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1) 사원건축
  • (1) 고구려

(1) 고구려

 목조건물:고구려 사원건축을 형성한 목조건물은 선사시대의 원시적인 구조·기법으로 된 초가집이 아니고, 石造基壇 위에 질서 있게 배치된 초석에 민흘림 또는 배흘림을 갖는 기둥을 세우고, 보나 도리 등 架構材를 이음과 맞춤으로 서로 짜 올리고, 지붕에는 기와를 잇고, 단청으로 장식한 발달된 새로운 건물로 형성되었다. 이와 같이 발달된 새로운 건물은 삼국시대 이전에 통일국가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扶餘國에 이미 있었던 것으로404)≪後漢書≫권 85, 東夷列傳 75, 扶餘國. 고구려에서는 건국 당초부터 궁궐이나 귀족주택에 채택되었던 것이다.405)≪三國志≫권 30, 魏書 30, 東夷傳 高句麗.

 고구려의 목조건물은 고구려벽화고분에 그려진 각종 건물도와 기둥과 도리 등의 그림 그리고 묘실을 구성한 石柱 등의 모습과 몇몇 건물터 발굴에 의해 알게 된 기단의 모습 등으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건물 지붕은 우진각지붕이 많았고 작은 건물에는 맞배지붕이 채택되고, 기와는 수막새기와가 있었다. 기둥은 圓柱가 많았으나 벽가에 세우는 기둥에는 사각기둥이 사용되기도 했다. 기둥 위에는 枓拱을 올렸는데, 두공에는 二出目 두공도 있었다. 두공의 柱枓와 小累에는 굽받침이 있는 것이 많았으나 없는 것도 있었고 簷遮 끝은 밀을 경사지게 자른 것이 많았고 弧形으로 마무리한 것도 있었다(<그림 1>). 두공이 없는 건물의 경우에는 기둥 위에 주두만을 올린 형식, 기둥 위에 단장혀(短長舌)을 올린 형식 또는 기둥머리에 草栱을 끼워서 상부 가구재를 받치게 한 형식 등이 있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 昌枋 위에는 人字形臺工이나 童子柱를 세워서 상부 가구재를 받쳤다. 건물은 석재로 화장한 기단 위에 세워지며 중요하거나 격이 높은 건물은 이중기단 위에 세워지기도 했다. 이중기단의 경우는 초기에는 하층기단 삼면에 초석을 배치하여 건물에 장치된 遮陽의 기둥을 받치기도 했다.406)金正基,<三國時代의 木造建築>(≪考古美術≫150, 韓國美術史學會, 1981), 3∼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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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고구려 벽화고분 柱形圖
<그림 1>고구려 벽화고분 柱形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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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은 목조건물의 모습은 중국의 後漢代 華北지방의 건물과 그 뒤 北魏 건물의 영향을 받아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며, 극히 드물게 곡선적인 두공을 그린 기둥 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 南朝 건물의 영향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벽화고분에 나타난 목조건물의 요소들을 보아서는 北齊 이후의 건물 영향을 나타내는 요소들은 찾을 수 없었다.407)金正基, 위의 글, 17쪽.

 석탑:≪三國遺事≫에 의하면 靈塔寺 八角七層石塔이 세워졌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408)≪三國遺事≫권 4, 탑상 제 4, 高麗靈塔寺. 지금은 그 위치나 탑의 형식을 알 수 없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서 平壤 부근을 중심으로 평면이 6각 또는 8각이며 5층 이상의 層級을 갖는 석탑이 건립되었으며 그들 석탑의 형식에는 서로 공통되는 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석탑의 祖形이 靈塔寺塔이었을 것이라고 믿어진다.409)金正基,<韓國石塔樣式의 系列考>(≪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Ⅱ, 一志社, 1987), 428∼432쪽. 그러나 고구려에서는 이 탑 이후에 석탑이 건립된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이 탑이 건립된 시기는 고구려 멸망 직전의 시기로 따라서 후속 석탑이 건립될 시기적인 여유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람배치:고구려 사원의 가람배치형식은 1937년부터 39년에 걸쳐 大同郡 上五里寺址와 평양 淸岩里寺址에서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밝혀졌고, 광복 후에 실시된 평양의 定陵寺址와 鳳山郡 土城里寺址에서 역시 같은 형식임이 확인되었다.410)≪東明王陵과 그 부근의 高句麗遺蹟≫(第3章 건물지, 1976, 평양), 109∼216.
남일용,<黃海北道鳳山郡土城里高句麗궐터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87. 4기호), 8∼13쪽.
이에 의해 고구려의 기본적인 가람배치형식이 소위 一塔三金堂式임이 밝혀졌다.

 청암리사지는 평양 시가 남쪽 大同江을 바라보는 언덕 위에 있었다. 가람은 평면 팔각의 탑기단을 중심으로 동·서·북쪽에 탑을 향한 세 금당기단이 있고, 탑 남쪽에는 중문터로 보이는 건물터와 그 좌우에 전개되는 회랑의 흔적이 있었다(<그림 2>). 상오리사지에서는 유적 중앙부에 역시 평면 팔각의 탑기단과 탑 동·서에 동·서금당기단의 흔적이 확인되어 청암리사지와 같은 형식의 가람배치였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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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청암리 절터 배치도
<그림 2>청암리 절터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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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定陵寺는 輯安에서 평양으로 이장한 동명왕릉 앞에 건립된 사원으로서 그 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사원은 동서로 나란히 배치된 다섯 가람으로 이루어졌고, 그 중앙 가람이 사원의 중심가람이었다. 이 중심가람의 배치형식은 후대에 증·개축한 건물이 많았던 것으로 보였으나411)金正基,<高句麗定陵寺址 및 土城里寺址 發掘報告槪要와 考察>(≪佛敎美術≫10, 東國大 博物館, 1991), 19∼20쪽. 원래의 가람은 청암리사지와 같은 형식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토성리사지 역시 평면 팔각의 탑과 중금당·동금당기단의 흔적이 확인되어 일탑삼금당식의 가람형식으로 된 사찰이었음이 밝혀졌다(<그림 3>·<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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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정릉사지 가람배치
<그림 3>정릉사지 가람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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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토성리사지 도면
<그림 4>토성리사지 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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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사원의 기본적 가람배치형식인 일탑삼금당식은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가람 중심에 평면 팔각의 목탑을 두고 그 북쪽에 남향한 중금당·탑의 좌·우에는 탑을 향한 동금당과 서금당을 배치하며 중금당 북쪽에 역시 남향한 강당을 두고, 탑 남쪽에는 중문을 배치하며 중문 좌우에서 동서로 뻗은 회람이 북쪽으로 꺽어져서 강당 부근에 닿았을 것으로 생각되나, 아직 이들 회랑과 강당과의 배치관계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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