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1) 사원건축
  • (3) 신라

(3) 신라

 목조건축:신라에서의 발달된 새로운 건물은 늦어도 5세기 초 고구려를 통해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天馬塚 발굴과 皇龍寺址 발굴에서 眞平王 6년(584) 금당을 중건하여 善德王 12년(643) 목탑을 건립할 즈음 일단락 된 것으로 보이는 중건가람의 건물 유구들에서 짐작하게 되었다. 천마총의 목곽 짜임새와 副葬品 收藏櫃의 가공기법에 새로운 건축기법이 보였고, 황룡사 중건가람의 배치형식이 고구려 가람의 변형형식이며, 세금당의 기단형식이 고구려 청암리사지의 탑과 세 금당의 기단과 같았고, 동금당 초석 밑의 기단 보강을 위한 여러 층으로 된 円形積心이나 강당 밑과 그 좌우에 전개된 연속 口자형 敷石 등도 고구려 유적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짐작할 수 있었다.417)輯安東坮子유적의 규모가 큰 주택건물 유구에서 초석 밑 보강 부석과 벽선 밑 보강 부석이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목조건물의 모습도 지금 그것을 확실하게 입증할 구체적인 자료는 없으나 고구려의 목조건물을 바탕으로 시작하였을 것이고, 점차 신라적으로 변형·정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백제와의 친교를 통해 백제 건물의 영향도 9층목탑 건립 경위 등으로 보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신라 목조건물의 기단 형식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은 황룡사지에서 조사된 이 시기의 건물 유구들 뿐이었다. 기단 구축방법이 굴광판축으로 된 것은 세 금당기단이었으며, 탑기단은 굴광하여 그 속에 직경 20㎝ 내외의 냇돌을 한 겹 깔고 그 위에 진흙을 덮어서 다지고 다시 냇돌을 까는 일을 여러 번 되풀이하여 기단을 구축하는 굴광판축기법의 변형방법으로 만들고 있었다. 또 세 금당은 낮은 하층기강 위에 비교적 높은 상층기단을 쌓은 이중기단이며, 하층기단 상면에는 차양의 기둥을 받치는 초석을 배치한 것으로 고구려 청암리사지와 백제 정림사지에서 볼 수 있었던 형식과 같은 것이었다. 기단 외장은 하층기단에서는 지대석·면석·갑석의 구분이 없는 장대석을 돌리고, 그 상면에 전돌을 깔고 있었다. 상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갑석을 갖춘 석조기단이며 지대석의 상면 외각과 갑석 하면 외각에 한 단의 깎임이 있는 형식이었다. 기단 전면 세 곳과 후면 한 곳에 석조계단을 설치하였고, 이 계단 側石은 지대석과 직각삼각형의 면석, 그리고 갑석이 각기 별석으로 만들어졌다. 탑기단은 지대석·면석·갑석을 갖춘 단층기단이며, 기단 전면의 세 곳, 양 측면과 후면 중앙에 각각 석조계단이 설치되어 있었고, 기단 주위에는 폭 1m, 높이의 차 20㎝ 정도의 이중으로 돌린 塔區가 있었다. 탑구는 갓돌을 돌린 안쪽에 전돌을 깔고 있었다. 이와 같은 탑구는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며, 통일신라시대 초기에 건립된 석탑기단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으로 이중기단인 금당에 대하여 격식이 한 급 더 높은 삼중기단을 상징하는 시설인 듯 하다. 강당과 그 좌우의 건물, 그리고 회랑들의 기단은 지대석·면석·갑석의 구별이 없는 장대석을 돌린 형식이며 기단 상면에는 전돌을 깔고 있었다.

 석탑:신라의 석탑은 芬皇寺石塔이 유일한 것이다. 이 탑은 석재를 전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아올린 전탑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탑은 분황사가 건립된 선덕왕 3년(634) 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며 현재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9층탑이라고도 하며 확실치 않다. 현존 탑은 1915년에 해체수리 된 것이나 초층탑신 4면에 만들어진 감실 입구 좌우의 仁王像은 이 탑 건립시의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그 말기에 본격적인 석탑이 건립된 데 반해 신라에서는 비록 석재로 만들어지기는 하였으나 전탑형식의 탑을 만들었다는 점이 매우 주목된다. 이 탑의 옥개와 옥개받침 형식은 그 뒤 통일신라에서 나타난 석탑형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가람배치:고신라대에 건립된 사원 가운데 興輪寺·永興寺·靈妙寺 등의 옛터로 전하는 곳이 발굴된 바 있으나 이 시기의 가람배치 형식을 짐작할 만한 자료를 얻지 못했다. 다만 사역 전역을 발굴한 황룡사지와 현존하는 건물 사이를 발굴한 분황사에서는 이 시기의 가람배치형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황룡사 창건 가람은 고대 가람형식으로는 특이한 것이었다. 동서 180m, 남북 140m의 장방형 구역을 중앙에 좀 넓은 세 구역으로 나누어, 그 동·서변에 승방으로 보이는 건물을 배치하고 남변과 중앙구역 동·서 경계에 회람을 돌리고, 남변 중앙에 중문을 두고, 북변에는 강당과 승방의 구별이 되지 않은 건물을 배치하고 있었다. 탑과 금당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그것은 중건가람의 탑과 금당의 굴광기단에 의해 흔적이 없어진 것으로 보였다(<그림 10>).

확대보기
<그림 10>황룡사 창건 가람 추정도
<그림 10>황룡사 창건 가람 추정도
팝업창 닫기

 황룡사는 진흥왕 35년(574)에 丈六尊像을 주조하고 진평왕 6년(584)에 새로 금당을 건립하게 되는데, 이때 비로소 본격적인 가람이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계획에 따라 새로 건립된 중문을 창건중문보다 6m정도 남쪽으로 옮기고, 회랑을 複廊으로 중금당 좌우에 동·서금당을, 강당과 그 좌우에 승방으로 보이는 건물을 배치하고, 선덕왕 14년에 중금당 남쪽에 구층목탑을 완공함으로써 중건가람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때 아직 동·서 회랑은 복랑으로 만들지 못하고 창건가람의 동·서 승방을 개조하여 회랑으로 사용했다. 이와 같은 가람배치형식은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 탑 좌우에서 탑을 향했던 동·서금담을 중금당 좌우로 옮겨 남향시키는 변화를 보인 가람으로 이해할 수 있고 신라적 일탑삼금당식 가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가람은 통일기에 들어서 다시 탑 앞 좌우에 鐘樓와 經樓가 배치되는 변화를 보이게 된다418)≪皇龍寺≫(文化財管理局·文化財硏究所, 1984), 371∼398쪽.(<그림 11>).

확대보기
<그림 11>황룡사 중건 가람계획도(推定)
<그림 11>황룡사 중건 가람계획도(推定)
팝업창 닫기

 분황사 가람은 1975년에 금당지 일부를 발굴하여 굴광판축기단을 확인한 바 있었고, 1990년에서 92년까지 3차에 걸쳐서 분황사 동쪽 담장 부근과 사역내 공지를 발굴하여 창건가람 중심부의 모습을 확인했다. 이에 의하면 현 석탑 북쪽에 중금당을 두고, 탑과 중금당 사이 동서에 남향한 동·서금당을 배치한 형식이었다.419)文明大,<芬皇寺發掘調査略報告>(≪考古美術≫112, 1979).
―――,<분황사발굴조사>(≪年報≫3, 경주문화재연구소, 1992), 158∼173쪽.

 이와 같은 배치형식은 단순한 비교로는 황룡사 가람보다 고구려 가람에 더 가까운 형식으로 보이며 황룡사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분황사 창건시기로 보아 이와 같은 생각은 불합리하고 사역의 폭이 좁아 황룡사와 같이 동·서금당을 중금당 좌우에 배치하기 어려워서 이를 앞으로 옮겨 사역의 동서 폭을 줄이려고 한데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어떻든 신라의 두 가람이 약간의 형식적인 차이는 있으나 일탑삼금당식이었던 점은 매우 주목되는 사실이다(<그림 12>).

확대보기
<그림 12>분황사 법당 변천도
<그림 12>분황사 법당 변천도
팝업창 닫기

개요
팝업창 닫기
책목차 글자확대 글자축소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페이지상단이동 오류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