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2. 회화
  • 3) 신라와 가야의 회화

3) 신라와 가야의 회화

 삼국시대 신라의 회화로는 順興에서 발견된 邑內里 벽화고분과 於宿述干墓의 벽화 및 읍내리 벽화고분 출토 棺臺殘片그림, 경주 155호분 출토 馬具裝飾그림, 경주 98호분 출토 漆器殘片그림 등이 현재까지 남아 전하는 것의 거의 전부이다. 5∼6세기로 편년되는 이들 작품의 표현수준은 그리 높지 않으나 후에 善德女王으로 즉위하는 德曼公主의 일화로 보아 신라의 회화는 늦어도 6세기말에 이르면 唐의 궁정회화에 대한 感賞眼을 성립시킬 정도로 높은 수준에 이른 듯하다.374)善德王立…德曼性寬仁明敏(中略)前王時 得自唐來牧丹花圖幷花子 以示德曼 德曼曰 此花□□□□定無香氣 王笑曰 爾何以知之 對曰 畵花而無蝶 故知之…此花絶艶而圖畵又無蜂蝶 是必無香花 種植之 果如所言 其先識如此(≪三國史記≫ 신라본기 선덕왕 즉위년). 651년에는 회화관계 업무의 관장기구로 추정되는 彩典이 설치되는데,375)≪三國史記≫권 38, 雜誌 7, 職官 上. 彩典 … 眞德王五年(651)置 位自舍知至奈麻爲之 史三人 一云四人. 이는 점차 활발해지는 회화활동을 국가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흙무지돌방무덤인 읍내리 벽화고분은 남향의 외방무덤으로 널방 앞벽의 ‘己未中墓像人名□□’이라는 묵서로 말미암아 己未中墓 벽화고분으로도 불린다. 479년 또는 539년에 축조된 것으로 믿어지며 널방문과 네 벽에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376)묵서명의 干支를 ‘己亥’로 읽고 무덤축조 연대를 579년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東 潮,<新羅.於宿知述干壁畵墳に關する一考察>,≪東アシアの考古と歷史≫上, 1985). 널방 문 좌우에는 뱀을 든 채 눈을 부릅뜨고 널길 쪽을 향해 달리는 자세의 力士와 눈이 크고 코가 높은 역사를, 널방 왼벽에는 산악과 원안에 그려진 새를, 널방 앞벽에는 鮮形旗를 든 인물을 그렸으며 인물 위에는 묵서명을 썼다. 오른벽에는 담에 둘러싸인 가옥과 버드나무를, 안벽에는 왼벽에서 이어지는 산악과 연꽃·서조를 묘사하였다. 천장에는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다. 널방에서 발견된 棺臺의 앞면 상부에는 博山文의 일종이, 하부에는 산수도가 표현되었다. 산악과 인물, 장식무늬의 표현수준은 덕흥리 벽화고분을 비롯한 5세기초 고구려 고분벽화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구체적인 생활풍속장면이 보이지 않고, 왼벽과 안벽에 연이어 산악을 그려 넣는 등의 벽화배치는 順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벽화구성상의 지방화 때문인 듯하다. 역시 남향의 외방돌방무덤인 어숙술간묘는 널방의 돌문 안쪽면에 ‘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刻銘이 있고 於宿이라는 인물이 문헌기록에도 보이고 있어 축조시기는 595년으로 추정된다.377)秦弘燮,<新羅於宿述干墓發見의 意義>(≪梨大學報≫447, 1971. 10;≪三國時代의 美術文化≫, 同和出版公社, 1976에 재수록).
東 潮, 앞의 글(1985).
석회면 위에 그려졌던 벽화는 대부분 탈락하여 널길 천정의 연꽃과 돌문 바깥 면에 그려졌던 세 인물의 그림만 일부 남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지름만 60cm에 이르는 대형연꽃들은 꽃술이 죽순형으로 표현되는 등 고구려나 백제계통의 연꽃과는 다른 신라화된 것이다. 그러나 주름진 넓은 치마를 걸친 두 귀부인과 바지를 입은 귀부인 1/4크기의 시녀로 이루어진 듯한 세 인물상은 고구려 쌍영총벽화중의 귀부인 공양행렬을 연상시킨다. 이들 두 벽화고분은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이던 순흥에서 발견된 점, 벽화에 고구려적 요소가 짙게 담겨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155호분 출토 天馬圖는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馬具위에 그린 장식그림으로 필선(筆線)은 활달한 편이나 묘사력은 그리 높지 못하다(<그림 15>). 네 변을 인동당초문띠로 두르고 그 안에 앞으로 내닫고 있는 흰말과 유사한 짐승을 그렸다. 짐승의 갈기와 꼬리털은 뒤로 날카롭고 힘있게 뒤로 뻗어 나간 반면, 네 다리는 유영하듯 부드럽게 엇갈리며 앞뒤로 구부러지고 있어 속도감을 나타내는 표현 사이에 어긋남이 있다. 사슴을 연상시키는 머리, 몸체의 반달무늬, 네 다리 사이의 갈고리무늬, 입에서 뿜어 나오는 신성한 기운등이 전설상의 麒麟을 연상시키기도 한다.378)李在重,<三國時代 古墳美術의 麒麟像>(≪美術史學硏究≫203, 1994). 고리형의 자작나무껍질테 위에 반복하여 그려진 瑞鳥와 기마인물 역시 세련미는 부족하나 소박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눈에 띤다. 경주 98호분 출토 칠기잔편의 牛馬圖는 검은칠 바탕에 빨간색 線描로 소와 말의 움직임을 나타냈다. 천천히 걷는 소와 말의 움직임 표현이 좋을 뿐아니라 서로간의 거리도 적절하여 이 그림을 그린 장인의 관찰력, 묘사력, 화면구성력 등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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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5>경주 155호분 출토 천마도
<그림 15>경주 155호분 출토 천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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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의 회화자료로는 高靈 古衙洞 벽화고분에서 발견된 벽화 일부가 유일하다. 고아동 벽화고분은 남향의 외방돌방무덤이면서도 구조는 백제 웅진시대의 벽돌무덤을 따르고 있다. 6세기 중엽 백제의 후원을 받으며 신라의 압박에 대항하던 大伽倻의 입장을 반영하는 듯하다. 벽화는 회칠 위에 그려졌으나 현재는 널길 천정과 널방벽 상부에 연꽃문과 구름무늬 일부가 남아 있을 뿐이다. 연꽃문의 넓고 둥근 꽃잎, 물방울모양의 꽃술 등은 백제 연꽃문의 일반적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무덤구조뿐 아니라 벽화내용과 표현기법도 백제로부터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높다.379)全虎兌,<加倻古墳壁畵에 관한 일고찰>(≪韓國古代史論叢≫4, 1992).

<全虎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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