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3. 서예
  • 2) 백제의 서예

2) 백제의 서예

 백제는 고구려 문화를 바탕으로 토착의 농경문화와 중국 남북조시대의 문화를 가미하여 優美한 미술양식을 이루었다. 백제는 초기부터 五經博士와 각종 전문박사 제도를 두었으며 근초고왕 때에는 박사 高興이≪書記≫라는 역사책을 편찬하는 등 文翰과 기술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했다. 이는≪南史≫권 42, 蕭子雲傳에도 쓰여있듯이 일찍이 漢城時代(B.C. 18∼A.D. 475)부터 중국의 東晉과 교섭하여 그곳의 선진문화를 적극 수용했기 때문이며, 또 熊津시대(475∼538)에는 梁과 밀접하게 교통하였고 泗沘시대(538∼660)에는 陳과 北齊 및 隋와 외교적 친선을 유지하는 등 南北朝의 문화를 폭넓게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백제의 서예사료로서 한성시대에 해당되는 뚜렷한 금석문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일본의 石上神宮에 전래하는 七支刀에는 4세기경 백제의 왕세자가 倭王을 위해 만들었다는 명문이 금으로 상감되어 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제작연대와 명문해독 등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확실한 서예사료로서 다루기는 어렵다. 이에 비하여 웅진시대와 사비시대에는 백제 서예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몇몇 石文이 전한다. 백제의 도읍이던 공주와 부여에서 각각 출토된 武寧王陵誌石과 砂宅智積堂塔碑가 이것들인데, 모두 남북조시대의 해서체를 따랐으면서도 각각 독특한 서풍을 지니고 있다. 전자는 남조의 梁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던 武寧王(501∼523)의 무덤에서 출토된 왕·왕비의 지석으로 사료로서는 물론 서예연구에 있어서도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부드럽고 유려한 필치는 당시 중국의 금석문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명품이다(<그림 4>). 후자는 의자왕 때 大佐平을 지냈던 奈祇城의 사택지적이 佛堂과 佛塔을 건립한 것을 기념한 비로서 엄정하면서도 溫厚한 필치를 보여 북조의 해서풍에 상당히 근접하고 있다.382)佐竹保子,<百濟武寧王誌石の字跡と中國刻石文字との比較>(≪朝鮮學報≫111, 朝鮮學會, 1984), 118∼187쪽. 명문에 보이는 ‘甲寅’이란 간지는 의자왕 2년(642) 정변으로 유력귀족 수십 명이 추방될 때 사택지적도 나지성으로 은퇴했으므로 그 후의 첫 번째 갑인년인 654년에 해당된다고 여겨진다(<그림 5>). 또한 1995년 부여 陵山里寺址의 목탑 자리에서 발견된 石製舍利龕의 앞면에는 위덕왕(昌王)의 누이가 567년 사리를 공양한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무령왕릉지석에 가까우나 짜임이 좀 평정한 편이다.

확대보기
<그림 4>무령왕릉지석(525)
<그림 4>무령왕릉지석(525)
팝업창 닫기

확대보기
<그림 5>砂宅智積堂塔碑(654)
<그림 5>砂宅智積堂塔碑(654)
팝업창 닫기

 한편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王妃頭枕의 좌우 윗면을 자외선으로 촬영한 결과 ‘甲’·‘乙’이란 묵서가 발견되었다. 이 묵서는 두침의 좌우를 표시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백제시대 유일의 진적으로 무령왕릉지석과 같이 유려한 필치이다. 이 밖에 무령왕릉 출토의 銀製釧銘(520)이라든지, 몇몇 小型金銅佛像의 造像記, 그리고 공주·부여 일대의 고분이나 절터에서 출토된 瓦塼銘文에서도 당시 통용되던 해서·행서·초서의 편린들을 살펴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백제는 중국 南北朝와의 문화교류를 통해 그곳의 서예를 받아들인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남조의 서예를 적극 받아들여 이를 백제 특유의 부드럽고 유려한 필치로 더욱 발전시켜 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