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3. 서예
  • 3) 신라의 서예

3) 신라의 서예

 신라는 한반도 남부의 동편에 위치하여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중국문화와의 접촉이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다. 그러나 경주를 중심으로 한 부족국가시대를 거쳐 6세기 중엽 낙동강 중·하류의 伽耶(A.D. 전후∼562)를 병합하고, 나아가 백제·고구려의 영토였던 한강의 중·하류를 합쳐 그 영역을 넓혀가면서 고대국가로서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져갔다.

 이러한 신라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刻石·碑 등의 石文이 비교적 다수 전하고 있다. 그 중에서 초기의 것들은 대부분 자연석을 거칠게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자형은 남북조시대의 해서체에 가까우며 짜임이나 필치는 여유롭고 소박한 경향을 보인다. 예를 들어 경북 영일의 冷水里碑(503)와 경남 울진의 鳳坪碑(524)를 비롯하여(<그림 6>) 경북 영천의 菁堤碑(536), 경북 울주의 川前里 岩刻書(6세기 전반), 경주의 明活山城 作城碑(551 또는 611), 대구의 塢作碑(578), 경주의 南山 新城碑(591) 등에서 그러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이 밖에 1934년 경북 월성군 石杖寺址에서 출토된 壬申誓記石(국립경주박물관 소장)은 소년들이 장차 공부할 것을 맹세한 것으로 글씨는 치졸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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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울진 봉평신라비(524)
<그림 6>울진 봉평신라비(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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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眞興王(재위 540∼576) 때에 새로 점령한 지역에 세운 拓境碑나 점령 후 각지를 돌아보면서 세운 巡狩碑에서는 보다 정비된 석비 형식과 글씨 수준을 보인다. 척경비의 성격을 지닌 예로서 남한강 중류의 요충지를 얻고 세운 충북 단양의 赤城碑(545∼550)와 가야를 병합하고 세운 경남 창녕의 昌寧碑(561)가 있다. 이들 비는 넓적한 자연석의 한 면을 깎아서 명문을 새긴 것으로 碑라기보다 刻石에 가까운데, 그 중에서도 적성비는 비면이 매우 판판하고 行間과 字間을 정연하게 썼으며 뿐만 아니라 글씨의 수준도 상당히 진전되어 있다(<그림 7>).383)≪史學志-丹陽新羅赤城碑 特輯-≫12(1978) 참조. 또한 순수비로서 서울의 北漢山碑(555 또는 561∼568)와 함경남도 함흥의 黃草嶺碑(568) 및 이원의 磨雲嶺碑(568)는 척경비에 비해 보다 진보된 양상을 보여준다(<사진 8>). 직육면체의 빗돌 네 면을 판판하게 가공했는데 상단에는 덮개돌(蓋石)을 끼워넣는 촉이 있어 본격적인 석비 형식을 갖추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세로로 긴 장방형의 字型에 단정한 필치를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정비된 서풍이 나타나게 된 데에는 이들 석비가 국가적 차원에서 건립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 신라가 영토 확장과 함께 고구려·백제지역에서 통용되었던 선진적인 글씨를 흡수했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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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단양 신라적성비(545∼550)
<그림 7>단양 신라적성비(545∼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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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황초령 진흥왕순수비(568)
<그림 8>황초령 진흥왕순수비(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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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과 같이 신라시대 금석문에서는 대략 초기에는 졸박한 서풍을 보여 삼국의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준이 다소 떨어지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한자의 사용에 있어서도 우리말의 借音 표기방식인 吏讀가 빈번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이 시기의 문화적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다가 진흥왕시대의 영토확장에 따라 북한산과 황초령·마운령에 세워졌던 순수비에 이르면 석비 형식의 발전과 함께 보다 정비된 양상을 보인다. 또한 문장의 형식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한문투로 점차 전환되고 있어 이 시기를 즈음하여 신라의 서예가 삼국의 보편적 수준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다.

<李 完 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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