, 앞으로는 들을 내다보는 구릉기슭에 남향으로 축조된다. 평양과 안악지역의 제3기 벽화고분으로 대표적인 것은 眞坡里 4호분, 內里 1호분, 江西大墓, 江西中墓 등을 들 수 있으며, 집안지역의 벽화고분으로는 通溝 四神塚, 五盔墳 5호묘, 五盔墳 4호묘를 꼽을 수 있다. 이 시기 고분벽화의 사신은 널방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사실상 유일한 제재로 단순히 하늘별자리가 형상화된 방위신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의 세계를 지켜주는 우주적 수호신이다.

 평양지역 고분벽화에서 사신은 6세기 전반 南朝美術의 영향을 짙게 담은 진파리 1호분과 진파리 4호분의 단계를 지나면 배경 표현을 가능한 한 배제한 상태에서 묘사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비해 집안지역 고분벽화에서는 사신이 복잡하고 화려한 배경 위에 표현되는 경향을 보여 준다. 사신 자체의 표현도 평양지역이 세부묘사를 과감히 생략하고 색조의 조화와 動勢의 표현을 중시한 반면, 집안지역은 색채의 강렬한 대비와 치밀한 세부묘사에 치중하는 등 두 지역이 똑같이 사신을 벽화의 주제로 삼으면서도 그 표현방식은 서로 차이를 보인다. 5세기말 평양을 중심으로 성립했던 고구려적 보편문화가 6세기 전반 이후 더 이상 확대·발전하지 못하고, 문화의 중심이 다시 평양과 집안으로 二元化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362)全虎兌,<高句麗 後期 四神系 古墳壁畵에 보이는 仙·佛 混合的 來世觀>(≪蔚山史學≫7, 1997).

 제3기의 이른 시기로 편년되는 평양지역의 벽화고분 가운데 진파리 4호분에는 널길 벽에 연못, 널방 네 벽에 사신, 천장고임에 연꽃인동무늬류, 천정석에 금빛 별자리를 그렸다. 진파리 1호분에는 널길 벽에 守門天王, 널방 벽에 사신, 천장고임에 구름무늬와 연꽃인동무늬, 천정석에 해와 달 및 인동무늬를 묘사하였다. 진파리 4호분 벽화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널길 벽의 연못그림이다(<그림 9>). 널길 벽에는 중첩한 높은 산과 빽빽이 솟은 소나무에 둘러싸인 연못을 그렸는데, 잔물결이 일고 있는 수면 위의 珊瑚, 연못 한가운데로 뻗어 오른 연줄기와 활짝 핀 연꽃, 그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치뻗은 인동잎과 연잎, 연못 위 허공에 떠 바람에 날리는 듯한 수염털 달린 인동연봉오리, 소나무줄기 사이로 빛나는 금빛의 십자꽃잎무늬, 산밑의 암괴 등이 서로 어울리면서 연못에 신비스런 분위기가 감돌게 한다. 이른바 불교에서 말하는 淨土蓮池이다.363)李殷昌,<高句麗園林史硏究>(≪韓國傳統文化≫2, 1986). 산과 나무의 표현에 圖式性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앞 시기와는 달리 선의 굵고 가늘기와 색의 짙고 엷음으로 대상의 부피감을 드러내려한 흔적이 있으며, 좌우대칭적 구도 속에서도 세부표현에 변화를 주어 공예화라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 하고 있다. 이전과는 다른 수준의 산수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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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진파리 4호분 연지도 모사선화
<그림 9>진파리 4호분 연지도 모사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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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파리 1호분 널방 안벽의 玄武는 바람에 휘날리는 구름과 인동연꽃, 수염털 달린 연봉오리들로 가득한 들판 한가운데에 서 있는데, 현무의 좌우에는 각 두 그루씩의 커다란 소나무와 크고 작은 산과 다수의 樹木이 묘사하였다. 濃淡이 가해진 나무 밑의 암산과 암산 너머 먼 산에 線描된 수목은 소박하게나마 이 산수에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으며, 바람에 크게 흔들리는 듯한 화면 좌우의 큰 소나무는 沒骨法으로 실재감 있게 그렸다. 6세기 고구려 회화에서는 산수표현 역시 높은 수준에 이르게 됨을 알게 한다.

 위의 연못그림 및 현무그림에서 본 것과 같이 좌우에 산과 나무를 배치하고 그 사이 공간에 중심적 제재를 그려 넣는 대칭성 화면구성 방식과 배경에 하늘을 흐르는 구름과 바람에 휘날리는 듯한 인동연꽃 및 수염털 달린 연봉오리를 그려 화면 전체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표현기법은 5∼6세기 중국 남조 회화에서 발견되는 특징적 요소이기도 하다.364)吉村怜,<南朝天人圖像の北朝及ひ周邊諸國への傳波>(≪佛敎藝術≫159, 1985). 두 무덤의 벽화는 고구려가 남조미술의 이러한 회화기법을 받아들인 다음, 여기에 특유의 힘과 생명력을 더함으로써 고구려화하던 시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제3기의 늦은 시기로 편년되는 강서대묘와 강서중묘벽화는 고구려회화가 중국 남조미술의 영향에서 벗어나 보편성을 띤 獨自의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나갔는지를 보여준다. 두 무덤 모두에서 사신은 아무런 배경 없이 벽면에 그려졌으나 세련된 필치와 선명한 채색으로 말미암아 상상적 동물임에도 실재하는 존재인 듯이 느껴진다. 사신이 획득한 실재성은 無背景의 벽면에 깊은 공간감을 주어 벽면이 마치 아득한 하늘세계인 듯이 느껴지게 한다. 특히 강서대묘의 현무와 주작, 강서중묘의 청룡과 백호는 각 무덤 널방에 그려진 다른 두 벽의 사신과도 뚜렷이 구별될 만큼 회화적 완성도가 높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서도 특정한 대상이 지닌 부피감은 효과적으로 표현되지 못하는데, 강서대묘의 현무에서 이러한 면이 잘 나타난다(<그림 10>). 네 다리로 버티고 선 거북을 힘을 뿜어내며 움직이는 존재로, 거북 몸을 감은 뱀을 탄력과 긴장감으로 가득한 동물로 그려내면서도, 뱀과 거북이 몸이나 목을 뒤트는 부분의 묘사는 평면적인 線처리에만 의존함으로써 부피감을 제대로 나타내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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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0>강서대묘 현무도
<그림 10>강서대묘 현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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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도의 이러한 특성과 관련하여 눈길을 끄는 것은 벽화중의 산수도이다. 강서대묘 널방 앞벽 암수주작 아래에 그려진 산악도는 산능선을 따라 엷게 淡彩를 가하여 제한적이나마 산의 부피감을 나타냈다. 뿐만 아니라 가까운 산은 크고 뚜렷하게, 먼 산은 가까운 산과 거리를 두고 작고 희미하게 묘사함으로써 산의 遠近을 알 수 있게 하여 화면 자체에 깊은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다. 같은 무덤의 널방 천장고임 제3층 오른쪽면의 산수도에도 대상이 지닌 원근감과 공간감을 나타내는 기법은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나아가 산주름을 나타내는 皴法이 시도된 흔적도 있다(<그림 11>).365)安輝濬, 앞의 글(1980) 및 李泰浩, 앞의 글(198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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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1>강서대묘 산악도
<그림 11>강서대묘 산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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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산수도에는 산능선에 나 있는 나무도 묘사되었는데, 간략한 필치에 의한 것이나 제법 사실적이다. 강서중묘 널방 안벽 아래부분의 산악도 역시 산의 능선표현에 농담의 변화가 있고, 산의 내부에는 담채가 가해졌다. 이러한 류의 산수도는 역시 제3기의 벽화고분인 내리 1호분의 널방 천장고임 제1층 동북모서리에도 보이는데, 산능선을 따라 그려진 수목에 원근 및 대소비례 개념이 적용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처럼 강서대묘와 강서중묘 벽화를 제작할 즈음의 고구려 회화는 원근비례 개념에 입각한 대상의 표현, 화면 안에 거리와 공간을 부여하는 표현기법에 상당히 익숙해 있다. 이 때문에 앞 시기와는 다른 산수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고분벽화라는 實用畵의 일부로, 사냥장면이나 하늘연못, 사신의 배경으로만 그려지던 산수가 感賞畵의 하나이자 독립된 회화주제가 될 조짐이 이미 고분벽화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면에 원근감과 공간감을 부여하는 기법의 하나인 부피감 표현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화가의 입장에서 볼 때, 산수와 같이 평면상에 정지해 있거나 평면상의 좌우상하의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물체가 지닌 부피감은 어느 정도 묘사해내고 있으나, 현무의 뱀과 거북과 같이 평면상에서 다양한 각도로 운동방향을 바꾸고 있는 상태의 물체가 지닌 부피감은 전혀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부피감 표현에서의 이 같은 한계는 고구려뿐 아니라 당시의 東아시아회화가 공통적으로 마주치고 있던 회화기법상의 과제중 하나이기도 하였다.

 제3기에 속하는 집안지역 고분벽화는 고구려 특유의 힘과 긴장감, 6세기경 집안문화만의 화려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함께 담아내고 있어 고구려 후기문화의 지역적 성향과 특징을 이해하는 실마리를 제공한다.366)全虎兌, 앞의 글(1997c).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집안벽화에는 같은 시기 평양지역 사신도벽화로는 그 기법과 수준을 알기 어려운 인물화자료가 다수 남아 있다. 눈길을 끄는 부분이다.

 이 시기의 고분벽화의 특징은 五盔墳 5호묘와 오회분 4호묘 벽화 널방 벽 및 천장고임그림에 잘 담겨 있는데, 벽과 고임그림에 적용된 구도와 기법에 따라 회화적 효과가 조금씩 다르다. 널방 벽의 사신은 忍冬과 불꽃, 혹은 化生중인 인동 및 인동연꽃 위의 化生天人으로 채워진 화려한 連續變形 龜甲文 위에 세련되고 숙달된 필치로 묘사되었다. 청룡과 백호는 아가리를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 상대를 덮쳐 내릴 듯한 자세로 하강하고 있으며, 주작은 크게 나래치고 있고, 현무는 대지 위에 힘있게 버티고 서 있다(<그림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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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오회분 4호묘 청룡도
<그림 12>오회분 4호묘 청룡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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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신의 몸체는 세부까지 세밀하게 묘사되었고, 五色으로 화려하고 선명하게 채색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선명한 윤곽선과 엄격하게 구분된 채색띠, 규칙적이고 도식적인 세부표현 등은 오히려 神獸로서 사신이 지녀야할 신비성과 사실성을 약화시키고 있다. 나아가 화려한 배경그림은 壁紙와 같은 효과를 가져와 이러한 종류의 화면이 지녀야할 공간감을 약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사신의 신수적 힘과 운동력을 떨어뜨리고 있다.367)전호태, 앞의 글(1993a).

 오회분 5호묘 널방의 천장고임에는 제1층에 인동당초, 위·아래로 연속마름모와 원점무늬에 둘러싸인 連續蛟龍文, 제2층에 활짝 핀 연꽃, 하늘세계를 받치는 용, 해와 달의 神, 용이나 瑞獸를 탄 天神, 수레바퀴 신, 대장장이 신, 불의 신, 농업의 신 등과 이들 사이의 나무, 제3층에 연속 고령문, 용을 탄 奏樂天人 및 해와 달, 별자리, 흐르는 구름 등을 그렸다. 오회분 4호묘 천장고임의 그림내용도 이와 거의 같다. 이처럼 두 고분 천장고임그림의 제재는 매우 다양하지만 제재 사이에 공간적 여유를 두어 화면구성에 질서를 부여하고 있다. 또한 필요에 따라 제재 사이에 나무나 용, 구름 등을 그려 넣음으로써 화면 전체의 밀도를 조절하여 널방 벽과는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각 제재를 그려내는 기법과 기량도 매우 뛰어나다. 2층고임의 神들 사이에 그려진 나무는 잎이 가지 끝에 둥근 부채처럼 모여 있고 각기 색깔이 달라 상상 속에서 변형된 존재임을 알 수 있는데, 잎에 濃淡을 가하여 입체감을 드러내려 하였다. 3층고임의 흐르는 구름에도 陰影이 가해지고 있다. 2층고임의 四肢를 꿋꿋이 세우고 등으로 하늘세계를 떠받치는 용의 탄력있는 자세, 3층고임의 옷자락을 나부끼며 피리와 장고의 연주에 몰두하는 주악천인들의 유연한 몸짓, 2층 및 3층고임 神과 天人들의 길고 갸름한 얼굴 등은 화가의 정확한 관찰력과 뛰어난 묘사력이 전제된 표현들이다. 특히 오회분 4호묘 널방 2층고임의 伏羲·女媧형 해와 달의 神은 그 조형적 연원은 중국에 있는 듯 보이나, 벽화에서는 고구려적인 힘과 분위기를 지닌 존재로 재창조된 모습을 보여준다(<그림 13>).368)權寧弼,<高句麗壁畵의 伏羲·女媧圖>(≪空間≫207, 1984).
全虎兌,<고구려고분벽화의 해와 달>(≪美術資料≫50, 1992).
고구려 회화, 그 바탕이 된 고구려 문화의 저력을 실감하게 하는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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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3>오회분 4호묘 일월신도
<그림 13>오회분 4호묘 일월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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