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고대
  • 08권 삼국의 문화
  • Ⅳ. 문학과 예술
  • 6. 건축
  • 2) 궁실·연못
  • (1) 궁실

(1) 궁실

 宮室이란 용어는 우리 나라나 중국의 고대 문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말이다. 이들 문헌에 나타난「궁실」의 뜻은 쉽게 궁궐 또는 궁전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三國志≫高句麗條에는 고구려에 불교문화가 전해지기 이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으며, 이 글 가운데 ‘궁실’은 궁궐이나 궁전이라고 이해하기 어렵다.

그 풍속은 음식을 절양하고 즐겨 궁실을 다스리며 거처하는 곳 좌우에 대옥을 세워 귀신과 영정 사직을 제사한다(≪三國志≫東夷傳 高句麗).

 여기에서의 궁실은 궁전건물을 포함한 당시 귀족의 주택건물을 총칭한 것인 듯 하다. 그리고 이 건물은 기와로 있고, 단청한 발달된 새로운 건축기법으로 된 화려한 건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새로운 건물 모습에 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고구려·백제·신라의 궁궐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하겠다.

 고구려:고구려 건국시의 도읍은 沸流江 유역의 卒本지역으로 전하며 유리왕대(B.C. 19∼18)에 압록강 북쪽 通溝의 國內城으로 옮겼고, 山上王 13년(209)에는 丸都에 천도하고, 長壽王 15년(427)에 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소재지는 확실하지 않고 현재 통구에는 國內城址라고 전하는 유적이 있다. 유적에는 성벽을 비롯한 문지와 角樓·稚城 등이 남아 있으나 궁궐터는 확실치 않고 건물들의 배치 상황도 전혀 알 수 없다.

 평양에 천도하고는 大城山 남쪽 기슭에 安鶴宮을 건립하여 정궁으로 삼았고, 平壤城을 축조하여 그 안에 牧丹台·萬壽台 등의 遺址들이 남아있다(<그림 1>). 그러나 이들 궁궐지 가운데 발굴되어 건물의 배치 등 궁궐의 모습을 알게된 것은 安鶴宮址뿐이다.420)≪조선고고학개요≫(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7), 216∼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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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대성산 주변 고구려 유적분포
<그림 1> 대성산 주변 고구려 유적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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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학궁은 외곽 성벽의 일변이 약 610m의 마름모꼴 비슷한 평면이며, 그 속에 총 건평 31,500㎡ 가까운 58동의 건물터가 있다. 성벽은 밑이 약 9m로서 흙과 돌은 섞어서 쌓았고, 내외면 하부에는 일정한 높이의 석축이 있었다. 성곽의 남벽 중앙과 그 좌우, 그리고 동·서·북벽 중앙에 성문이 있었다.

 궁궐의 중요건물들은 남문을 통과하는 중심축상에 기본적으로 좌우대칭이 되도록 배치하고 있으나 궁궐 중앙부 이외에는 지형에 따라 적절히 건물을 배치하고 있었다. 건물은 남문 북쪽에 남궁과 중궁·북궁이 일직선상에 놓이고, 이들 궁은 서로 궁에 따른 건물과 복랑의 회랑과 문에 의해 서로 연결되고 있었다. 궁궐 안 서북 모서리와 동변 중앙부에는 각각 좌우에 翼舍가 붙은 두 동의 건물이 있고, 이들 건물에는 문이나 회랑이 없었다.

 남궁의 동서 길이는 280m나 되고 그 제1궁전은 정면 11칸, 측면 5칸의 건물로써 안학궁의 가장 큰 건물이고 그 좌우에는 翼廊이 달려 있었다. 제1궁전의 회랑은 남북 114.5m, 동서 85m의 복랑이며 남회랑 중앙에 전면 5칸, 측면 2칸의 문이 설치되었다. 제1궁 서쪽에는 회랑으로 연결되어 남향한 건물이 있고, 건물 앞에는 造山과 연못이 있는 정원이 있었다. 제1궁 동쪽에도 남궁 동휘랑을 공용하여 그 동쪽으로 편면이 日자형의 회랑으로 둘러쌓인 일군의 건물이 있었고 이 남회랑 중앙에 문이 있고, 중앙회랑 중심에는 좀 작은 건물, 그리고 북회랑 중앙에는 좀 큰 건물이 있었다. 이 남궁은 왕의 공식 업무를 위한 궁전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중궁과 북궁은 남궁에 비해 규모가 작으며, 북궁은 서궁과 한 덩어리가 되어 남북으로 긴 여러 채의 행랑 사이에 남향한 크고 작은 건물들이 배치되었다. 북궁 북단과 북문 사이에도 조산을 만든 정원터가 있었다. 왕의 사적인 정원 즉, 禁苑인 듯 했다. 동궁은 성곽 안 동북쪽 모서리인 좀 낮은 지대에 있었다. 궁궐 중심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곳에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궁 즉, 태자를 위한 궁으로 보이며, 성곽 동남 모서리에는 장방형의 연못터가 있었다.

 이와 같은 안학궁의 건물 배치로 보아 고구려 궁궐은 주위에 성벽을 쌓아 궁성을 형성하여 그 내부 중앙부에 주된 궁전건물을 질서 있게 배치하고 그 좌우 북쪽에 사적인 궁전이나 부속시설 등을 배치하며 정원도 만든 어느 정도의 규칙적 배치방법이 정착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었다(<그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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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안학궁 배치도
<그림 2>안학궁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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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백제 도읍은 건국당초 한강 연안의 慰禮城에 정했으나 近肖古王 26년(371)에 漢山下에 도읍을 옮겼다고 한다.421)≪三國史記≫권 24, 백제본기 2, 곤초고왕 26년. 그러나 위례성이나 漢山城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여 통일된 견해는 없다. 다만 석촌동이나 방이동의 고분군에 주목하여 그 부근의 어느 곳이 도읍지였을 것이라는 견해가 많으며, 이들 고분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몽촌토성이나 풍납동 토성을 도성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422)金元龍,<風納里包含層調査報告>(≪서울대학교 考古人類學叢刊≫3, 1967), 9쪽. 그러나 이들 유적에서도 당시의 확실한 궁궐터로 보이는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다. 이 밖에도 廣州郡의 二聖山城을 발굴하여 여러 건물터가 발견되어 도성으로 추정하기도 했으나 확실한 것이 못되었다.

 文周王 원년(475)에 고구려에 의해 한산성이 함락되자 도읍을 공주로 옮겼고 그때의 도성이 公山城이라 생각되고 있다. 이 공산성 내부 건물터의 발굴에서 여러 건물 유구가 발견되었으나 대부분이 후대의 건물터였고, 성내 서남쪽의 臨流閣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백제 숫막새 1점이 출토되어 이 곳이 公州期의 궁궐터라는 의견도 있으나423)≪公山城百濟推定王宮址發掘調査報告書≫(公州師範大 博物館, 1987). 이론도 많다. 종래 이 시기의 궁궐은 이 산성 남쪽기슭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으나 그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지 않아 아직 단정할 수는 없는 상태다.

 聖王 16년(538)에는 도읍을 공주 남쪽 白馬江의 부여로 옮겨, 義慈王 20년(660)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의 도읍이 되었다. 부여도성은 종래의 백제도성과는 달리 중국 고대도성의 제도에 따라 扶蘇山城을 후진으로 그 남쪽과 백마강 서안 일대를 둘러싼 羅城을 축조하고 그 안에 五部五巷의 구획을 만들어 그 속에 일만 여 호를 넣어 관아와 사원 등을 배치한 條坊制를 실시했다. 그러나 현재 조방제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궁궐의 위치가 부소산 남쪽 기슭으로 전해질뿐이다. 최근 이 부근에 궁궐에 속하는 시설의 일부로 생각되어지는 유구들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나 그 실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백제 궁궐의 유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해 초기의 궁궐은 검소하고 소박한 것이었으나424)≪三國史記≫ 권 23, 백제본기 1, 온조왕 15년. 후에는 못을 파고 조산하여 진기한 짐승과 화초를 기르는 정원도 꾸미고,425)≪三國史記≫ 권 25, 백제본기 3, 진사왕 7년. 泗沘宮에서도 그 말기에 들어서는 화려한 원지를 궁남에 파기도 하고,426)≪三國史記≫ 권 27, 백제본기 5, 무왕. 호화로운 태자궁을 짓는 등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궁궐을 경영하였다.

 신라:신라의 도읍은 건국에서 멸망할 때까지의 근 천년 동안 경주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경주가 동쪽에 明活山, 북쪽에 金剛山(北岳), 서쪽에는 玉女峰과 仙挑山(西岳) 그리고 남쪽에 金鰲山(南山)에 둘러싸인 분지로서 천연적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 산악에는 각기 견고한 산성이 축조되어 도성 방어에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신라 궁궐에 관해서는 赫居世가 처음에 南山 서록 高虛村에 왕궁을 마련했고,427)≪三國遺事≫赫居世. 그 뒤 21년(B.C. 37)에 토성인 金城을 축조하고 26년에는 그 속에 왕궁을 건립했다고 한다.428)≪三國史記≫ 권 1, 신라본기 1, 혁거세 21·26년. 금성의 위치는≪東京雜記≫에 ‘府東四里’라고 되어 있고, 일설에는 閼川 유역에 있었으나 하천의 범람으로 유구가 유실된 것이 아닌가 하고 혹은 시가지 동쪽의 南古壘를 그것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신라 도성의 대표적인 것은 月城이다. 월성은 금성 동남에 婆娑王 22년(101)에 축조하였고429)≪三國史記≫권 34, 잡지 3, 지리 1. 그 후로는 왕궁이 月城 안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월성은 경주 남쪽을 흐르는 南川의 망곡부 북안을 남변으로 한 구릉지에 반월형으로 축조된 토성으로 토성 정상에 女墻처럼 굵은 냇돌로 담장을 쌓았고 밖에는 인공으로 만든 垓字가 있고 북변에는 습지를 이용한 자연해자가 있었다. 토성의 길이는 약 2㎞이고 내부 넓이는 20만㎡정도로서 궁궐의 궁성으로는 작은 규모이다. 따라서 성내에는 궁궐의 주요 건물들이 있었고, 그 밖의 시설은 성밖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삼국사기≫등에 의하면 성내에는 남문과 서문(歸正門) 북문이 있고, 정사를 집행하는 남당 (都堂)과 궁궐을 관장하는 內省과 중요한 의식을 거행하는 朝元堂, 시각을 알리는 鼓樓들이 있다고 했고, 그 밖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나 그 유지들은 전혀 알 수 없다.

 신라 왕경은 조방제에 의해 계획되었고 월성을 서남 끝으로 그 동북쪽에 전개되었으며, 황룡사가 그 중심부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그 조방의 흔적이 남았고, 일부 당시의 도로들이 발굴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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