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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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백제의 회화

2) 백제의 회화

 백제의 회화는 남아 전하는 양이 적을 뿐 아니라 그나마 熊津(公州)과 泗沘(夫餘)시대에 제작된 것뿐이다. 백제계 화가로 일컫는 因斯羅我의 渡日이 463년으로 기록되었으나 그 회화 傾向은 전하지 않는다.369)≪日本書紀≫, 雄略記 七年(463) 癸卯. 회화 경향을 짐작할 수 있는 중국 남조 梁에서의 畵師 입국, 화가 白加와 阿佐太子의 도일은 모두 6세기에 이루어졌다.370)≪梁書≫권 54, 列傳 48, 諸夷 百濟 中大通 6년(534) 및 大同 7년(541). 累遣使獻方物 幷請涅槃等經義 毛詩博士幷工匠畵師等 勅幷給之.
≪日本書紀≫ 崇峻記 원년(588) 戊申 및 推古記 5년(597) 丁巳.
때문에 현재 전하는 자료로는 漢城시대 백제회화가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남아 전하는 백제의 회화로는 공주 宋山里 6호분 및 부여 陵山里 벽화고분의 일부 벽화, 武寧王陵 출토 王妃頭枕과 足座의 장식그림 및 扶蘇山寺址 출토 벽화편이 있다. 회화에 準하는 작품으로 무령왕릉 출토 銅托銀盞의 선새김그림 및 부여 外里 절터 출토 山水文塼들의 그림을 들 수 있다. 이들 작품의 제작시기는 6세기초에서 7세기초에 이르는 기간이다.

 고분벽화의 보존상태는 매우 나빠 공주 송산리 6호분에서는 사신의 흔적만 확인되었으며,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에서는 널방 벽의 사신 중 백호의 머리부분 일부, 천정의 인동연꽃과 흐르는 구름무늬 일부만 식별 가능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중국 南朝式 벽돌무덤(塼築墳)인 송산리 6호분벽화는 두껍게 회를 칠한 일부 벽면 위에 묘사되었으며, 백제식 平天井 돌방무덤(石室墳)인 능산리 고분벽화는 片麻巖 판석 위에 회칠없이 그려졌다. 송산리 6호분벽화는 흔적으로 보아 화면을 사신만으로 구성한 점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백호의 머리를 자연계의 호랑이나 표범처럼 그리고, 주작을 널방 문 윗벽에 배치하는 등 사신의 위치와 형태에서는 남조양식의 수용을 보여준다. 한편 능산리 벽화고분의 꽃잎이 넓고 끝이 비교적 부드러우며 원점형 꽃술을 지닌 연꽃에서는 6세기 고구려 평양계열 고분벽화와의 관련이 엿보이며, 흐르는 구름 끝에 가해진 陰影은 남조, 혹은 고구려회화에도 보이는 기법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백제와 중국 남조 특히 梁과의 문물교류가 매우 긴밀하였음은 유적, 유물상으로 뿐 아니라 문헌기록상으로도 거듭 확인이 된다.371)위의≪梁書≫ 권 54, 列傳 48, 諸夷 百濟條 기사 참조.

 웅진·사비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기의 벽돌무덤과 수많은 돌방무덤 가운데 현재까지 발견된 벽화무덤은 2기에 불과하다. 이로 보아 백제에서는 무덤 안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예외적인 행사였으며, 송산리 6호분에 사신이 그려진 것은 웅진시대의 백제 지배층이 중국식 벽돌무덤을 받아들이면서 당시 南北朝 및 고구려에서 크게 유행하던 四神에 의한 死者 보호관념을 수용한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널방벽에 사신을 그리는 풍습도 사비시대 초기를 고비로 무덤자리를 四勢(四神의 형상을 갖춘 地勢)에 맞게 택하는 相地相墓術에 흡수된 듯하다. 송산리 6호분과 같은 벽화 구성방식을 계승한 벽화고분이 능산리 벽화고분 외에 더 이상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525년 봉인된 무령왕능 출토 王妃頭枕 측면에는 瑞鳥·飛天·魚龍·인동연꽃 등이 묘사되었다. 비록 朱漆金箔龜甲文 안에 細筆로 조그맣게 그려진 장식그림이나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필치가 눈길을 끈다.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수염털연봉오리와 인동연꽃, 연꽃화생에 의해 출연한 듯 모습이 완전치 않은 서조·비천·어룡은 6세기 東아시아 회화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존재이자 표현기법이다372)吉村怜,<百濟武寧王妃木枕に畵かれた佛敎圖像について>(≪美術史硏究≫14, 1977;≪中國佛敎圖像の硏究≫, 東方書店, 東京, 1983에 재수록).
―――, 앞의 글(1985).
(<그림 14>). 그러나 인동 잎의 끝이 날카롭게 뻗치지 않고, 飛天의 天衣자락이 부드럽고 여유있게 휘날리며, 서조와 어룡이 하늘을 遊泳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백제적 筆線이다. 王妃足座 측면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흐르는 구름과 연꽃 등의 표현기법도 두침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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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4>무령왕능 출토 왕비두침문양 部分
<그림 14>무령왕능 출토 왕비두침문양 部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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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세기 백제 산수화의 발전과정과 표현수준은 무령왕능 출토 銅托銀盞두껑 및 외리 출토 山水紋塼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은잔두껑 밑둘레에 그려진 三山形의 산능 선에는 나무를, 산 사이의 계곡에는 瑞鳥를 선새김하였다. 도식성이 엿보이나 좌우대칭을 이루며 반복되는 짧은 고사리꼴 무늬로 산주름을 나타내고 있으며, 서투르나마 두 세 가지 형태로 나무를 묘사하는 등 선새김그림이 지니는 표현상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산수 표현의 기본요소를 놓치지 않고 있는 점이 눈에 띤다. 7세기초의 산수문전에 이르러 산수 표현은 은잔두껑그림의 수준에서 한 단계 높아진다. 삼산이 지니는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산은 여전히 삼산형으로 그려지나, 안정된 좌우대칭 구도 속에 조금씩 거리를 두면서 삼산형 土山들을 배치하고 화면의 좌우와 近景 및 토산들 사이의 中景 일부에 巖山을 표현함으로써 산 사이에 공간감과 거리감이 느껴지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산봉우리에 솟은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산 사이의 크기 비례를 적절히 하여 산다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등 6세기초와는 다른 산수 표현수준을 보여준다. 이것이 匠人에 의한 塼무늬임을 고려하면 이 시기 백제화가의 산수화는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373)安輝濬, 앞의 글(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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